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느티나무 > “두발규제·체벌 반대” 동성高 오병헌군 1인시위

   “빼앗긴 학내인권을 돌려주세요.”

   한 고교생이 두발규제, 체벌에 반대하며 1인 시위에 나섰다. 2004년 학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1인시위에 나서 파장을 일으켰던 강의석씨(20·당시 대광고 3년)를 연상케 한다.

   서울 동성고 3학년생 오병헌군(18)은 8일 등굣길 학교 앞에서 강제적인 0교시 수업, 엄격한 두발규제와 체벌 등에 반대하며 1시간가량 1인 시위를 벌였다.

   오군이 시위에 나선 것은 학생들에 대한 학교의 통제가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

   오군은 “0교시에 조금 늦거나 주번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수차례 따귀를 맞는 등 비상식적 수준의 폭력행위가 벌이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두발검사에 걸리면 단체로 운동장에서 얼차려 등의 ‘제식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군은 “‘학생회장 출마 규정에 성적 제한을 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학교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삭제당한 적도 있다”면서 “담임선생님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지 말도록 강요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오군은 “학교 게시판이나 학생회를 통해 문제제기를 해 왔지만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다”며 “무섭지만 이대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측은 오군의 주장에 대해 “체벌이나 지나친 폭언은 조사를 해서 시정하겠지만 두발규정은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고 보충수업은 담임 교사의 재량에 달린 문제로 학교가 규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6년 5월 8일, 경향신문/이윤주 기자


   학교측의 주장은 터무니 없어 보인다. 두발 규정은 학운위가 결정하지만, 저 지경에 이를 정도의 학교라는 학운위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학교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드는 교장의 충직한 '시종' 노릇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결정은 학운위에서 하니 학교는 어쩔 수 없다니? 학교에 있어 본 사람은 다 안다.  보충수업은 담임 재량이라 규제할 수 없다? 그런 재량권 많은 학교는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아주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진 학교인데, 왜 1인 시위까지 해서 언론에 소개까지 되었을까? (물론 담임과 아이들이 보충수업을 놓고 직접 대화를 하지만, 결정은 담임이 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보충수업 희망 조사서에는 분명히, 희망하지 않음도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용감한 학생은 드물다. 왜? 그래봐야 피곤해진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상황인데, 결정권은 담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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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5-09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충 수업, 자율 학습에 담임 재량껏 참여시키고 나면 주변 교사들의 눈총만이 문제가 아니라, 학부모들도 무능하게 보고, 애들도 담임의 무능을 욕합니다. 실제로 무관심한 담임들이 잘 저지르는 짓이지요. 애들과 밀착되어 관리해주는 담임을 학생-학부모-교사집단이 좋아하고요. 이 사이에 <옳음>이 파고들 틈은 아직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0교시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더이상 학생들의 요구에 부합하기 어려운 <보충 수업>이나 <방과후 학교>에 매달리는 한,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해콩 2006-05-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잡합니다...

BRINY 2006-05-0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발,복장 규제니, 보충, 야자니 0교시니 언제 학생들 요구에 따라, 담임의 요구에 따라 한 적 있나요? 학운위가 제 기능 하는 학교가 있다면 한번 구경해보고 싶습니다요.
 
 전출처 : 느티나무 > 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은 책

* 이 글도 역시 광동고에 계신 송승훈 선생님의 글입니다. 아이들과 차곡차곡 읽어야겠습니다.  


  •  세상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박영희·오수연·전성태 글, 김윤섭 사진, <길에서 만난 세상>, 우리교육

 - 도시의 노인들, 외로운 농촌 청소년, 10대 미혼모들, 코시안의 엄마들, 이주노동자의 어려운 삶, 한센병에 걸린 소록도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들 이야기 들이 담겨 있다.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 생생한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거나, 삶이 늘어진 사람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상석·박재동, <못난 것이 힘이 된다 1-2>, 자인

 - 자기 부정이 심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자포자기하려는 학생이 읽으면 치료효과가 있는 책이다. 한 남자의 청소년 시절 성장 이야기. 무엇이 사람을 사랍답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두 권짜리라서 부담을 느끼지만, 책은 정말 재미가 있다.


김지우,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가 없다>, 창비

 - 멀쩡히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서 다친 뒤에 치료비를 뜯어내는 자해공갈단, 노래방에서 손님들과 같이 놀아주고 돈을 버는 노래방도우미, 이런 밑바닥 인생들에 대해 그네들이 무슨 사연이 있어 그렇게 사는지 그 사람들 처지를 파고든 단편소설을 주로 모은 책이다.


