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는데, 긴 비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나 문득문득 쏟아지는 강한 빗줄기에 먼저 귀가 놀라고, 번쩍이는 번개에 눈이 깨고, 머리 위에서 울리는 천둥에 몸이 일어난다. 다시금 시작된 불면, 무엇이 걱정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 다 컸다고, 그러니까 좀처럼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조바심을 내지는 않아도 된다도 다독거려도 마음 한 구석에 박힌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그렇게 여름을 지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자의 불안은 그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의 불안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비록 그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이 해소되고, 순간의 열락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생에 다시 없는 경험을 하게 될지라도, 그래서 자신에게 엄습해올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불안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선천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를 지독하게 두려워하는 나는, 그래서 나의 욕망이 해소되는 순간의 열락을 경험할 확률이 아주 적다고, 이따금 스스로 자조한다. 

 

이 소설은 1909년에 태어난 작가가, 1931년에 쓴 작품이다. 그의 나이 22살. 그러니까 이 작가는 불과 22살의 나이에 욕망이 가득한 사랑을, 그 사랑의 하릴없음을, 전쟁의 비애를,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 바닥에 깔린 은밀한 비밀을, 인간이 하는 말의 가벼움을, 그 가벼운 말의 날카로움을 모두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예민하고 단단하게 엮어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22살에 말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본심을 알 수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 들어가는 길도 나오는 길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깊은 숲의 공간.

편혜영의 소설에 숲은 여러 형태로 펼쳐진다. 그 곳은 부엉이가 울고 비밀 벌목이 이루어지는 비밀의 공간이고, 그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이 삶을 지속하는 서쪽의 작은 도시이고, 환상과 실제를 구별할 수 없는 술 관리자의 내면이다. 그러니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헤맬 수밖에 없다. 모두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살고 있거나, 그 공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천둥과 번개 속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 때문에 나 역시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혹은 이 숲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마지막 장을 넘기고도 나는 그들이 왜 숲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의 부엉이도. 나의 불안이 나의 이해를 방해하니, 나도 어쩌면 숲에서 길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가족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이 소설은 지극히 극단적인 한 가정을 묘사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들은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던져주는 충격을 능가한다. 패륜이라 일컬어지는 문제적 상황들은 이제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사회면 기사를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문제적 가족들을 말하는 것이 상투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되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되어버린, 누군가에게는 곪은 상처를 헤집는 덫이 되어버린 이 가족들을 상투적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만인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과오를 온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만으로 그만인가. 다시,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마라면서 긴 비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

또 불쑥 폭우가 내릴 것이다.

천둥과 번개가 내리칠 것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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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그림자 2012-07-2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선인장 2012-07-25 10:02   좋아요 0 | URL
아... 너무 오랫만이에요.
저는 그저, 오래 전과 같은 일상을 그 때와 비슷하게 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여전히, 이 곳에 계셨던 거군요...

빛 그림자 2012-07-25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네요. 알라딘에 간만에 왔어요. 언니 글 보니 무척 반가워요! 반갑고 기쁜데 무슨 말을 남길까 하는 망설임과 주저함은 생기더라고요.
제게 몇 해 동안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래도 일상은 여전해요.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져도 저라는 사람 자체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아서 그런가 봐요. 예전에 제가 교직 수업 들었던 거 기억하세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네요. 저는 학교 생활이 즐거운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하고 쓸쓸해질 때가 있어요. ^^
전처럼 가끔 안부도 전하고 할게요. 아, 더울 때일수록 잘 드셔야 해요!

선인장 2012-07-26 11: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약간의 변화와 그리고 여전함... 선생님이 되었군요...
저도 이따금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은 누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겠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쓸쓸한 마음을 갖는다면, 조금은 덜 팍팍한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도 자주 들여다 보지 않은 곳이지만, 가끔 들러서 안부 전해주세요. 언제든 반가울 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