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읽지 못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한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독일 병사와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독서의 경험을, 어떤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내내 난감하다. 북방의 추운 지방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누리고 살았던 남자가 무감각한 살인병기가 되어 독일군 최정예 병사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고, 마티아스와 르네를 묶어주는 "동물적인 떨림"이나 "야성적 에너지"를 독자인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없어서, 이 고독한 독일군 병사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에너지로 삶을 "선택해내는" 르네의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은 그 참혹한 비극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으면서도, 유대인 아이 하나를 살려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독하고 추운 삶을 이유로, 간단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마티아스 때문인가. 반성하지 않는 개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무게에 갇혀, 역사적 비극에 짓눌린 개인의 아픔을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한 태도 때문인가. 생존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병사"를 붙잡고 있는 일곱 살 아이에게, 나는 왜 하필 독일병사에게 삶을 의지하려고 하느냐고 비난하고 싶은 것인가. 

 

마티아스는 파이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함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위장 침투했을 때 그는 세 명의 청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다. 마을 광장에서 열일곱 살짜리 소년 두 명과 열여덟 살짜리 소녀 한 명을 죽였다. 그 뒤로 그는 전쟁에 모든 흥미를 잃었다. 그는 소년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망가는 그들 등에 총을 쏘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 재워주고 몇 주 동안 먹을 것을 대준 대단한 용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날 그는 죽든 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처럼 과도한 전쟁 기계로 길러졌을 때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그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르네가 나타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또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녀와 함께. 그는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전쟁 기계로서 마티아스의 삶은 삶이 아니었고, 르네를 만나기 전 마티아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은 전개되는 내내 고독하고 차가운 그의 삶이 죽음과 마찬가지였다고, 르네를 만나고 나서야 마티아스는 삶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절절한 고독의 순간이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마티아스의 도주극을 응원하지 못했고,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그의 "살아 있음"을 기꺼워하지 못했다. 그가 르네를 통해 넘었다는 죽어 있는 삶과 살아 있는 삶의 경계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이다.

 

르네를 만나 비로소 살고 싶었던 그는, 르네와의 삶을 위해, 그녀를 만나기 전과 다름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질투에 눈 먼 미국 병사이기도 하고, 전쟁에 지친 독일군 병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장교이기도 한 그들.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전쟁의 복판으로 끌려왔고,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과정에서 삶을 잃어버렸을 그들. 그들은 마티아스와 무엇이 다른가. 마티아스는 자신을 "자신의 병사"라 명명해줄 르네를 만났을 뿐. 

 

그렇다. 내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아무런 감흥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죽음을 시간을 벗어나, 간절히 살고 싶어했던 마티아스가, 끝까지 삶에 대한 다른 이의 의지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마티아스의 모습 때문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르네와 마티아스의 오늘을 응원하지 못하는 대신,  나는 파케 농장의 모든 이들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마티아스의 삶을 보장해준 쥘의 단단하고 상식적인 선택이 좋았고, 독일군 병사에게 품은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알고 나서 그와 단절하는 잔의 모습이 오래 남았다. 어떤 생명이든 품어내는 지네트의 너른 품에서라면, 전쟁의 고통이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오늘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유대인 소녀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냈던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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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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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2015년.

크게 변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매일 보는 거울을 통해서는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없듯이, 모르는 사이에 점차로 나이를 먹었다. 친밀했던 누군가와 특별한 다툼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밤잠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것들도 점차 사라져, 평온한 날들이 계속 되었다. 몸은 조금씩 마모되거나, 굳어갔다. 바깥 세상에서는 이따끔씩 태풍이 불었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대신, 세상에 화가 났다. 그러나, 뉴스 화면에서 눈을 돌리면 다시 무덤덤한 일상이 계속 되었다. 슬픔 역시 다르지 않아서, 어떤 슬픈 일도 내 일상에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며칠 간의 태풍이 지나가면 세상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한 번 지나간 태풍은 어디엔가 흔적을 남겼다. 도심의 한 복판에서 바람이 실어온 폐비닐 한꾸러니를 만나는 것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다 문득 멈추곤 했다. 찰나의 시간, 아주 잠깐 동안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 대단한 통증은 아니었고, 금방 잊을 수도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새삼스럽게 서글프지도 않았다. 특별히 동굴을 파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버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어쩌면 많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작가 황정은의 단편집 <파씨의 입문>과 <아무도 아닌>에 수록된 작품들이 쓰인 그 시간을 천천히 살아내는 동안은 알지 못했던, 그저 시간의 한 귀퉁이가 풍화되고 마모되는 것뿐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아픈 변화임을, 두 권의 책을 앞에 두고 천천히 생각한다.


