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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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후벼파는 서문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 역시 그러합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13p


H양은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한 피부, 섬세하게 끝을 올린 속눈썹, 날렵한 눈꼬리에 적어도 매일 30분씩 시간을 보냅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양주를 즐겨 마시고, 언젠가 섹시하게 미끄러지는 선을 가진 자동차를 갖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만족'과 '허영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둘은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혹은 타인의 눈에 그것이 있어보이기에 원하는 것인지의 모호한 욕망의 경계를 왔다갔다 합니다. 둘의 연애 역시 그 모호함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략)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p


H양과 ㄷ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두근거리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서로의 두근거림은 같은 속도로 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상대방에게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은 나의 '매력'과 상대방의 '매력'이 어느 정도 호환가능한지에 대한 고도의 그리고 무의식적인 관찰 끝에 이루어진,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도 외부적인 기준에 의한 두근거림이었습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상품을 구매하듯 상대방을 선택한 것이지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서 정신적인 교류라든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만한 능력이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콩깍지의 위력은 대단해서, 둘은 서로의 외모라든가 분위기, 말투 등에 대한 호감으로 1년이 넘도록 알콩달콩한 연애를 해나가게 됩니다. 남들 다 하는 데이트도 하고, 남들이 하지 않은 데이트도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착각 속에서 사랑을 유지해갑니다. 자그마한 충치가 점점 커지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방치해가면서요. 그 충치란 '우리가 사실은 맞지 않는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애초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었고 서로에게서 기대하는 것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퍼스낼리티 시장에서는 마이너스로 간주될 것이 분명하기에 애써 감춰왔던 각자의 약점들은, 일단 거래가 성사된 후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딸려 오는 구박덩어리같은 존재로 서로가 기대했던 연애를 자꾸만 어그러뜨렸습니다. 


원래 애정결핍 증세가 조금 있고,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H양은 자신이 꿈꿔왔던 연애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져만 가자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좌절은 참 위험한 단어입니다. 점차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정서적인 허탈함을 자신의 분신으로 채워 나가 결국 상대방과는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거든요.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을 하다보니, 사실은 상대방이 자신의 거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자책은 전형적인 H양의 행동 패턴이었습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정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찬생하지 못한 자다. -36p



H양은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의존함으로써 대인간적 합일에 달성하려 했던 것이지요. 이런 어긋나고 잘못된 사랑은 H양과 ㄷ군 모두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합니다. 물론 헤어지고 난 후에도 H양은 여전히 후회와 고통으로 눈물을 짜내야 했습니다. 그녀가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그 합일에 도달하는 위한 길이 아예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다'고 말합니다. 그녀도 무수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그녀의 전 남자친구뿐이라는 생각은 현실의 고통을 더욱더 확대시켰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손에 정말 운명처럼 닿은 책이 바로 이 「사랑의 기술」이었습니다. H양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았었음을 깨달았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기술을 계속해서 연마하다보면 그녀가 또다시 사랑의 잘못된 패턴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후로, 「사랑의 기술」은 그녀의 연애 바이블이 되어 힘들 때마다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시간을 빠르게 돌려 볼까요.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납니다.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참 좋을텐데. 그녀는 또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울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체득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비슷한 실수와 비슷한 상처 뒤에 따라오는 것은 더 큰 좌절감입니다. H양은 결국, 또다시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 것이라면, 그 끝이 자신만의 감옥으로 향하는 길임이 반복된다면, 애초에 발걸음을 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사랑을 '주는 법'은 너무나도 어렵다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받는 법만 알려고 했던 그녀이기에 어떻게 줘야할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되고 싶어했던「두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카턴이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과 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자신의 그릇이 너무나 작고 영혼의 따스함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버리고 혼자만 그 안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연애의 낭만, 서로의 시선의 끝이 만나 가슴 속이 솜사탕처럼 빵빵해지는 그 순간에 대한 기대도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몇 십년을 함께 해야하는 결혼은 더더욱 버겁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 억지로라도 문을 살짝 열어두기로 합니다. 작은 빛이라도 그녀가 알아챌 수 있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합일' 그 충만함을 평생 느끼지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은 정말 많이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그것은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인데, 하다못해 곰도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될 수 있거늘 인간으로 태어난 H양이 인간도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동굴 속에 웅크려 있는 것은 좀 모냥이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진정이 되면, 처음 헤어지고 그랬듯 다시금 「사랑의 기술」을 읽고 마음을 추스린 후 빛을 향해 걸어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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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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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시게였으며, 빛의 계쩔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엇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이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13쪽