최민식,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현문서가

 -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우리가 상품광고 흔히 보는 곱고 예쁘게 다듬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집과 학교를 오고가며 만나는 동네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평소 스쳐 지나친 여러 장면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박수정,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 삶이보이는창

 - 남을 제끼면서 떠밀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 손을 잡아주며 삶을 살아온 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숨에 돈을 얼마나 벌었네 하는 부류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을 책. 읽으면, 읽기 전과 사람이 달라진다. 인생을 우습게 아는 사람이 읽으면 좋다.


최일도,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동아일보사  

 - 노숙자들에게 따끈한 밥 한 그릇 대접하는 목사님 이야기. 세상인심이 가파르다며 꿈을 잃으려 하는 청소년이 읽으면 좋겠다.


위기철, <아홉 살 인생>, 청년사

 - 누구나 어릴 적 기억 속에 담긴 누추한 시절, 그러나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조그만 아이였을 때 뛰어놀던 기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음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는 이야기다.


이희재, <저 하늘에도 슬픔이>, 청년사

 - 이윤복 어린이가 1964년에 쓴 일기를 출판한 책이 그 시절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어렵고 어렵던 시절, 우리의 아버지 세대 때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요즘 아이들이 읽으면 이게 진짜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는 책.


최정현, <반쪽이의 육아일기>, 여성신문사

 -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기르는 이야기 만화. 부모와 갈등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애틋한 마음이 생기겠다.


김한수,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 문학동네  

 - 식민지 시대 ‘운수 좋은 날’ 주인공이 오늘날 살면 이렇게 살 것이다. 진지한 느낌이 가슴을 치는 경험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부모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지 못하고 자꾸 투정부리는 아이가 꼭 읽을 책이다. 보통 남학생들 정서에 잘 맞는 책이다.


윤수종,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학사

 -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그러나 우리가 평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치던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담았다. 넝마주의, 성전환자, 장애여성 등, 우리 사회에서 힘없는 소수의 이야기다. 그러기에 세상을 섬세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사려 깊어지고 싶은 학생이 읽으면 좋다.



  •  세상의 여러 모습을 담은 책

이용재,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 거예요>, 창해

 - 건축 이야기다. 세상에서 떠들썩한 새만금 갯벌과 청계천 복원과 같은 일에 대해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뒷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런 떠들썩한 일의 진실을 알게 되면, 화가 날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 권한다.


김세윤, <헐크바지는 왜 안 찢어질까>, Media2.0

 - 영화 제작과 관련해서 온갖 궁금한 내용을 다 알려주는 책이다. 호기심을 한껏 만족시켜주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특수 분장의 비밀, 야한 장면을 찍는 기술, 전쟁영화 무기는 어디서 구하나, 한국영화엔 왜 토하는 장면이 많나.


강  헌 외, <내 인생의 영화>, 씨네21

 - 유명한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에 대해 쭉 이야기한 글을 모은 책. 영화 이야기이면서, 인생에서 탁 느낌 받는 순간에 대해 나와 있기도 하다. 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 청년사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 청년사

 - 그 시대의 다수 사람들이 실제 어떤 생활의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구석구석 살핀 역사책이다. 높은 사람들 이야기만 나오는 역사가 아니라 그 당시 보통사람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새롭다.


유시민,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1-2 문화이야기>, 푸른나무 

 - 외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유럽을 재밌게 소개해주는 책. 흔히 외국을 소개하는 책은 그 나라를 보고 ‘우아~’하고 감탄하는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정말 재밌게 각 나라를 소개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 안내서를 유시민씨가 편역한 책.


신동흔,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신문사

 - 자청비라는 술이 새로 나왔던데, 그 자청비가 우리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그리스로마 신화는 누구나 다 알아야 한다고 여기면서 혹시 우리 신화는 괄시하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알자.


이윤기,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1-2>, 웅진탓컴

 - 그리스로마 신화를 학생들이 많이들 읽고 싶어 하는데, 사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읽기 쉬운 글이 아니다. 문화도 다르고 이름도 낯설고 해서 잘 안 된다. 어린이 책으로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를 빼면, 청소년이 읽기에 어렵지 않은 책이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책이다.


<사람답게 아름답게>, 차병직, 바다출판사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인권을 재밌는 우화와 연결 지어서 이야기한 책. 자기 권리를 알고 주장할 줄 알아야, 함부로 대우받지 않는다.


