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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얼마 전 출판사에 다니는 한 후배 녀석에서 이 책의 출판을 권하고 있었다. 절판된 지 꽤 오래이고, 찾는 이도 많은데 왜 책이 없는 걸까. 니네가 판권 사들여 다시 찍어라, 그러면 꽤 잘 팔릴 것이다. 혹 잘 팔리거든 기획료 좀 챙겨주고. 결국 엉뚱했던 나의 제안은 이 책의 재출간으로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꽤 강도 센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니. 전쟁 이후 참혹한 상황을 다룬 많은 소설들을 읽었지만,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견디는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이 주는 충격은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나 성장통이라는 상투적인 독후감을 멀찍이 밀어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도, 나는 이 책의 장점이나 그 책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근친상간, 살인, 동성애, 아동학대, 전쟁, 기형아, 수간 등 온갖 자극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세계. 태연하게 사람을 죽이고, 어른들의 절절한 슬픔을 냉소하고, 개와 성교하는 여자아이를 태연하게 바라보는 루카스와 클라우스라는 이 괴물같은 아이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아이들은 불쌍했고, 안쓰러웠지만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동정했던 존재는 부모도 없이,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린 쌍둥이 형제가 아니라 그 녀석들에게 조롱 당하고, 그 녀석들에게 속을 보이게 되는 어른들이었다.
두 녀석은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생존을 모색했고, 할머니의 온갖 구박도 그럴 듯한 방식으로 대처해 나갔다. 동성애자인 장교나 신부를 상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녀석들의 모습은, 처절한 생존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이따금 어린 아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사람을 섬찟하게 하는 무자비한 폭력의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 아버지의 시체를 징검다리 삼아(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 녀석들의 상황을 동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성장하고, 도대체 이 녀석들이 쌍둥이였던 게 과연 맞는지, 한 정신 나간 녀석의 망상은 아니었는지 머리 속에 복잡한 상황에서 세 권의 소설을 다 읽고나면,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한 덩어리로 뭉쳐져, 그들 모두를 증오하고 그들 모두를 동정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혹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은밀하고 무자비한 폭력이 곳곳에 존재하는 이 인간세상은 아비의 자식을 낳게 하고, 개와 성교하게 하며, 아비의 시체를 밞게 한다.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게 하고, 잃은 사랑이 안타까워 잠 못 들게 한다. 어린 아이로 하여금 살인을 하게 하고, 그 녀석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루카스가 클라우스든 루카스든, 그 녀석들이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든 없었든, 이 비밀노트가 과연 실제한 상황이든 아니든, 이 소설 속의 고통은 그대로 실재하여 읽는 이의 숨을 가쁘게 한다. 딱딱한 껍질 속에 웅크려 어떤 고통에도 반응하지 않는 어린 녀석들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그 껍질 속에서 날것 그대로의 삶을 만나, 읽는 이의 마음에 상처가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아주 원색적이고, 폭력적이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 증오심을 느꼈다. 이런 마음을 만들어낸 건 순전히 작가의 문체 탓이다. 지극히 건조하고 지극히 냉정하게 사건을 진행해 나가는 작가의 문체는 이 절망적인 상황으로의 감정이입을 철저하게 막아낸다. 나는 전쟁이라는 상황 한 복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을 미워하고 만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이들의 불행한 삶에 대해 동정하지 않는 내 자신조차 증오하게 되었다.
솔직히, 재출간된 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표지는 소설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예전부터 거슬렸던 활자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열심히 이 책을 선전하고 다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