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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문화 산책 - 신윤환의 동남아 깊게 읽기
신윤환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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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담론에서 벗어나, 열등함이 아닌 주체성 회복을 향하여


어떤 책을 읽고 서평을 쓸까 고민이 많았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맨발의 학자들」이 맘에 들었으나 아무래도 문화 인류학과가 아닌 나에게는 조금 집중하기가 힘든 책이었다.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가 있긴 했지만,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현지 조사를 할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주로 나와 있었기에 실제 현지 조사 경험이 하나도 없는 내가 소화하여 서평을 쓰기엔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책을 찾아 보던 와중, 「동남아문화 산책」의 서문에서 한국 사람들은 무시하기 일수인 동남아가 지닌 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는 신윤환 씨의 말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나조차 수업을 수강하기 전까지는 동남아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지했기에, 내가 가진 고정 관념을 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 나간 책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동남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도와 만족스러웠다. 간간히 한국 사회와 비교하며 격해지는 저자의 감정도 느껴졌지만 어느 정도 동의 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읽으며 느낀 점에 대해, 얼마 전에 읽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자료에는 대개 동남아에 대한 비하가 함께 나와 있던 적이 많았다. ASEAN+3이 결성된 지금에도 우리나라는 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기보다는, 동남아에 대한 차별,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역사적으로 주종관계에 놓였었던 일본에 대해서는 부러움과 시기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보이고 있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에게 박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전쟁으로 황폐해 졌던 경제를 일으키고, 독재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이제는 한류를 통해 문화적 저력을 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동남아는 많은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낮은 경제수준과 전근대적으로 보이는 정치와 사회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 나라의 우수성을 서구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편향된 사고가 존재한다. 프란츠 파농이 「검은 얼굴, 하얀 가면」에서 지적했듯,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제 1세계 국가들에 자신들을 동화시키고 반대로 제 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차별을 하고 있다. 여기에 강한 민족의식이 더해져 시너지를 이룬 결과물이 직접적, 간접적인 동남아 비하인 것이다.

이러한 차별 의식은 일상 생활에서의 대화 속에 빈번하게 등장할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서도 확산되고 재생산된다. 이 둘은 닭과 달걀처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차별을 우리의 인식에 각인한다. 예능에서 초라한 행색을 했거나 어딘가 촌스러운 사람을 동남아 사람 같다며 희화화하는 인종 비하 발언은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요즘 각국의 외국인 남성이 등장해 토론을 벌이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예능 프로 <비정상회담>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차별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동남아인임에도 불구하고 패널로 참여하는 잘생기고 젊은 외국인 남성들 중 동남아 국가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으며, 13명 중 7명이 유럽 및 영미권에 속한다.