"이게 저의 마지막 간청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아가씨와 어울리지도 않고 또 아가씨와는 감히 건널 수 없는 차이가 나는 방문자를 맞는 일이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제 마음에서 우러나와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가씨와 아가씨를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만약 제 경력으로 도움이 되어드릴 일이 있거나 희생할 기회나 능력이 된다면 기꺼이 아가씨와 아가씨가 사랑하는 분에게 희생할 것입니다. 이 말은 열렬한 저의 진심이니 조용한 때에 가끔 마음속에 저를 떠올려 주십시오. 떄가 오겠지요, 머지않아 당신에게도 새로운 끈이 마들어지겠지요. 당신을 당신이 구민 가정에 부드럽고 강하게 묶어둘 끈 말입니다. 그 끈은 당신을 명예롭게 하고, 당신을 기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끈이 될 것입니다. 아, 마네트 양, 행복한 아버지의 얼굴을 뺴닮은 어린것이 당신의 품에 안겨 어머니를 바라볼 떄나, 당신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어린 생명이 발치에서 당신을 올려다볼 떄, 당신이 사랑하는 생명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220쪽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어 온다. 구름이 우리 쪽으로 흘러 온다. 달빛이 우리 쪽으로 비친다. 밤 전체가 우리를 따라온다. 하지만 아직 이들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추격하지 않는다. -515쪽

창조주가 정한 순서에 따라 장엄하게 일하는 위대한 마법사는 자신이 바꾼 것을 절대 되돌려 놓지 못한다. "만약 네가 신의 뜻에 따라 이 모습으로 바뀌었다면," 지혜로운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미혹자들에게 말했듯 "영원히 이대로 계속되리라! 다만 네가 한낱 주술에 의해 바뀐 거라면, 그때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리라!" -535쪽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5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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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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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헤밍웨이를 접한 것은,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노인과 바다를 제외하면) 토요명화극장에서 해 줬던 무기여 잘 있거라를 볼 때였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많은 작품이 그렇듯 급격한 전개와 지금 보기에는 상당히 느끼한ㅎㅎ 대사들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한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결국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흥미진진한 줄거리와 아름답고 섹시한 배우들, 영화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엄한 메세지에 넋을 놓고 바라봤더랬다. 모든 작가들에게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헤밍웨이에게서 내가 느낀 매력은 거칠고 쾌락을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염세적이고 이지적인, 고독하지만 멋있는 아저씨 같은 매력이다. 지금 보니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다. 정말, 완전 딱 그 이미지.

 

『무기여 잘 있거라』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는 헤밍웨이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헤밍웨이 삶의 굴곡은 그의 작품에서도 물결치며 나타난다. 특히 전쟁이라는 테마는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만큼 등장 인물의 성격, 행동에 큰 영향을 주며 작품 전체의 분위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다른 테마로는 투우가 되겠다. 작가 연보에도 나와 있듯, 헤밍웨이는 투우를 보기 위해 스페인으로 4 차례 여행을 갈 만큼 그 자신이 투우 아삐시오나도이다. (스페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들이 미국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를 대하는 장면의 묘사는 참 유머가 넘친다. ) 2부의 배경에 해당하는 축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투우에 대한 묘사는 헤밍웨이의 투우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잘 보여준다. 경험을 기반으로 쓴 만큼 생동감과 현장감이 잘 살아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읽을 때에는 처음 읽을 때 훑듯이 읽은 것과 달리 전쟁과 투우를 통해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다시 읽어 보았다. 책의 앞 장에 적힌,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거트루드 스타인의 대화 중에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이 두 글귀에도 유의하며 읽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잘못 이해했다가는 헤밍웨이가 시크하고 터프하게 비웃음을 찍 날리는 게 꿈에 나올 거 같아서;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고, 그냥저냥 발 뻗고 잘 수는 있는 정도인 듯하다.