박원순,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겨레신문사

 - 역사적으로 유명한 재판 이야기다. 예수의 재판, 소크라테스의 재판, 갈리레오의 재판, 드레퓌스의 재판, 재판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에서 이름난 사람들의 삶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삶의 모형이 잘 찾지 못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만화 박정희 1-2>, 백무현 글, 박순찬 그림, 시대의창

 - 우리는 현대를 산다. 그러나 한국현대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이 사실고증을 꼼꼼하게 하면서 보통사람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는 현대사 만화책이 의미 있는 이유다.


박건웅, <꽃 1-4>, 새만화책 (만화)

 - 일제 시대부터 해방 이후에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슬픈 일에 대해 다룬 책. 묵직하고 가슴 찡한 이야기들이다. 작가가 5년 동안이나 파고든 대작인데,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조금 비쌈.


<뚝딱뚝딱 인권짓기>, 인권운동사랑방 지음, 윤정주 그림, 야간비행 (만화)

 - 인권을 주제로 한 짧은 단편만화들이 모여 있다. 이주노동자 인권, 폭력문제, 전쟁에 대해 잘 그려진 만화가 나오고, 짧고 굵게 설명이 달려 있다. 어린이를 위한 교양만화월간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만화들. 쉽지만 뜻 깊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3  1980년대편 1-4>, 인물과사상사

 - 현대사를 도란도란 이야기하듯이 풀어놓은 책. 오늘을 알지 못하고 옛날 역사를 주로 배우는 학생들에게, 현대사를 어렵지 않게 알려주는 귀한 책이다.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강수돌 지음, 최영순 그림, 봄나무

 - 돈, 월급, 돈과 행복, 신용불량, 빈익빈부익부, 저축, 세금, 쌀 수입문제, 여러 경제 생각거리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는 책. 생태주의 사상에 바탕해서 경제를 청소년에게 쉽게 설명하는 책.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관점.



  •  학교에 대한 책, 학생들 이야기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교육

 - 따뜻한, 따뜻한, 그리고 착한 학교 교육 이야기. 마음에 위로가 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읽어라.


임길택,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보리

 - 강원도 탄광마을에서 어린 초등학생들과 지내며 겪은 이야기다. 아이들의 순진함과 천진무구함과 잔인함을 보면서 글쓴이가 하는 생각에 푹 빠진다. 착한 이야기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이 책에 쓰고 싶다.


최병화, <교실 이데아>, 예담

 - 문제아들에 대한 보고서다. 학교에서 주로 칭찬을 많이 받는 우등생이 읽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지는 책이다. 사람을 함부로 쉽게 재단해서 판단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상석,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자인  

 - 이때까지 학교를 다녀오면서 학교에 대해 불신이 많이 생긴 사람이 읽으면 좋다. 이 책에 나오는 선생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는데, 그런 자기 행동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적어놓은 데서 우리는 책 읽는 맛을 느낀다.


하이타니 겐지로, <모래밭 아이들>, 양철북

 - 일본 학생들이 학교에서 아옹다옹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비슷한 또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이라, 학생들이 읽으면 크게 공감한다. 학교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다.


민가영, <가출, 지금 거리에 ‘소녀’는 없다>, 우리교육

 - 어디에나 가출하는 학생이 있다. 그 친구들은 어떻게 살다가 돌아오는 걸까? 가출하지 않은 친구들, 가출을 한번 해보았으면 하는 친구들에게, 가출의 세계를 진짜로 알려주는 책이다. 어른이 보면 충격을 받고, 아이들이 보면 한탄하는 책이다.


김종휘, <너 행복하니?>, 샨티

 - 자기 기질을 내뿜으며 개성 있게 삶을 꾸려가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 삶에 꿈과 활력이 필요한 청소년이 읽으면 자극 좀 받는다. 대안교육문화공간인 하자 작업장에서 만나는 아이들 이야기다.


김형태, <너 외롭구나>, 예담

 - 무기력하게 살면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한탄만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따끔한 인생 충고. 정신이 번쩍 나는 꾸중이 되게 직설적으로 담겨 있다. 꿈과 열정과 노력이 필요한 이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이다.



  •  가슴이 찡한 책 : 감동이 있는 책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 사형수 이야기다. 어느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서 한 말 : 세상에 푹 빠져서 읽는 책은 처음이에요. 왜 태어날 때는 다 예쁜 갓난아이였는데 누구는 멀쩡한 사람이 되고 누구는 사형수가 되는가. 참 슬픈 책이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 어려운 처지에서 진지하게 자기 행복을 찾아 날아오르려 한 사람에 대한 기록.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 그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국가인권위, <십시일반>, 창비

 -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별에 대해 국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해서 만화가 열 사람과 함께 만든 책이다. 국가기관에서 만든 책이라고 해서 따분하고 뻔하겠다는 편견을 가지면 안 됨. 굉장히 훌륭하고 예술적인 책.


