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6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희동 옮김 / 푸른나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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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찰서여 안녕>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거기서 안녕이 만날 때 하는 안녕이야, 헤어질 때 하는 안녕이야? 아무 생각 없이 소설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그런 것도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구나 의아해했다. <경찰서여 안녕>에서 안녕은 good-bye였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불과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이 책을 주문해놓고도, 다른 몇 권의 책들과 함께 이것이 배달되어 왔을 때, 나는 의아했다. 제목조차 생소했다. 물론 사강이라는 작가 이름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을 뒹굴던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것은 단지, 이 책이 작고 가볍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이 많았고, 두꺼운 책을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또 하나, 갑자기 나는 이 제목에 나오는 안녕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그 의미는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환영 인사를 하는 세실의 모습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몇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일 뿐만 아니라,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시간도 여름 한 계절로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만, 세실이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꽤 복잡하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아버지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 딸이기도 하고, 이제 막 사랑과 욕망에 눈을 떠가는 소녀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이끌어내는 연출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자기 내면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 없이 세상을 냉소하는 성장기의 한 아이가 있다.

사강은 정신적인 방황과 공허함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까지 상실한 세실의 내면을 아주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책을 읽는 나로서는 세실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혼란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고, 나 역시도 세실의 감정 변화에 따라 사건을 보는 시선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계획한 대로 연극이 계획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면 그녀 깊은 곳에 있는 진심으로 그것이 허황된 결과로 끝나고 안느와 평온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마음이 내 속에서도 충돌을 일으켰다. 이런 점에서 <슬픔이여 안녕>은 심리적 묘사가 힘을 갖는, 아주 재미있게 씌어진 한 편의 성장 소설이다.

이제 다시 아버지와 단둘만 남겨진 세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아버지와 함께 파리의 밤세계를 즐기면서, 본격적으로 알기 시작한 관능적인 사랑에 온몸을 내맡기면서, 그리고 그 섬세한 내면의 결들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또 몇 번의 성장을 하게 되리라. 이제 막 슬픔을 알게 되었고, 슬픔을 받아들이게 된 세실에게 더 많은 슬픔들이 찾아올 것이다. 누구나의 인생이 그렇듯이 말이다. 성장 소설 한 편이 끝나면 비로서 시작하는 성장을 향한 우리들의 걸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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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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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퍼비는 자신의 키가 열 자나 자란 것 같다고 고백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느낌은 퍼비의 고백과 꼭 같다. 키가 열 자 정도 자란 느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 기대했던 것은 극심한 인종차별의 한 복판에 선 흑인, 그것도 여성의 삶이었다. 인간에 대한 차별의 극한에 서 있는 여성이 흑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그 차별의 삶을 어떻게 넘어서는가를 읽어내려 한 것은 그러나 실수였다. 이 책은 흑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대한 항거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한 여성의 성장기이다. 티 케이크를 처음 만났을 때 재니가 두 번의 결혼에 실패를 했고, 이미 삼십대 후반에 들었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법을 깨우쳤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주 울림이 큰 여성 성장 소설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십 대에 진정한 사랑을 꿈꾸었던 재니라는 여성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지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는 그녀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물론 어떻게 보면 그녀가 남자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수동적인 삶이 아니냐고. 그러나 그 많은 오해와 편견과, 사람들의 질시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믿고 그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재니의 인생은 다른 소설 속의 어떤 여성보다도 당당하다. 그래서 티 케이크를 향한 그녀의 총구는 그에 대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는 그녀 자신에 대한 믿음의 절정을 보여준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읽었던 허스턴에 대한 많은 정보들,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그녀의 인생은 소설을 읽는 데 특별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흑인 여성 문학에 대한 의미 없는 기대는 버릴 것. 아주 울림이 큰 연애 소설을 기대한다면 책을 덮으면서 얼마쯤 커 버린 자신과, 어떻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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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유택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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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에코의 라이브러리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철저하게 수용미학적 입장에서 씌어진 책이다. '독자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독자는 이야기 진행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기본적 요소이기도 하다'는 전제 아래 에코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소설에 접근할 것인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독자들을 고려한 글쓰기, 그리고 한 작가로써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소설을 읽기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쓰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에코는 텍스트는 하나의 숲, 그것도 많은 갈래길이 있는 하나의 숲이라는 보르헤스의 말과 같은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무수한 갈림길 속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한다. 그는 독자를 전형적 독자와 경험적 독자로 구분하는데, 경험적 독자는 흔히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텍스트에 이입하여 그저, 자기 식대로 이해하는 독자를 말한다. 이와 대비되는 전형적 독자는 작가가 텍스트의 협력자로서 기대할 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창조해 내려고 하는 이상적인 독자이다. 그리고 이런 전형적 독자들은 소설 속에 존재하는 전형적인 작가를 찾아낸다.