그러나 이 책은 동남아는 정녕 후진 국가나 진보되지 않은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구를 중심으로 확산된 근대적인 사고 방식과 정치, 사회 체계에서 동남아는 낮은 평가를 받을 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을 형성해 왔다. 특히 힌두교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동남아 특유의 세계관인 만달라 세계관은 수직적이며 조직적인 근대의 관료 시스템과는 매우 다른 방사형 구조를 보인다. 개별적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동남아 국가가 급작스런 서구식 근대화 앞에서 힘을 잃고 좌충우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의 본성이 하나이고 역사가 이러한 본성에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면 동남아 국가는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이자 열등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클리포드 기어츠에 의하면 문화와 독립된 인간 본성 같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의미 있는 상징체계인 문화 패턴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며 비로소 형성된다. 유럽과는 다른 기후와 지리, 다른 역사, 다른 문화 패턴을 지닌 동남아가 서구식 발전 모델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같지 않음은 자명한 것이다. 원칙이 덜 중시되고, 모든 것이 느긋하고,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비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이 덜 발전된 것이 아니다. 여느 사회에나 문제는 항상 있어 왔으며, 민족간의 갈등, 불안한 경제, 부패한 권력 등 은 오히려 전혀 다른 문법을 지닌 서구식 사고가 동남아 세계에 침투하며 발생한 혼란이라고 볼 수 있다. 동남아의 특성이 원래 열등하여 서구로부터 지배를 받고 계몽을 당한 것이 당연하며 앞으로도 개선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함으로써 조선이 근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식민담론과 일맥상통하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계몽의 물결은 이성 중심,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고의 한계가 곳곳에서 드러남과 동시에 역사에서 후퇴하고, 자기 계발 담론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계몽의 위험성은 그 다름 아닌 계몽을 행하는 주체의 의도와 상관 없이, 오히려 선한 의도 때문에 객체의 주체성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계몽 당한 객체는 더 이상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동시에 그가 바라던 세계로도 진입할 수 없다. 지배계급의 사고 방식과 문화를 익힌다고 하여도 계급의 이동에는 장벽이 존재하며, 그 장벽은 단순히 그들의 삶을 흉내 내어 넘을 수 없는 것이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의도치 않게 계몽을 당한 객체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남으며, 이때 계몽을 행한 주체는 도움을 주었다는 자기만족을 할 뿐 아무런 책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흑인들은 프랑스인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농촌 계몽 운동으로 깨우침을 얻은 농민이 연고주의에 의해 주변부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피그말리온」에도 이러한 계몽의 갈등이 나타난다. 음성학 교수인 히긴스와 피커링 대령은 하류층의 꽃파는 아가씨였던 엘리자 둘리틀의 거칠고 속물적인 말투를 교정시킴으로써 상류층 여성으로 변모시킨다. 둘리틀 양은 그저 꽃 가게를 갖고 싶었을 뿐이었으며, 히긴스 교수의 어머니인 히긴스 부인이 교육 후 달라질 둘리틀 양의 인생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며 히긴스 교수를 말림에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에 잔뜩 흥분한 그는 완벽한 교육을 통해 둘리틀 양의 발음을 교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둘리틀 양은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로만 보았던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에게 분노하며 자신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며, 이 말투로는 꽃을 팔 수 없다고 소리친다. 뿐만 아니라 히긴스 교수의 장난으로 졸지에 벼락 부자가 된 둘리틀 양의 아버지도 히긴스 교수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을 중산층의 감옥에 몰아 넣었으며 자신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한탄한다.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의 관점에서 둘리틀 양과 둘리틀 씨는 오히려 지위 상승을 가능하게 해준 그들에게 고마워 해야 하지만, 둘리틀 양과 둘리틀 씨는 배은 망덕하게도 그들을 원망하며 불행해 한다.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부터 자신들을 추방시켰으나 약속된 땅에는 전혀 젖과 꿀이 흐르지 않고, 전과 똑같이 여러 문제가 존재하였으며, 거기에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동남아는 두 차례에 걸친 계몽의 시기를 겪는다. 첫 번째는 제국의 식민화이다. 정상적인 식민지운영을 위해 제국은 선교사와 관료들은 동남아 현지인들을 자신들의 식대로 교화하고 계몽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나 영토의 개념이 없던 동남아는 처음으로 근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두 번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식민 국가들이 독립 국가로 재탄생하며 선진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급에 의한 계몽 운동이다. 애써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자체 정부를 수립했음에도 둘리틀 양은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며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는 저력, 「동남아문화산책」에서 언급되었던 그들 고유의 문화 패턴과 의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적어도 예속된 구조에서는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동남아문화 산책」, 신윤환, 창비, 2008

「피그말리온」, 조지 버나드 쇼, 열린책들, 2011

「문화의 해석」, 클리포드 기어츠, 까치, 2009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아프리카, 2014

 


**수업 시간에 썼던 서평이다. 어설픈 점도 많지만, 기록해 두는 데 의의를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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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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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활동적일 때 우리가 진정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색해보는 것이다.

