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권성우 외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 권력에 대한 권성우씨의 문제제기를 보면서, 이명원씨의 고된 싸움의 과정을 보면서, 꽤 오랫동안 이 책을 기다렸습니다. 비평이란 것이 베스트셀러의 표지를 장식하는 띠지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난무한지는 벌써 오래, 건강한 젊은 평론가들이 날카롭고 도발적인 비평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저뿐이 아니었겠지요.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책을 사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게으름 탓이겠지만 책을 펼친 후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게 된 것은 무엇 탓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책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나의 오래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 속에서 나는 진지한 문학적 반성과 건강한 비평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읽어내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그들의 시도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것들 자체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는 내가 기대했던 것들을 충족하기 어려웠습니다. 신경숙에 대한 비평의 비평의 핵심 내용은 대부분, 왜 그들은 신경숙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는가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평론가들의 한 작가에 대해 상찬의 말만을 퍼붓는 것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경숙 소설에 대한 비평을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없는 내용에 대해 아쉬워하기보다는, 그들이 과잉 해석하고 있는 부분들, 지나치게 가치가 부여된 부분들에 대해 더욱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경숙 소설의 해설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에서 비판의 대부분은 그녀의 한계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소설을 해석해낸 내용이 어디가 문제인지를 독자들은 읽을 수 없었지요.

전경린의 소설평에 대한 비판 역시 그러합니다. 비판의 대상이 된 평론가의 경우 정경린의 단편들의 경우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고, 장편의 경우는 그것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글 한 편을 구성했습니다. 물론 단편집이 문제의 장편보다 먼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평론가가 먼저 비판했던 장편에 대한 판단이 단편에 대한 긍정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 글들을 보았지만 그렇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전경린의 초기 단편에 저 역시도 흥분했었고, 이후 그녀가 발표한 장편들에 실망했기때문에, 그러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염소를 모는 여자>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요. 아마도 그 평론가는 전경린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면서, 단편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긍정적인 서술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소설과 마찬가지로 평론 역시 작가의 창작이라고 배웠습니다. 소설은 세상을 소재로 하고, 평론은 이미 나온 작품을 소재로 하지만, 평론은 단순히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설 그 이상의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평론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선택하여 자신의 논리에 재창작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작품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알려주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평론의 역할이겠지요.(물론 우리 평론계에 지나치게 비판과 반성이 부족한 것은 너무도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상으로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주례사 같은 작금의 비평 현실을 옹호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다만 이 젊고 건강한 비평가들의 인식이 작품(그것이 소설이든, 평론이든) 내부로 더욱 튼실히 들어가서, 보다 활기 있는 문체로 재구성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대보다 컸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건강한 비판과 깊이 있는 반성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무한 인생이지만 가는 동안은 즐겁다, 라고. 이 말은 성석제 소설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의 밑바닥을 떠도는 허무한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석제 소설의 중심 소재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읽는 동안 대부분의 독자들의 그의 유쾌한 입담과 활달한 서술 양식에 매료된다. 깔깔, 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얼마나 될까.

무겁고 지리한 일상에 대한 환멸을 잔잔한 묘사로 그려내고 있는 요즘 소설들 속에서 성석제 소설은 자기만의 자리와 자기만의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성석제라는 이름만으로 사람들은 벌써부터 웃을 준비를 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웃음만으로 성석제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웃음 끝에서 마주 치는 허무한 인생, 한참 웃고 난 후에 불현듯 만나게 되는 삶의 허전함 때문에 성석제 소설은 오래 각인된다.

<천애윤락>의 동환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다.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간통죄로(나중에 이 죄는 살인미수죄로 바뀌지만) 구속되는가 하면, 전화 한통 제대로 걸지 못해 항상 다른 사람에게 먼저 허락을 받는다. 화자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한 인간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는 그의 고달픈 인생살이 때문에 더욱 마음 아프다. 그래서 화자는 동환에게 끊임 없이 화를 내면서도 가슴 한쪽에 통증을 느껴야했을 것이다. 동환이라는 그 이상한 인간에 대해 피실피실 웃음을 흘리다가, 끝내 <천애윤락>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석제 소설의 특징이다.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역시 황만근이라는 한 반푼 인생의 실종과 죽음을 여전히 고달픈 농촌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어, 그냥 책장을 넘기는 것을 방해한다. 오래된 경운기를 끌고, 농가 부채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를 찾아갔을 황만근의 고단한 여정, 어느 누구도 원칙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법칙을 따르는 그의 고지식함은 반푼이었던 그의 삶에 긴 여운을 준다.