이란주, <말해요 찬드라>, 삶이보이는창

 - 이주노동자가 이 땅에 와서 겪는 사연을 모아 담은 책.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진다. 겸손해지는 책,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해서 우리 영혼을 좀 더 맑게 해서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책.


교육출판기획실,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푸른나무

 - 어렵고 고생스럽게 산 사람들 이야기. 세상의 쓴맛을 볼 만큼 보았다고 일찍 늙은 청소년이 읽으면 좋다.


중자오정, <로빙화>, 양철북

 - 가슴에 슬픔이 가만히 스며오는 책, 읽고 나면 눈물이 나려 한다. 중국 시골 초등학교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그러나 어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가 산다. 어느 날 그 학교에 찾아온 임시교사 선생님이 그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지만.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 사계절 

 -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으스대는 학생이 읽으면 좋다. 모성애가 주제인 책인데, 다 읽고 나면, 아무리 심장이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잠시 가슴에 느낌이 남는다. 감정을 적시는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다.



  •  소설

이옥수, <푸른 사다리>, 사계절

 - 동네에서 사고치고 말썽부리며 도둑질하다 경찰에 붙들려가는 어린 아이들 이야기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협박해서 물건을 훔치게 하는 친구도 나온다. 지난날 사고 친 경험이 있거나, 너무 얌전해서 그런 친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읽으면 재밌다.


안재성, <황금이삭>, 삶이보이는창

 - 사람이 인생을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새어나오는 책이다. 어떤 뜻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요즘, 이 책을 읽으면서 학생들은 자기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조정래, <불놀이>, 해냄 

 - 분단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한 소설. <태백산맥>이라는 대작이 나온 것은, 이런 작품이 그전에 있기 때문이다. 조정래 분단문학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책. 분단문학으로 많이 권하는 <광장>은 보통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에 어렵다. <불놀이>는 고등학생이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읽고 나면 분단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깊게 생각하게 된다.


김한수, <봄비 내리는 날>, 창작과비평사

 - 어렵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 자신의 집을 싫어하는 학생이 읽으면 치료효과가 있는 책이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읽으면 가난이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다. 학생들은 집에서 몹쓸 불화를 경험하는 때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런 학생들의 경험을 다시 일깨워주어서 학생들이 자신만이 슬프다고 여기지 않게 해주어 학생들에게 힘을 내게 한다.


공지영,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창작과비평사  

 - 고등학생들 수준에 딱 맞는 책이다. 학생들은 편안하게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여러 인생들을 만나게 된다. 인생을 살핀다는 문학의 의미를 학생 수준에서 실현하기에 알맞은 책이다.


조현설,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 운영전>, 나라말

 - 조선시대 사랑 이야기다. 궁녀가 주인공인데, 궁녀와 사랑에 빠진 외간남자가 대담하게 궁궐 담을 넘는다. 사극에서 배경화면으로만 나오는 궁녀들이 어떤 기쁨과 슬픔과 서러움을 갖고 살았는지, 이 작품은 알려준다. 멋지고 슬프고 대담하고 진지한 사랑 이야기. 올바른 사회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  시

서정홍, <아내에게 미안하다>, 실천문학사  

서정홍 시, 허구 그림, <우리 집 밥상>, 창비

 - 보통 사람들이 평소 사는 모습이 담긴 시집이다.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동네 아이들, 곧 학생들 자신이 사는 모습이다. <우리 집 밥상>은 동시를 모은 책인데, 어른이 읽어도 느낌이 참 좋다.


전국국어교사모임, <문학시간에 시 읽기 1-3>, 나라말

 - 뛰어난 한국 시인들 작품 가운데 고등학생들이 잘 읽고 이해하는 시를 모아둔 책. 시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고등학생이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현대문학북스

 - 사랑에 대한 시들이 담겨 있다. 청소년들은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잘 읽어낸다.


임길택 시, 정문주 그림,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

임길택 시, 강재훈 사진, <산골 아이>, 보리

 - 강원도 산골 탄광마을 아이들 모습을 그림 같은 시로 표현했다. 학생들에게 창작교육을 시킬 때 참고할 시로 아주 좋다. 가난하지만, 그래서 가끔 슬프고 간간이 쓸쓸하지만, 비참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형편 속에 사람의 좋은 마음이 느껴지는 시들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국어시간에 시 읽기 1-2>, 나라말

 - 학생들이 좋아하는 시를 골라 뽑아 모은 책이다. 실제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현장교사가 뽑은 시들이어서 학생들과 공감하는 정도가 높은 책이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시선집.