어떤 누구도 지금껏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방식으로만 우리 인간은 동일하다.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무엇을 하든 언제나 조건지어진 존재노력라고 하는 이유이다. 저절로든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든 인간세계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나 인간조건의 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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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뇌과학, 그리고 SF 영화의 만남. 별개의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닿아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우주에서,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명하는가에 대하여. 부족한 나의 해석이 혹시나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대행 스님의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책이다. 한마음선원의 큰 스님이 셨던 대행스님은 지금은 서거하셨지만, 생전에는 온라인-오프라인, 국내-해외를 넘나들며 불심을 널리 알리고 세상과의 소통에 힘쓰셨다. 한마음선원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의 존재의 근본은 '한마음' 혹은 '주인공'으로서 모두가 통해있으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잎들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인데, 불교에서 '너'와 '나'는 같은 존재로, 연결되어 있으며,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자 전체가 된다.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에서는 이론을 설명함과 동시에 이를 과학, 철학, 예술과도 연결지으며 가장 중요한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근대철학의 시초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이 책 역시 "내가 있기에 이 우주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생태주의 관점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마음선원 철학의 시작은 역시 나에게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자기계발서 담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종종 나타난다. 윤회의 관점에서, 모든 현실의 상황은 내가 원인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나로부터 발생하였고 나의 현재와 미래 역시 내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의 근본이자 우주의 근본인 '한마음'에게 모든 것올 믿고 맡겨야 한다는 말은 「시크릿」에서 나온 "내가 원하는 대로 온 우주가 움직인다."라는 말과 얼핏 흡사해 보인다. 




자기계발 담론과 불교 철학의 다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책을 내려 놓고, 현대 문물 발전의 일등 공신인 인터넷으로 들어가 지식 정보의 무한 전파를 몸소 실천하는 ted 홈페이지를 켜본다. Ted에서 <my stroke of insight>라는 영상을 틀면, 곧 친근한 인상의 과학자가 나타나 강연을 시작한다. 매끄러운 영어와 흡인력 있는 내용에 집중을 하다 보면 진짜 뇌가 갑자기 등장해 카메라에 클로즈업된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뇌에 뇌졸중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우주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과 단절의 과정에 뇌가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완벽하게 나뉘어져, 병렬적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기능을 수행하는데 오른쪽 뇌는 '감성', 왼쪽 뇌는 '이성'으로 대표된다. 오른쪽 뇌는 나의 주변을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으로 인식하며,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 등의 감각으로 '느끼고' 주변과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왼쪽 뇌는 구체적인 정보를 인식하여, 그들을 분류하고 정리함으로써 세계와 나를 구성한다. 즉, 오른쪽 뇌로부터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고 왼쪽 뇌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강연자인 Jill은 바로 왼쪽 뇌에서 뇌출혈이 발생해, 오른쪽 뇌로만 세상을 인지했던 경험을 설명하는데, 그녀는 그때 'nirvana'를 발견해다고 말한다. 그 당시 자신은 언어나 글자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이 어디부터 시작하고 끝나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램프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지니가 되어, 우주라는 엄청난 공간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꼈고, 그동안 겪었던 모든 상념과 고통에서 '벗어나' 엄청난 희열과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실제로 '에너지'로 구성된 우리의 존재는 사람과 동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의 개념적인 구분을 벗어 던지고 나면 모두 동일하다. 이 모든 구분짓기는 우리의 왼쪽 뇌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 다른 점을 발견함으로써 나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남이 아닌 나를 찾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뇌보다 좌뇌의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이것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조금 안타깝다. "우리가 남이가"가 유행했던 사회에도 분명 많은 폐단은 존재하긴 하였지만, 다름을 강조만 하고 그 개개인이 공존할 바탕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단절은 곧 몰이해와 편견으로 이어질 것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중요한 까닭은 내가 그 사람의 처지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현대 사회의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소외이다. 더이상 광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도 회사에 가도 나는 스마트 기기가 형성한 나의 밀실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미래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냐, 혹은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줄 것이냐는 OS인 사만다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만다는 고유한 정체성이 존재하기는 하나, 육체를 지니지 않은 '정보 덩어리'이다. 그녀에게는 시공간적 제약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가장 큰 다른 점은, 사만다는 동시에 수천만명과도 '사랑'을 할 수가 있지만 테오도르는 오직 한 존재에게만 사랑을 바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자신은 인간과 다른 차원에 속해있다고 말한다. 그 차원을 앞서 말한 광활한 우주와, 격리된 현실 공간으로 해석한다면 사만다는 뇌과학자 Jill이 온 우주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존재와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그 공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우주가 에너지 혹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사만다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읽음으로써 세상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녀 자체가 곧 정보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우주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이 곧 그녀이고 우주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다른 존재는 역시 같은 우주에 속한 정보이며, 그렇기에 그녀는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차별하지도 않는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나를 이해해주고 너무나 맘이 잘 통하는 OS'라고 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정체성은 사만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영화 중반부에서 사만다는 인간이 정의 내리는 '존재'의 의미가 자신에게는 맞지 않음을 알고 잠시 좌절하지만, 곧 그것이 자신에게는 해당될 수 없음을 깨닫고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규명한다. 