여전히 성석제의 소설은 재미있다. <스승들>의 소설적 구조를 따르고 있는 <욕탕의 여인들>이나, <천하제일 남가이>,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은 성석제 식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모든 소설들을 읽고 난 후 깨닫게 되는 인생의 허무함이 책장을 넘기며 흘렸던 웃음까지도 아프게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모두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성석제의 인식에 깊은 동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이 영화든, 소설이든, 드라마든 그 조그만 주먹을 꼭 쥐고 세상과 정면대결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 한쪽에 통증이 느껴진다. 정확한 때를 알 수 없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 나도 꼭 그렇게 세상과 대치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난독증을 앓는 동구의 이야기이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살아간 인왕산 자락의 어린 동구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꼭 그 당시 한국 정치가 겪어내야 했던 진통만큼의 상처를 동구의 삶 속에 조용히 부려놓는다. 유난히 고부갈등이 심각하고, 유난히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유난히 동생은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집안에서 4학년이 되도록 글자를 깨우치지 못한 동구의 삶은 그 집의 소란만큼 팍팍하다.

동구의 난독증을 유일하게 이해하여,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쳐준 선생님은 80년 광주 한 복판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동구에게 가족의 애정을 온 몸으로 알려준 사랑스런 아이 영주는 감나무 아래서 먼 세상으로 추락하고 만다.

어린 동구가 애처롭게 마루를 닦으면서, 그 슬픔을 견디고 있는 동안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은 치유불가능할 정도로 커지고, 그 속에서 아버지는 갈수록 힘을 잃어갈 뿐이다.
동구를 향한 작가의 애정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염된다. 허물어진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 고민하던 동구의 해결책은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현실성있으며, 구체적인 대안이었고, 그 순간 내내 안쓰러웠던 동구는 훌쩍 커 버린다. 너무 일찍 큰 아이를 볼 때면, 그 대견함 때문에 오래 마음 아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중간중간, 도무지 나이를 알 수 없는 영주의 조숙한 발언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것이 머뭇거려졌음을 고백한다. 그 아이의 영특함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독자로서 그것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쩌면 나는 조금의 시샘도 없이 온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는 동구를 대신하여 영주에게 질투를 느꼈던 것일까.

그리고 제목으로 주어진 아랫동네의 아름다운 정원은 소설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능소화나 곤줄박이 등 어린 아이에게 낯설기만 할 그 이름들이 동구의 의식 속에서 툭툭 튀어나올 때, 지나치게 어른스럽기만 한 정원의 풍경 묘사가 길게 반복될 때, 나는 책장을 건성으로 넘겨야 했다. 그런 이질적인 정원이 없이도, 동구는 충분히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아이임을 작가가 믿어주지 못할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고, 나는 동구 대신 그 아이의 성장통을 대신 앓는다. 70년대 후반을 동구보다 조금 어린 나이에 통과해온 내 기억 속에 어렴풋하게 존재하는 몇몇의 흑백사진들. 대통령이 죽었다고 통곡을 하던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이 그 통증 바깥에, 이질적인 통증으로 느껴졌다가, 사라졌다. 80년 광주 외곽에서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무한정 서성거렸다는 외할머니의 회고가 내 일상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아주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동구가 미리 겪은 성장통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세상을 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그늘 아래
이혜경 지음 / 창비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늘상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다른 이의 부탁을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 몸 담고 있는 곳은 많으나 어느 것 하나 똑부러지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흔히 착하다고 한다. 친한 친구 누군가는 너무 착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착하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착하다고 하면, 또 자기를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남에게 착하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에게 더 이상 착함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는 참으로 착하구나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읽어지는 작가의 선함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의 떨켜> 이후 단편집 <그집앞>과 이번 소설집에 이르기까지 이혜경의 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나는 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녀(혹은 그)들의 신산스런 삶의 내력때문에 오랜 몸살을 앓았다. 산동네 허름한 판자집에서는 환한 햇볕조차 서글픈 몸살의 원인이 됨을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했다. 여자들의 수다가 얼마나 깊은 슬픔을 담아낼 수 있는지 알아갈수록, 그 수다 뒤에 올 긴 침묵의 무거움 때문에 어깨가 저려오기도 했다.