도종환 엮음,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나무생각

 - 도종환 시인이 뽑은 가슴에 와닿는 좋은 시들. 편안하고 따뜻하게 읽히는 시들이 골라져 있다.



  •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민, 성

벌리 도허티, <이름 없는 너에게>, 창비

 - 고3 여학생이 남학생을 좋아하다가 그만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그 뒤에 이 친구가 어떤 일을 겪어나가는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손에 땀을 쥐고 책 속 주인공에 빠져드는 체험을 하는 책.


최성수 외, <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 우리교육  

 - 성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다룬 책. 대중매체와 성,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김성애·전명희, <우리가 성에 대해 너무나 몰랐던 일들>, 또하나의문화

 - 청소년 성폭행에 대한 보고서다. 너무나 몰랐던 일들이어서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다. 충격이지만, 알아야 이런 일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구성애, <니 잘못이 아니야>, 올리브

 -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성폭력에 대한 책이다. 세계에서 한국의 성희롱-성추행-성폭력 발생 순위가 굉장히 상위권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제대로 많이 알아야, 이런 안 좋은 일을 이겨낼 수 있다. 성폭력에 대한 태도, 예방방법, 일이 일어난 뒤에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잘 나와 있다.


대한사회복지회 엮음, <별을 보내다 -10대 미혼모들의 이야기>, 리즈앤북

 - 미혼모들의 사연을 담은 책. 한번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하면 책장을 다 덮을 때까지 손을 떼지 못한다. 우리들의 삶은 만만치 않다. 가슴이 아프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친구에게 권한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엮음, <결혼할까 혼자살까>, 김영사  

 - 남자와 여자가 만나기 전과 만나 뒤,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다음, 이혼하기까지 각각의 상황에서 겪게 되는 문제 상황을 정리해서 대책을 마련한 책. 내용이 실제상황이어서 실감나는 책이다.


이순원, <19세>, 세계사  

 - 남자아이가 성에 눈뜨고 세상에 눈뜨는 무렵의 이야기. 성장소설인데, 중고등학생 무렵 남자아이의 정서를 잘 표현해서 학생들이 잘 읽는다. 성에 대해 많아지는 고민, 세상에 대해 복잡해지는 생각을 풀어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청소년들은 몰래 숨죽여 웃다 진지해지다 그런다.


막달레나의 집 엮음,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 삼인

 - 성 매매 여성들에 대한 보고서다. 우리나라는 매춘의 천국이라고 한다. 학생들 가운데는 성 매매를 하는 곳에 찾아가는 학생도 드물게 있는데, 남자든 여자든 제대로 알아야 불행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을 권한다.



  • 생명, 생태주의, 자연과학

이동범, <자연을 꿈꾸는 뒷간>, 들녘

 - 똥과 뒷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똥을 괄시하는 요즘 문화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따져 묻는다. 생생한 원색사진이 많아 읽는 데 지루하지가 않다. 재밌게 읽히는데, 읽고 나면 똑똑해지는 책.


이유명호, <살에게 말을 걸어봐>, 이프

 - 여성 몸 건강에 대해 잘 이야기한 책. 빼빼마른 여자가 좋다는 통념에 대해 의학적 관점으로 비판한 책. 건강에 대한 많은 상식을 얻을 수 있다. 청량음료와 많은 즉석음식에 길들여진 우리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김대식, <우멍거지 이야기>, 이슈투데이

 - 이 책은 포경수술이 90% 넘게 이루어지는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국제인권상을 받기도 한 책. 읽으면 충격을 크게 받는다. 남자 몸에 대한 위험한 사진들이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을 책. 


이인식, <아주 특별한 과학에세이>, 푸른나무

 - 청소년이 읽을 과학 책이 많지 않다.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관심거리가 된 과학 쟁점을 쉽게 풀어서 설명한 책이다. 과학에 대해 두루 관심이 있는 학생이 읽으면 궁금함이 많이 풀릴 것이다.


최재천, <알이 닭을 낳는다>, 도요새 

 - 생물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짧은 글로 이루어져서, 짬짬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책을 잘 못 읽는 학생들도 이 책을 잘 읽는다.


권오길, <생물의 애옥살이>, 지성사  

 - 애옥살이는 쪼들리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지구의 여러 생물들은 모두 물자를 아껴가며 조심스레 살고 있는데 인간만이 낭비하며 살아가서 지구 생태 환경을 위협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서 신기하다.