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전체의 영광과 거룩한 목표로 포장되고 선전되지만 전쟁은 그 시작이 급격한 만큼 끝도 급격하다. 온 몸과 정신을 바쳤던 전쟁이 끝나고, 일상생활로 되돌려 진 개인이 마주하는 것은 평화 안에 감추어진 허무함이다. 피와 총 소리로 얼룩진 전쟁터에서 삶의 리듬은 곱절로 빨라지고 매일 아침마다 목숨을 새로이 걸어야 한다. 그 리듬의 속도가 갑자기 늦춰지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잠결에 침대 모서리에 발을 찧지 않는 것 뿐이 된다면 그 간격의 공허함은 얼마나 클까. 만약에 전쟁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바쳤다면 허무함은 배가 될 것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 제이크 반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성기를 다쳐 성불구자가 되어 돌아 온다. ‘체 말라 포르투나!’ 그는 남성성을 전쟁으로 인해 잃고 만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의 리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하나의 매개체를 잃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상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에 섞여든다. 그리고, 그의 상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전쟁 후 누구나 하나 씩 '상실'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그 정도는 큰 결점도 아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아닐까? 전쟁이 끝났지만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허무감도 상실감도 이어지지만 삶도 이어지기에 그는 살아나가야 한다. 그때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투우로 대변되지 않나 싶다.

 

투우

를 살펴보기 전에, 산 페르민 축제의 성격에 대해서도 중요한 밑줄을 쫙쫙 그어야 할 것 같다. 빰쁠로나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그 지역의 성인을 기리는 종교적인 축제로 일 주일간 지속되며, 이 때 그 유명한 ‘corrida de torros’와 투우가 열린다. 가게의 문은 모두 닫히고, 술집과 카페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모두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음식과 술을 나눈다. 바로 서 있던 것은 뒤집히고 뒤집혀 있던 것은 바로 선다. 경제 관념조차 뒤죽박죽이 되어 호텔의 식사 값이 두 배로 오르고 가만히 앉아 있는 손님에게 바로 주문을 요구하면서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술 값을 자기가 계산하기도 한다. 축제의 활기와 즐거움 아래서 모든 것은 용인된다.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있다. 황소를 마주하는 투우사의 곧은 몸이다.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 경기에서, 만원이 된 열기 가득한 경기장에서 투우사는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위험에 자기 스스로를 내던지며 비극의 달콤함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관객들도 가짜 기교를 보이며 거짓으로 연기하는 투우사보다, 진정으로 황소와 목숨을 둔 투우를 보여 주는 투우사에게 흰 손수건을 던지며 환호한다. ‘삶을 철저하게 사는그 자세를 찬양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라고 제이크는 독백한다. 어떻게 사느냐를 알게 된다면 자연스레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제이크가 바랐던 것은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마치 투우사처럼.

 

전쟁은 그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개인은 전쟁 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그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새로운 리듬에 맞춰 적응해야 할 뿐이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허위와 가짜가 아니라 진실되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크 반스가 레이디 애슐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러야 할 대가를 치루며 레이디 애슐리의 곁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제이크는 결국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녀에게 사랑하는 제이크라고 적은 전보를 보내고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게 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퇴장한 로버트 콘처럼 자기연민에 빠진 짝사랑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가 브렛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렛에게 제이크는 위기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가장 위로 받고 싶은 사람으로 다른 남자들과 헤어지듯 그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픈 남자일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 화냥년이 되고 싶지 않다는 브렛의 고백으로 보아, 앞으로 제이크가 그녀 곁의 어설픈 다른 남자의 존재로부터 고통 받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제이크가 치열하게 삶으로써 얻어낸 삶의 즐거움이 아닐까.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영원히 친구로 곁에 머물게 해달라는 남자의 애틋한 마음에 대한 보상말이다.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란 어렵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맴돈다. 힘의 강도만큼이나 방향도 중요하기에. 현재의 나도 그렇다. 앞으로 놓인 인생,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을 살피는 자기 성찰은 항상 불안함과 모호함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그래서 생각을 조금 뒤틀어 보았다. 그래도 '치열함'이 더 중요하다면 어째서일까 하고. 투우로 되돌아가서, 투우사가 잘못될 것이 두려워서 황소를 안전한 놈으로 고르고, 거짓된 묘기를 부린다면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할인된' 영광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 가더라도, 그래서 막다른 벽 앞에 부딪히는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 대가만큼 삶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머뭇거리다가 아무 것도 잃지도 얻지도 못하는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교훈이라도 얻게 될테니까. (로버트 콘은 다시는 그런 맹목적이고 바보같은 사랑은 안 하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제자리에서 맴도느니,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방식을 택하라. 그러면 얻는 것이 있을지니! 라고 헤밍웨이의 목소리를 빌려 내가 나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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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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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렇게 빨리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투우사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22쪽