처음 두세 편의 소설을 읽고는 왜 과거의 이야기일까,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가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양의 미래>와 <상류엔 맹금류>는 과거 어느 때, 잠시를 그리고 있다. 그 시간들은 대체로 남루하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남루한 나와 남루한 다른 이가 만나서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남루를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듯 지나온 한 시절, 이 소설 속 과거는 대체로 그런 시간이다. 그 시간을 겪고 난 인물들의 생이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는다. 어떤 공간을, 어떤 사람들 속을, 어떤 시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그곳을 벗어나도 다른 생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극적인 변화와 성장, 사람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 혹은 새로운 만남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아니면 십여년 발버둥치며 바꾸려고 했으나, 더욱 나빠지는 세상을 살면서 기대하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인가. 그래서 소설 속 세상은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지금과 다르지 않아 유의미하고, 지금과 다르지 않지만 과거의 한 순간이기에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의지나 신념이 아니다. 부끄러움, 혹은 슬픔, 지난 10년을 살아내면서 달리 무엇도 하지 못하면서, 내내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부끄러움, 혹은 슬픔.

마지막 소설을 읽고는 생각했다. 왜 이들은 혼자가 되었을까. 훌륭하지는 않지만 따뜻했던, 다정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가족들은 왜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을까. 장어 한 번 제대로 사 먹을 수 없을 만큼 넉넉하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아르바이트에 지친 나의 잠꼬대를 시라고 물어주던 그(파씨의 입문 중 <양산 펴기>)는 어디로 가고, 죽어서도 붙어 있던 유라씨와 긴 세월 문득문득 혼령으로라도 붙어 있던 유라씨의 이름을 불러주던 유도씨(파씨의 입문 중 <대니 드 비토>는 어디로 가고, 따뜻한 우동 한 그릇으로도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을 전할 줄 알던 무재씨(백의 그림자)도 어디로 가고, 이들은 모두 혼자였다. 이따금 사랑을 하기도 했다. 오제이거나 호재이거나, 제희인 그들과 만나 연인이 되었지만,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제희를 바라보지 않으니, 독자인 나는 제희 대신 그의 가족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소박한 바램 때문에, 자식들에게 가난을 짐지운 그의 부모에 대해서만. 호재가 꿈꾸는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아무 바램도 없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건조한 세대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 혼자인 것이 트렌디한 문화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지독한 소외에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마다 대니 드 비토 속 유도씨의 언제든 붙어, 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어쩌면 십 년, 우리 모두는 이런 세월을 살아온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부끄럽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슬펐던 시간. 혼자 있는 것이 지독하게 외롭지만, 다른 누군가를 통해 확인하는 나의 비루함이 싫어서, 애써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시간. 그저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었을 뿐인데, 그 피해를 나와 가족들이 짊어져야만 했던 시간. 그래서 웃음은 웃늠이 되고, 나의 웃늠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벽 하나를 두고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을 향한 모멸을 견디어야 하는 시간.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그것을 생각해야겠다.
- 황정은의 소설 <명실>과 <웃는 남자>의 마지막 구절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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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 외할머니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에 다녀왔다. 1921년 생. 지난 봄 손주들이 마련한 생일상을 받으시고, 우리 식구가 이렇게나 많구나, 다 모이니 참 좋다, 말씀하시던 할머니께서는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으셨다. 폐에는 암으로 의심되는 어떤 것이 발견되었다 했고, 뇌출혈로 인해 오른쪽 몸은 마비되었다. 할머니를 자극하는, 그래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왼쪽 몸으로만 감지하는 통증인 듯 했다. 나는 사람의 눈꺼풀이 그토록이나 무겁다는 것을, 생을 오래 지속할수록 눈꺼풀의 길이가 그렇게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간호사가 가족들 얼굴이나 보라며 눈꺼풀을 들어올려도, 당신의 생을 담은 눈꺼풀은 끝내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 엄마, 저렇게 두면 안 되는데... 코에 저런 거 꽂아두는 것 무섭다고 싫다 했는데... 나락 익으면 한 평생을 보냈던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머니와 약속했던 엄마는 할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지 걱정했다. 편안하게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다는 엄마가 나는 순간 야속했다. 그러니까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죽음의 순간까지도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그 동안의 내 믿음과는 전혀 상반된 감정 때문에 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아무 의식이 없더라도, 먼 곳에 계셔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볼 수밖에 없어도, 당신이 살아계시면 좋겠다. 내가 생각해 왔던 삶과 죽음의 방식과는 너무나 모순된 바램이, 그러나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워야 할 것들 중 가장 많은 것을 알려주신 분이었고, 할머니의 집은 그 존재만으로도 도시에서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공간이었다. 5년 남짓 기억도 하지 못할 유년기를 당신과 당신의 집에서 보냈던 것이 다이면서도, 나는 태생이 남도 땅 촌년임을 잊지 않고 살았다. 도시에서의 삶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당신의 집 툇마루에 누워 햇빛과 바람에 몸과 마음을 말렸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조물거리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예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모난 내 마음을 만지작거렸는데.

 

이 따뜻한 기억 때문에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니까 책장에 꽃혀 있던 이 책을 찾아읽게 된 이유였다. 할머니의 100세 생신을 간절하게 바래왔던 나는 어느 날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을 준비해야 했고, 조금 더 나은 죽음을 통해 내 삶의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그 동안의 내 믿음이 무너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큰 위로였고 가장 무거운 각성이었다.