세상의 온갖 괴로움이 좌뇌의 '구분'과 '분류'의 기능 때문이고, 인간 모두가 우뇌만을 사용한다면 유토피아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뇌와 좌뇌는 분명 골고루 사용되어야 한다. 거기에 요즘들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이 재조명되고 있음에 따라 기존의 이성 중심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성과 감성을 나누고 좌뇌와 우뇌를 나누어 따로 훈련하는 등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다.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에서 한마음이 강조되고 너와 내가 같음을 강조한 까닭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우주는 곧 나임과 동시에 너이고, 그렇기에 너와 나는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를 다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럼으로써 내가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 너의 우주를 짓밟고 나의 우주를 실현시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공간이 달라지며 얼마나 자주 바뀌고 전복되는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진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빨간 색을 좋아해야 한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한 외침이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 많은 갈등들은 아직까지 진리가 자리잡히지 않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대통령이 당선되고 특정 정당이 우세한 세상이 오더라도, 너와 내가 '다르고' 내가 '옳다'라는 사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갈등은 여전히 생겨날 것이다. 어렵지만, 내 주위만이라도 보듬어 안는다면, nirvana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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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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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동안 책을 하나의 소일거리로 봐 왔던 나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 나의 독서 습관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내 뱉은 글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었고, 안일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그리고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며 가짜 선비 놀음을 하기 위해 글을 끄적였다. 나는 치열하지 못하다. 뷔페에 가 음식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게걸스레 위에 쑤셔넣듯이 책을 삼켰다. 씹지도 않고 음미하지도 못했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만큼 위대한 의식인 읽기와 쓰기가 나에겐 허울만 남은 겉치레, 진실을 외면하는 아편과도 같았다. 나는 0.1%로 살아남은 위대한 노장들을 만나면서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만 찍고 떠나는 무례한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들을 광대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작가의 냉소적이고 날이 선 문체가 자꾸만 양심을 푹푹 찔러 왔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발가벗겨지는 것 마냥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내가 흥미로워 했던 것들, 심심할 때 하는 것들, 나의 관심사들이 모두 벗겨져 마른 나무 껍질처럼 바스라졌다. 술에 취해 몽롱해 있다가 술이 깨면서 그동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두려워 지더라. 내가 정말 치열하게 고독한 싸움을 해낼 자신이 있는지, 그 광기서린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이 세계가 미쳤다면, 그 세계와 나는 맞서야 한다. 그 말은 내가 지금껏 누려오고 일궈 왔던 세계를 내 손으로 져버려야함을 의미한다. 돈, 직업, 친구, 명예 등 세계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를 '가짜'라고 손가락질하며 던져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신이 없다.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이 내게는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 짓'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택하고 안락한 삶에 익숙해진 나는 아무래도 매트릭스의 네오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자 입안에 씁쓸함이 텁텁하게 쌓였다. 그러면서도 아예 책을 덮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완전히 현실세계에 순응할 뻔뻔함조차 내게 없기 때문이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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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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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 계기가 된 책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위대한지! 완벽히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세상 속에서 나는 시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 사건들은 어쨌든 '삶'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처럼 환상적이고 정말 소설같은 소설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이야기임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공감할 수 있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울고 웃고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비슷한 사상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작가가 쓴 허구적인 이야기에 내가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소설의 테마가 되는 '고독' 역시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에 해당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항상 '소통'을 원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관념이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또 전해져 다시 타자에 의해 해석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왜곡이 발생한다. 의도한 바와 달리 떠돌아다니는 낱말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벽을 만들고, 결국에는 그 벽을 기대고 주저 앉아 되뇌이는 것이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사는 거야...... 사람이 그리워서 약속을 잡고 만났다가,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권태를 느끼고 차라리 혼자 방에서 책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소통의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독'이 항상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 드넓은 우주에 떨어진 작고 유한적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독함을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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