이은희, <하리하라의 생물학 까페>, 민음사

 - 여러 과학 지식에 대해 신화와 연결 지어서 어렵지 않게 설명한 책이다. 과학 지식을 얻고 싶은 학생이 읽으면 좋다.


박정훈, <잘 먹고 잘사는 법>, 김영사

 -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고, 어떤 음식이 건강에 나쁜지를 이야기하는데, 내용이 무척 좋다. 청소년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 청소년이 읽으면 꽤 자극을 받는다. 햄버거를 많이 먹으면 성격도 안 좋아지고 머리도 나빠진다는 얘기가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책을 읽다가 그만두겠는가.


박정훈, <환경의 역습>, 김영사

 - 새집증후군과 같은 유해환경물질이 우리 몸에 끼치는 나쁜 영향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 책. 충격 받는 내용이 많고, 그 충격 속에 환경과 과학기술과 우리 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장진영, <삽 한자루 달랑 들고>, <무논에 개구리 울고>, 행복한만화가게

 - 강화도에서 유기농사를 짓는 화가 이야기. 강화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모습이 편안한 그림으로 담겨 있다. 이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 편안하게 읽는 책

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에게 배운 것>, 다우

 - 일본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과 지내며 겪은 이야기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에게 배운다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준다. 따뜻하고 푸근하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에 대한 어두운 마음이 사라진다.

 

한비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

 - 씩씩하게 세상 여기저기를 활달하게 달리는 여행가 한비야, 그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라에 가서 긴급구호 활동을 하는 이야기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하고, 하루하루가 시시하다면 이 책을 펼쳐들라. 막한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린다.


최광선, <몸짓 속에 숨겨진 마음의 비밀>, 학지사

- 심리학 이야기. 딱딱하지 않고 재밌다. 깊이 있게 이론을 펼치기보다는 생활 속에 숨겨진 사람 마음을 들추어낸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 읽으면 도움이 된다.


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창작과비평사 

 - 시골 이야기다. 그냥 보면 심심하기 짝이 없는 농촌 이야기인데, 김용택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시골이 떠들썩하고 호기심 나는 일도 많아 보인다. 학생들을 흙으로 다가서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학생들이 잘 읽지 못해 보이지만, 의외로 학생들이 잘 읽는 책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의 힘이다.


도종환,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문학동네  

 - 작은 감동을 주는 짧은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생각날 때마다 펼쳐들고 한두 장씩 읽어도 얻을 게 있는 책이다. 마구 뛰어노는 산만한 학생이 읽어도 좋아하는 책이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 도솔

 -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처지에서 어떻게 이런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갇혀 있었기에 작은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지. 학생들은 이 책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림도 신기하고, 글도 신기하다. 학생들 말로는 좋은 말이 많이 적혀 있어서 좋다.


서영남, <민들레 국수집>, 더북컴퍼니

 - 인천에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봉사활동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하는 분의 이야기.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할까. 배고픈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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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아, 스승의 날 주변이면 제발 우리 교사들을 욕하지나 말아 다오.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게 학생 탓이랴


올해부터 서울지역 초중고 학생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교총에서 스승의 날을 자율휴업일로 정한다고 정한 게 작년 일이니 초·중·고교 교장협의회의 발표는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이 날만 되면 촌지수수 등 교육부조리 문제가 거론됨으로써 오히려 교권이 떨어지고 교직사회의 신뢰가 추락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는 데 이해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냉소적이 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공식 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부터 금지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진지한 발언이다.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어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논리는 자명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스승이란 불필요하게 높은 단어다. 교사만으로도 충분하고 많은 사람들은 종종 그 단어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면 교사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소정의 자격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럼 일반적인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별 거 아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 그걸 내가 억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너 개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직업에 어울리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준을 강화하고 교육을 시키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고 부적절한 인물들을 솎아내는 것이지,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르게 강요하고 지킬 수도 없는 기준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권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스승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환경 속에서 정상적인 직장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일에는 단계와 한계가 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건 노력과 실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스승의 은혜’가 강요하는 기준이 불가능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습관적으로 낭송하지 말고 그 가사를 한 번 의미를 되새겨가며 읽어보라. 황당하기가 무협물 주제가 같다.

교사는 존경받을 필요 없다.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존경받는 교사가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건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교사가 인격적으로 뛰어나다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그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 적 없고 노인네들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지금의 우리 학교는 정반대이다. 존경의 대상이 없는 시스템 속에서 존경에 대한 강요와 자화자찬만이 존재한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스승의 날’, 제발 교사 욕이나 하지 말자...


오늘 아침 한겨레 신문에 실린 이 글을 두고 말이 많다.