<꽃 그늘 아래>에 실린 단편 중 대부분을 계간지를 통해 읽었으면서, 나는 오래오래 그 소설들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강릉에 다녀왔고,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의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잠깐 영모의 영혼과 마주친 것도 같다. 이따금 이상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렸다. 자신의 사랑을 시험한 죄를 온 몸으로 앓고 있는 서연의 선한 심성 때문에 나는 비행기보다 더 흔들렸다. 한 문장 한 문장 밑줄을 그으면서 읽고 싶었지만, 나는 펜을 들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신산한 삶의 내력 따위와 거리를 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갯마루를 넘고, 두 친구가 전화로 주고 받는 수다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이혜경이 그려내는 그 서늘한 그늘 속 풍경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곳에 오래 서 있다가는 마음 한쪽이 허전해지는 특이한 병을 앓게 되리라, 길을 걷다가 드문드문 보이는 세상의 허점들에 시선을 두게 되리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가방에 넣고 또 몇 날을 더 보낼 것만 같다.

몇 잔의 커피 값을 아껴 책을 샀을 독자들의 반응을 염려하는 작가의 말이 형식적인 겸손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 편의 소설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오래 시간 머뭇거리며 골랐을 부사어 하나에는 자신의 눈이 포착한 현상 이면을 깊이 응시하는 작가의 성찰이 느껴진다. 그 시선은 아주 선하다. 세상 무엇에도 자신의 편견을 강요하지 않고, 그늘진 자리를 다독일 수 아는 선함. 이것은 그 동안 특정한 성에게 강요되어온 착함, 그 이상의 것이다. 그 선한 눈으로 그려지는 소설 속의 세상에는 그늘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뚜렷하게 지키고, 나직나직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다. 그 인물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사하고 싶은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몬스터 1~18(완결) 세트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몬스터>라는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만화가를 알지 못했다. 그의 만화 <마스터 키튼>이 이미 우리 나라에 제법 알려진 상황이었지만, 나에게는 <몬스터>가 처음이었다. 1권, 2권을 읽으면서는 그저 흥미로운 모험담쯤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저 다른 의사처럼 나름대로의 포부와 야망을 가진 닥터 덴마는 다른 만화의 주인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가 가진 적당한 속물 근성과, 그 이후에 오는 깨달음은 주인공을 만들기 위한 수순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 그 때까지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만화가에 대한 어떤 인식도 없었다.

내가 <몬스터>의 완결편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 것은 아마도, 요한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역할을 맡은 악당이지만, 주인공인 덴마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나는 항상 덴마의 미래보다 요한의 과거가 궁금했고, 요한의 종말이 기다려졌다. 금발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요한이 보여주는 아주 지독한 한기 때문에, 나는 가끔 슬펐다. 도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경험한 것일까. 511 킨더하임에서, 혹은 세마리의 개구리가 그려진 이 이층집에서, 아니면 붉은 장미의 저택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화의 결말에서, 요한과 니나의 경험이 전부 밝혀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어린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엄마의 손이 자신에게서 멈칫 하다, 니나의 손을 놓는 순간 도대체 그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어렴풋하게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렇게도 이름을 갖고 싶었으나 끝내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모두 없어져버린 슬픈 괴물의 기억이 마음 아팠을 뿐이다. 그래서 그 도서관에서 이름 없는 괴물이라는 동화를 보았을 때 나 역시도 요한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닥터 덴마의 누명을 모두 벗겨진다. 너무나 인간적인 덴마가 살아가는 모습은 분명 엉성한 내 일상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최선을 다해 생명을 지켜가려는 의사의 본분을 덴마는 온 몸으로 실천한다. 그만큼 아름다우면서도, 현실적인 캐릭터를 나는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요한의 미래가 궁금하다. 또다시 새 생명을 살게 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름답지만, 냉혹한 그의 얼굴에서 슬픔의 기운이 언제야 가시게 될 것일가. 어쩌면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결말을 나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