전형적인 작가란 창조주처럼 자기 작품 내부나 뒤나 위에 존재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 밖에 있는 자이다. 전형적 작가를 찾아내고 그가 독자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했을 때에 한해서 경험적 독자는 본격적으로 전형적 독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에코는 소설이 상상의 세계, 즉 허구의 세계를 다루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불신의 중지(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개념을 통해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소설의 허구적 합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허구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 기생하는 세계로서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을 제외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정되고 폐쇄된 세계에 집중하게 만드는 작은 세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허구의 세계는 단순히 작은 세계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유사 이래로 실제 세계에는 비밀의 메시지가 존재하는데, 허구의 세계에는 이것이 존재한다. 작가는 창조자로서 그 세계의 내부에서 일련의 읽는 방식들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배후에 상존한다. 따라서 전형적 작가에 대한 탐구는 또 다른 탐구에 대한 대용물이다. 그 탐구의 과정에서 조물주의 이미지가 무한성의 안개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우리는 왜 무가 아니라 어떤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에코의 진술은 허구의 세계가 갖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소설이라는 문학 작품이 갖는 의미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다.

날이 갈수록 문학이 힘이 줄어든다는 탄식이 많은 시대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속에서 허구의 세계가 갖는 의미는 매일매일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왜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는가? 그것은 세상 어딘가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세상을 전부 뒤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은 세계, 허구의 세계를 뒤지는 것도 이렇게 벅찬데. 그리고 나는 내가 찾은 메시지를 새로운 곳에 숨겨두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한 세계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문화 속에서, 그것도 세계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변방의 한 나라에서 성장해 온 내가 찾은 메시지가 정말로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나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남들은 모두 옛날에 찾아 이미 폐기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확인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아직은 에코의 가르침을 믿어보기로 하자. 일단은 전형적 독자가 되어 보는 거다. 그리고 나 역시 전형적 작가가 되어 얽히고 섥힌 이 세상의 비밀을 풀어보는 거다. 정말 인생 같은 그런 세상을 한 번쯤 만들어보겠다고 욕심은 그리 해 될 것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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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인간이라고 부르지 말라 - 남아프리카 대표단편선 아프리카 문화연구소 기획총서 4
나딘 고디머 외 지음, 이석호 옮김 / 동인(이성모)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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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감당하기에는 차마 힘든, 벅찬 무게의 그 무엇을 짊어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혹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 너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 어깨에 짐 지워진 그 무게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규정해 버리곤 한다.

많은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혹은 풍문처럼 떠도는(그러나 은밀한) 이야기를 통해 그 무게의 얼마큼은 살짝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때도 우리는, 아니 나는 역사를 들먹이며 짐짓 엄숙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 때 그 고통스러운 표정과 어깨의 무게는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내 머리 속에 떠돌고 있는 생각들은, 아주 조금 둔중하게 느껴지는 어깨의 통증은 실체가 아니다.