"귀관은 외국인, 영국인(외국인은 누구나 영국인이었다.)으로서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바쳤다."-55쪽

응보라든지 벌이라든지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가치의 교환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것을 포기하고 다른 어떤 것을 손에 넣는 것이다. 또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그 대가를 치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얻기 위해 나름대로 값을 치렀고, 그래서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들에 관해서 배운다든지, 경험을 한다든지, 위험을 무릅쓴다든지, 아니면 돈을 지불함으로써 값을 치렀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떄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227쪽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진실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를 알아낸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연히 알게 되리라. -227쪽

축제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이 되면 얼마를 지불하든, 어디에서 사든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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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하다. 잠이 안 와서 안 자다 보니 의도치 않게 밤을 새 버렸다. 점점 생활 패턴이 이상해 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나중에 교환학생 가서 시차 적응을 따로 할 필요가 없겠어! 올레! 주위 사람들과 다른 생활 패턴을 산다는 건 조금은 생소한 체험이다. 거기다가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가 흘러 나오니 더해지는 몽환스러운 분위기가 아주 좋다. 특히 Brain Damage라는 곡은 참..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I'll see you on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에서, 어떤 미래를 위해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일단 지구인은 아니야. 지구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살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 고통 때문에? 갈등 때문에?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 희미하게 들려 오는 웃음 소리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정신 나간 세상에서,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정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어쩌다가 심지어 지구에서도 볼 수 없다는 달의 어두운 저 편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인지 나로서는 참 이해가 힘들다. 지구인들의 시선마저도 닿지 않는 그 곳에서만 평화로울 수 있는 사람들. 핑크 플로이드는 그래서 지구인들의 가슴을, 머리를 초월하는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었나 보다. 카톡마저 잠잠한 이 새벽에, 마치 창문 밖에 바로 달이 커다랗게 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Brain Damage는 참 묘하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완전한 고요함. 문득, 저녁에 친구들과 갔던 카페의 카페라떼가 그립다. 나는 카페인을 매일 매일 수혈해 줘야 하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는 지구인임이 분명하다. 보기 좋은 글은 읽기에도 좋다고, 듣기도 좋고 먹기도 좋은 글을 위해! 핑크 플로이드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자켓 사진과 커피 사진을 살포시 첨부.



알라딘 서재에 손가락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을 붙이는 정도는 시간의 길이와 별로 상관이 없는 듯 하다. 페이스북, 카톡, 싸이월드보다 (트위터는 하지 않으니) 더욱 애착이 가는 곳이 바로 이 알라딘 서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아직은 생소한 부분이 더 많다. 긴 글을 쓰는 것이 손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자에서 카톡으로의 이동은 전송하는 낱말들의 조합을 점점 더 간단해지고 단순해지게 만들었고, 현재의 상태를 업데이트하라는 페이스북의 메세지창은 그야 말로 지금 현재의 순간적인 상태에 관한 글을 낳게 했다. 그래서, 정성들여 꼼꼼이 써야 하는 '책' 리뷰도 어느 순간부턴가 에이포 용지 한 장을 넘겨 쓰기가 힘들어 진 것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이음새가 거칠고, 시작과 끝이 일관적이지 못하다. 생각나는 대로, 고심을 거치지 않고 지껄이는 것에 익숙해진 바람에. 그래서 많은 부족함을 느낀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난 후에는 반드시 그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확인하는데 그 때마다, 깊은 애정과 고심을 거쳐 탄생한 리뷰들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나의 리뷰를 다시금 확인하고 씁쓸한 마음을 곱씹게 된다. 하아..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ㅠㅠ. 소림사에 멋도 모르고 들어 온 동자승이 고승의 하얀 수염만 봐도 기가 죽는 것 마냥 그렇게 나는 쪼들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나의 독서 여행은 앞 길이 창창하니까. 부족한 만큼, 앞으로 채워나갈 부분이 많다는 것이니까. 긍정적인 마인드로 계속해서 열심히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 겠다. 그렇게 리뷰를 100편 넘게 쓸 때 즈음 되면, 나에게도 단단한 손 끝과 섬세한 이해력이 장착돼있으리라 믿는다. 하핫. 의욕 없이 추욱 처져 있던 나에게 자극을 주는 친구를 만나서 기쁘당. 이상 새벽, 아니 이제는 아침의 어제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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