물론 학교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독재>와 <군국>의 망령이 춤추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그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 놓고는 불안한 부모 마음이야 어느 나라라고 다르랴만,

한국에서처럼 <촌지>, <치맛바람>이 존재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글을 쓰는 필자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스승의 날을 만들어 두고, 그 날 주변만 되면 온갖 매체가 <교사>라는 핫바지 저고리를 두들겨 패는지... 심히 불편하고 우울한 일이다.


학교가 신뢰받는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지 못한 데에는 분명 교사들의 잘못도 크다. 그렇다고 ‘스승의 날’을 만들어 두고 교사 집단을 매도하는 데에는 ‘합리적 비판’ 이상의 ‘과장된 기대’가 담긴 것이나 아닐는지...


민중의 신문 ‘한겨레’조차 이토록 교단을 비하하고 폄훼하는 기사를 싣는 행태는 정말 슬프다. 아무리 자기네 사람이 아니라고 발뺌하더라도, 신문사 기고문은 ‘신문사 취지에 맞는 글’이라는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서는 실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런 욕지거리에 가까운 것을 기사라고 싣는 일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스승의 날 행사를 하면서 꽃 한 송이를 가슴에 받는 일은 조금 쑥스럽지만, 아이들이 부르는 스승의 은혜 노래는 매년 가슴 찡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교사 아닌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그렇다고 그 노래를 <금지>하게 하자는 발상은 정말 <독재, 군국주의> 시대의 잘못된 교육이 낳은 산물이 아닐까?


솔직히 나도 스승의 날이면 찾아가고 싶은 선생님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더 쓸쓸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선생님이 어디 근무하는지 알지만, 찾아가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 다닐 때, 남학교에서의 폭력은 얼마나 일상적인 일이었던지... 그렇지만, 내가 교사가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결코 저런 교사가 되지 않겠다는 것.’ 그런 열정으로 사범대학을 다녔고, 18년째 교사를 하고 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이런 것을 교사의 기준이라고 만든 필자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폭력>의 잔상이 남았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소설가 씩이나 되었다는 사람이 이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은 잘못이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논지를 전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저런 험악한 용어로 도배하는 것이 기준이라면, 필자가 교사를 욕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이렇게 원흉이 많아서야 세상 살겠나?


아, 이런 글을 읽다 보니, 그리고 그 글에 머리가 아프다 보니...

그나 나나 참으로 <불행한 시기>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불행한 학교를 그대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증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북한>에 대한 증오를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이 땅에 태어나서,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며> 자란 폭력적인 세대다.

그래서 진정한 원흉을 보지 못하고, 눈 앞에 거슬리는 것을 증오하게 되는 것 같다.


선거 철이 되면 전라도를 증오하고, 경상도를 증오한다. 보라색을 증오하고, 파란색을 증오한다. 내 머릿속에도 그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증오하는 대상이 있어서, 증오하지 않는 대상을 찍을 뿐이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교권 회복이란 말을 이 사람도 알고 있었구나...

교권이 회복되어야 함을 이 사람도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교사들의 권리만이 아니다.

이 사람, 심각하게 아픈 사람이다. 그의 회복을 빈다.


그리고, 교권 회복보다 중요한 일은, 학교 교육을 정상화 시키는 일이다.

그 일은 작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사의 힘에 기대는 것이지만,
크게는 국가 교육과정의 차원에서 거론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 관료들의 복지부동과, 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무관심 앞에서,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화두로 붙잡고, 교육부와 싸우고, 그들에게 호소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이다.


한국 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지나치게 삽질이 많다.(삽질은 불필요한 일을 무능하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속어다.)

불필요하게 암기를 하고, 반복 학습을 한다. 그것이 사교육의 정체다.

학교의 교육과정과 수업 시간을 대폭 축소하여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교사의 시간당 투입 수를 늘리고,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폐해는 <교수 투입>을 늘리려고 할 뿐이지, <학습>이 늘어나도록 힘쓰지 않는 것이다.

1주일에 한 시간 배우는 과목을 없애고, 집중적으로 몇 과목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교육 과정 전반을 수정하는 큰 일이다.


