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고 말했다.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우리들은 청승맞지만 낭창한 목소리로 이 시를 외우고 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서른이란, 서른이 되기 전에만 그 무게를 잔뜩 느끼는 그런 나이. 소금자루를 등에 진 당나귀처럼 나는 스물 여덟에, 혹은 스물 아홉에 개울물에 빠져, 그 나이의 무게에서 벗어나 삼십대를 가뿐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듯 싶다. 살 수도 없노라, 죽을 수도 없노라, 이십 대의 마지막에 온갖 청승을 다 떤 덕분에.

 

 

 

그러나 마흔은, 지레 겁 먹는 것도 부족해 보일까 두려워서, 애써 덤덤하게 맞이해야 하는 또 다른 한 시절. 앞으로 나아가지도, 다가오는 옛것들을 뿌리치지도 못해, 그저 붙들린 시절. 내 어깨에 짊어진 것들이 솜덩이인 줄 모르고 개울물에서 다시 넘어졌다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절. 내 속에서 나온 말들에 혼자서 상처 받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누구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도 부끄러운 나이. 하루 종일 눈가가 마르지 않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상 고온의 봄날.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icare 2013-06-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은 가버린 게 아니고 지층처럼 속에 깔려있다가
지진이나 화산분출 때처럼 한번씩 울컥 치솟든지
속에 고여 있다가 잊으려하면 슬며시 올라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흐린 날에 옛날 품고다녔던 시인의 이름과 또 올리신 시를 읽노라니 마음이 하염없이 쓸쓸합니다.
이성복의 오래된 시들도 문득 맴돌구요.

별고 없으신지요.

선인장 2013-06-13 12:26   좋아요 0 | URL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오히려 무슨 일이든 생겨야 할 것 같은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곳은... 올 때마다 달라지는 옛동네를 보는 기분인데, 님의 댓글을 보니,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익숙한 풍경 하나 남아 있구나, 와락 반가웠습니다.

저는 늘 그렇게,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님은 어떤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

[그장소] 2015-01-0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5년 1월 1 일 입니다.
어쩌다 들러 두분의 지지난 여름을 살포시
엿보고 갑니다. 모든 시간이 혼재하는 곳.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얼마나 먼 과거의 이야기 부터...당신들의 지난한 이야기까지, 이 곳을 떠 돌 고 있을것 인가요....또 한 해. 맞이 이렇다 할것없이
무난 하네..그리 여미시고요..시간들 나시면 소소한 얘기나 들려주러 와 주십시오. 그저 웃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