<나를 인간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남아프리카 대표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백인 작가들과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교대로 편집해 놓은 이 책 속에서 극단적인 인종차별의 현장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삶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검둥이의 육체를 얻었을 바에야 검둥이의 뇌를 주지, 라며 한탄하는 흑인 지식인의 외로움은 작가가 다른 소설 구석구석에서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테마이다. 백인 지식인들이 남아프리카의 평등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주장할 때, 실제 그 불평등의 한복판에 있는 흑인 지식인은 모욕적인 불평등보다 극단적인 외로움을 토로한다. 미국 사회로 망명을 선택한 작곡가도 남아프리카의 자연 그대로의 음을 간절히 소원하면서 미국의 소음 속으로 몸을 날린다.

물론 이런 식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저항만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이 소설집의 구석구석에는 가난하고 불행한 삶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으면서 따뜻하게 살아가는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들은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자연 속에서 감동을 느낀다. 사회에 대한 저항과 분노 이전에 우리들 모두가 느끼는 다양한 삶의 결들을 그들도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집 전체가 하나의 줄기로 묶여져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삶의 결들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 유럽이나 우리 문단에 흔히 나타나는 아름다운 문장과 섬세한 감정의 무늬들을 기대하는 것을 어리석다. 여기 실린 소설들은 때로 거칠고, 투박하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문장들이 마음 한 켠을 휘젓고 다니는 이 명징한 감각은 무엇일까. 그들 삶의 고단함이 투박하고 거친 문장들 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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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근원
크리스틴 오르방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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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쿠르베씨>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김원일이 쓴 <그림 속 나의 인생>이라는 책에서였는데, 그 책에서 그 그림은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다만 쿠르베라는 화가가 파리 코뮨을 지지했다는 사실과 그가 당시의 화풍에 반기를 들고 사실주의를 강조했지만, 당시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가 그린 <세상의 근원>이라는 작품이 외설적이라고 평가받았다는 사실만 기억이 날 뿐이다. 그 그림은 화가 쿠르베 자신이 등장했었는데, 그 사진 속에서 나오는 깡마른 화가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 <세상의 근원>을 읽으면서 나는 김원일의 책을 다시 꺼내 그 그림 속에 나오는 화가의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설 책 앞에 함께 실린 <세상의 근원>이라는 그림을 몇 번이나 다시 보아야만 했다.

소설 <세상의 근원>은 동명의 그림 모델이었던 히퍼넌이 쓴 수기와 같은 형식이다. 휘슬러의 애인이었다가 후일 쿠르베의 연인이 된 히퍼넌의 회상을 통해 <세상의 근원>이라는 그림이 왜 그려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 쿠르베는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소설의 중심 내용이다. 히퍼넌의 회상에 따르면 화가 쿠르베는 비어 있음과 존재함이 함께 있는 여성의 성기에서 세상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재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온 열정을 쏟아낸다. 그는 휘퍼넌의 성기가 가진 가장 따뜻한 색을 그리고자 하고, 남자들이 세상에 나온 최초의 길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읽고자 한다.

소리과 색과 냄새에 민감한 쿠르베의 모습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예술가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소설이 허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실재로 존재하는 그림과 소설의 내용에 연결되는 것은 소설 역시 가려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인간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를 통해 세상의 근원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은 작가 크리스틴 오르방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그림을 통해 세상에 근원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과 일치한다. 예술가에게 관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진실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의 근원>이라는 쿠르베의 작품은 오랜 시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그림이 박물관에 나오기 전 그 그림을 소유했던 사람은 자크 라캉이라고 한다. 라캉조차도 그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가려놓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나를 알게 한다. 비단 히퍼넌이 그 그림을 처음 보고 수치심과 절망을 느꼈다는 소설 속의 고백을 읽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직도 인간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들이 많고, 넘어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에 그림이, 또한 문학이 존재한다. 적나라하게, 아주 직설적으로 세상을 인식할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을 찾아낼 것. 이것은 아주 고대로부터 인간에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 속에서 내가 찾아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 몫으로 남겨진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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