 

나는 자연사가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사는 사고사나 자살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간이 제게 주어진 수명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죽는 것, 의학의 도움으로 생을 연정하려는 노력 없이 제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때로 그 시간이 너무 이르게 찾아온다고 해도, 잠깐 동안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것. 누군가는 오만한 생각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서 저런다고 했지만, 너무 많은 욕심으로 인해 내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면 죽음의 순간에는 그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랬다. 고통을 연장시키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막아내는 현대 의학이 인간과 자본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결합된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의 오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것,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삶에 대한 의지를 욕심이라 치부했던 것. 내가 생각해 왔던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묻지 않았고, 때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어설프게 확신했고, 그러나 한 번도 그것을 실행해 옮기지 못했던 내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어느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은 아프지만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불신했던 현대 의학이 생명이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큰 용기를 낼 수 있을지를 확인했고, 그 용기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지를 경험했다.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뿌리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연결고리를 깨닫게 되는 아툴 가완디의 경험이, 혼자서 죽어야 하는 순간을 상상해 왔던 나의 오늘을 편안하게 했다.

 

의식을 잃었던 가완디의 아버지는 죽음 직전 의식을 차린다. 잘 지냈니? 자신의 몸을 씻기려는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손자들의 사진을 보며 웃음 짓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다. 그 평온하고 따뜻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램은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바램을 인정하고 수긍해준 가족들의 결정이 고마워서, 끝내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 세기를 살아오신 할머니가 한 번은 눈을 떠서, 잘 지냈니? 인사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더 울어야 했다. 끝내 당신에게 어떤 인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래서 내가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도, 할머니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내가 당신의 전 생애에 대해 감사를 전할 방법은 당신의 고통 밖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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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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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만으로는 소설이 아닌 이유, 이야기 과잉의 시대에 소설이 아직도 예술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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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살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 죽을지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의 방식이나,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생전에 내게 속했던 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사는 내내 고민해야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서 아쉬운 주말 저녁, 그래도 이런 죽음은, 내게 위안이 된다.

 

 

죽음이 며칠이 아닌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깨달은 메이는 마그누스에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그리고 테런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테런스에게 문을 닫고 침대로 와 자기 곁에 누우라고 말한다. 바로 그의 품안에서, 그녀는 죽기를 원한다. 그녀가 한번도 벌거벗진 적이 없는 몸, 한 번도 껴안거나 어루만진 적이 없는 그 몸에 기대어, 그녀의 욕망이 다가설 수 없었던 남자, 남편인 동시에 오라비요 정신적인 동지였던 남자의 그 부드럽고 고요한 몸만이 그녀가 순순히 항복하고 공포나 분노 없이 미지의 죽음으로 건너가도록 도울 수 있다. 애인의 몸에 기대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저항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녀는 이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며 죽음과 맞대결하고 싶다. 자신의 죽음을 존중하고 싶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이름은 메이. 마그누스는 그녀의 애인이고, 테런스는 그녀의 남편이다. 테런스와 그의 동성애인, 그리고 메이와 마그누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근거로 해가 갈수록 암목의 깊은 동조로 견고해지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메이는 죽음을 맞는다.  

 

테런스는 그녀 곁에 몸을 누이고 천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는다. 서로의 눈이 너무 가까워 속눈썹이 스치고 시선이 뒤썩인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덤불 한 가운데서 작은 빛의 웅덩이처럼 떨리는 섬광 하나를 알아볼 뿐이다. 그들은 이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매이는 웃을 힘이 없어 미소만 짓는다. 그들의 미소도 뒤섞인다. 숨결 역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더이상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이지만, 이 순간 그 둘은 마찬가지다. 시간 밖에서, 욕망 밖에서, 헐벗은 사랑으로 그렇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있으니 편안하다. 두 사람의 암묵적인 동조가 그렇게까지 치밀하고 광범위하며 환하게 빛을 발했던 적이 없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뢰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긴 채 자아를 망각하는 경이감에 젖는다. 서로를 향해, 세상 속에서, 그렇게까지 뚜렷이 존재해 있음을 느낀 적이 없다. 이제는 세상 한복판이 아닌 그 문턱에서.

테런스는 자신의 속눈썹 끝에서 떨리는 작은 빛의 웅덩이가 흐려지는 것을 본다. 자신의 숨결과 하나가 되어 속삭이던 숨결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메이의 얼굴을 양손을 꼭 감쌀 뿐이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머무른다. 무한한 사랑이 되어버린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메이는 자신의 죽음을 존중했다.

 

 

 

래 알고 지냈던 한 사람은 늘 자신은 사랑을 하게 되지 않는 순간이 올까 두려워했다. 나는 늘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평생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잠 못 이루기도 하고, 잠깐의 헤어짐이 애달파 오래 밤거리를 걸었어도, 나는 늘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 존엄한 메이의 죽음 앞에서, 벌거벗은 몸 한 번 본 적 없어도 생명의 빛이 꺼지는 순간을 온전히 함께 하는 테런스의 침묵 앞에서, 가슴이 뛴다. 누군가를 온전하게 존중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누군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주일이 넘게 소설 <마그누스>를 읽는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마그누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아주 천천히 이 소설을 읽어내고 있다. 마그누스가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만나는, 메이와 테런스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책 읽기를 멈추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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