[eBook]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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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 -444쪽

그 강의 리듬은 어린아이의 침실에 있었고
4월 앞마당 가죽나무 숲속에 있었고
그리고 "겨울 밤 가스등을 둘러싼 저녁 모임속에도 있었다." 라고 나는 소리 내어 시를 읽었다. T.S.엘리엇의 「사중주」였다.-454쪽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543쪽

관능은 아름다움인가, 연민인가. 아름다움이 참된 진실이나 완전한 균형으로부터 온다는 일반적인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각자의 심상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호에 따른 고혹이거나 감동이다. 그것에 비해, 연민은 존재 자체에 대한 가없는 슬픔이고 자비심일 뿐 아니라,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도덕률의 가장 기본적 기준이다. 그 두가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적 개념인바, 완전한 합치는 쉽지 않다. -673쪽

아득한 옛이야기, 낮은 노랫말이 그애의 머리칼, 볼, 어깨, 허리, 장딴지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가슴골은 깊고, 엉덩이로 내려간 허리 라인은 활공보다 부드러웠다. 관능적이었다. 아침 햇살로 밝혀진 그애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말할 수 없이 애련했다. 그애를 품 안에 담쑥 안아 뉘고서 온종일 머리와 어깨와 허리를 쓰다듬고, 홍옥 같은 입술과 뺨에 입 맞추고, 가슴에 귀를 댄 채 그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오르내리는 아랫배에 코를 문지르면서 그애의 숨결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고 싶었다. -675쪽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애를 오로지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은 관능조차 이길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의 사랑으로 관능과 욕망을 자유롭게, 공깃돌처럼, 갖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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