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용식탁 [dts] - [할인행사]
이수연 감독, 전지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나는 <토요 미스테리 극장>이나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무자비한 살인마가 나와서, 사람을 토막내버리는 헐리우드의 공포영화보다 마음을 지속적으로 긴장시키는 서글픈 귀신들이 나오는 우리나라의 공포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는 무섭고도 슬픈 쾌감에 사로잡힌다.

시작은 동생과 같이 했다. 초반에 지하철에서 죽은 아이들이 나왔고, 정원의 식탁에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공포 자체를 질색하는 동생은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거실의 조명을 죽이고, 영화에만 집중하던 나는 내 뒤의 스피커에서 "오빠"라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남동생을 불렀다. 휴학생 주제에 무슨 바쁜 일이 그리 많은지, 새벽 두 시에도 동생은 할 일이 있었고, 무서우면 불이나 켜고 보라는 충고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감독의 말처럼 <4인용 식탁>은 공포에 방점이 찍힌 영화가 아니었고, 인간이 과연 자신의 기억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조금 무서운 영화였다. 이불을 끌어당기고 공포의 기분을 만끽하고자 했던 나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지만, 영화는 오히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전지현이 분한 연은 기면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으며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가 보는 과거는 그 과거를 가진 개인이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 중에 잊어버리고자 했던 악몽이며, 이 악몽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삶을 불행해진다. 산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인자한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있던 정원은 연으로 인해, 잃어버린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을 찾게 된다. 악몽 같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가족의 죽음을 초래한 자살기도. 그는 평화로운 잠과 같은 죽음을 원했지만, 그의 선택은 끔찍한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정원과 연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아파트에서 내던진 정숙의 이야기였다.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살아난 어린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젖을 무는 것을 못견뎌 한다. 자신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를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리하여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푸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주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녀가 느끼는 공포와 슬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정작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 정원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궁금해지기보다는 정숙이 과연 살아났을까, 그녀가 과연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견딜까가 염려되는 것이다.

이 영화를 소개한 몇몇 리뷰들은 이 영화 속 공포의 근원은 가족이며, 이 영화는 가족이 무너진 현대 사회의 실상을 공포라는 장르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가족을 만들어가는 시점에서 정신적 혼란을 겪는 정원이나 다른 등장인물 모두가 앓고 있는 공포의 내용은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특별히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기보다는, 상처와 고통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성장영화라고 말했는데,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정원이 흐느끼며 두려워하는 모습은, 어느 십대 후반의 아이들보다 훨씬 서글프고 힘겨워보였다.

나이를 먹고, 사람이 자란다는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과거의 시간들을 그만큼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들만, 자신에게 이로운 일들만 기억하고 그 왜곡된 기억에 매달려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문득, 내가 내 기억의 밖으로 몰아냈던 어느 한 시절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쩔 것인가. 정원은 4인용 식탁에 홀로 앉아 밥을 먹는다. 그의 곁에 있는 건 산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다. 정원의 불신으로 인해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연이 그 앞에서 웃고 있다. 이제 정원은 뜨거운 국물을 넘겨야 한다. 가슴이 뻐근하고, 속이 아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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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psy 2004-05-2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영화는 잘 안보는데 저도 사인용시탁은 끌리더군요.. 공포에대한 또다른 시각이라고 할까.. 귀신이 무서운게 아니라 그 귀신을 보는 인간이 더 무서웠던 영화였던거 같아요.. 좋은 리뷰였습니다~^^

선인장 2004-05-2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귀신은 존재한다고, 완전히 믿어버리고 있는데도, 이따금씩 두려운 건 무슨 까닭일까요? 저 역시 귀신을 보는 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야자와 아이, 저도 참 좋아하는 만화가입니다.

프레이야 2004-05-2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저도 참 인상깊었어요. 제 페이퍼에도 있어요. 믿음이란 것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았죠. 님의 리뷰, 많은 부분 공감하며 잘 읽고 갑니다. ^^

선인장 2004-05-2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의 정체라.... 저 역시 그게 궁금하군요. 마음을 주지 않으니 오해할 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어서 좋긴 한데, 더불어 믿을 것도 없어지더군요. 과연 연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한 것일까요? 영화가 끝나고 저는 조금 궁금했습니다. 죽음이 증명의 방식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july 2004-06-2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때문에 <4인용식탁> 봐야겠네요
왜곡된 기억, 미화된 신념.. 그래서, 인정하지 않는 끔찍한 진실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