교사를 <새 鳥>같이 보는 시선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삐뚤어진 눈 때문에 학교 교육을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아, 스승의 날 주변이면 제발 우리 교사들을 욕하지나 말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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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김창남 - '논다는 것'에 대하여

‘논다는 것’에 대하여

김창남(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1.‘논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논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 문명의 창조성을 놀이 활동으로부터 도출하는 호이징하의 개념(Homo Ludens)을 빌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노는 인간’이며 과거에 놀았고 지금 놀고 있거나 앞으로 놀 인간이다. 놀이(형식화되어 있는 좁은 의미의 놀이가 아니라 ‘논다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놀이라고 부른다면)는 인간의 삶에서 피해갈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놀이의 형식과 방식은 한 두 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우리가 ‘논다’는 말과 관련된 활동이나 현상, 개념들을 얼핏 떠올려보기만 해도 ‘놀이’의 개념이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다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논다’는 말은 예컨대 여가, 노름, 오락, 휴식, 농담, 대화, 수다, 게임, 장난, 구경, 감상, 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의 활동을 의미하기도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killing time)이기도 하고, 심지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doing nothing 이것도 어떤 의미의 활동이다)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놀이 활동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다면 일하지 않는 것, 비노동 혹은 비생산의 상태라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논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노동’과의 상대적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흔히 놀이를 ‘무가치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우리가 ‘노동’을 가장 가치 있는 활동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쓰는 ‘놀고 있네’라는 말에는 생산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으로서 ‘노는 것’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다.  ‘노는 것’이 즐거운 것은 오직 노동을 전제로 할 때이다. 노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가 흔히 백수라 부르는)에게 논다는 것은 단지 악몽일 뿐이다. 

   그러나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사람은 ‘일하기 위해’ 산다는 관념이 성립된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랜 옛날 자연의 생명력만으로 충분히 인간이 먹고 살 수 있던 시절에 인간들은 일하지 않았다. 일정한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이 시작되었지만 이 때의 인간들은 단지 필요한 만큼만 노동을 했을 뿐이며 그 외의 시간은 노동 이외의 활동(즉 넓은 의미의 놀이)에 바쳐졌다.

   고대사회에서 노동은 결코 ‘신성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천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 아닌) 노예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삶은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중세 기독교 문화에서 노동은 신이 내린 형벌이었다(“너희는 고된 일을 함으로써만 양식을 얻게 되리라--창세기”). 노동을 찬미하는 것은 당연히 신에 대한 모독이었고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가를 보장하고 이를 어기면 엄벌에 처했다.  1700년 경 프랑스의 일반 평민들의 비노동일은 연 160일 정도였고 18세기 중엽의 기록에 따르면 연간 180일 정도 일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말하자면 일 년의 반 이상을 놀며 지낸 셈이다. 근대 사회를 이룬 신흥 부르조아지들은 이렇게 게으른 평민들을 비난하면서 노동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근대 부르조아 혁명은 가톨릭의 반노동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 이데올로기의 승리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동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고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근대 사회에 와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노동권’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그에 대응해 ‘여가’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토지로부터 쫓겨 나온 농노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노동자로 재편되어 갔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구원의 방식이며 자기실현의 형식이며 부와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노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기보다 노동을 위한 장치, 즉 재생산(recreation)의 메커니즘으로 이해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부각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잉여생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가치를 확장해 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노동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착취를 필요로 하며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노동 이데올로기’이다. 노는 자, 게으른 자를 소외시키고 벌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사회 구성원을 일정한 기간 동안 숙련된 노동력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천부의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사회주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노동의 개인성과 자기실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가치 증식을 꾀했다면 사회주의는 노동 자체를 규범화하면서 생산력 증대를 위한 집단적 에너지로 삼았다.  요컨대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근대사회를 이끈 것은 노동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노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는 것’은 최악의 경우 죄악이고 최선의 경우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은 노동시간을 무한정 연장하게 되고 그 결과 노동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 결과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문제가 중대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고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를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마르크스의 사위였던 라파르그(Lafargue)가 ‘게으름 부릴 권리’라는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 1883년이다.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놀 권리’의 확장을 위한 역사였다.

   기술의 발전은 노동과 놀이를 둘러싼 이같은 길항관계에 새로운 상황을 가져왔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게 되면서 천부인권으로서의 인간의 노동권은 위협받게 된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끊임없는 ‘고용의 불안정’ 상태에 놓여있게 되는 것이다.  생산된 부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필요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라 해도(분명 그렇지만) 그 부는 구성원 전체에 분배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부의 수준은 올라가더라도) 여전히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라는 사회 구성이 유지되며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실업보다는 차라리 과다한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노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고용의 불안정은 직장에 남은 자에게는 과로를, ‘노는 자’에게는 빈곤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에 예속된 노동 이데올로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이른바 시장과 효율의 원리를 구현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시장논리와 효율주의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고용은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노동자들은 더욱 더 노동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IMF사태로 늘어난 실직자들에게 ‘노는 일’은 끔찍한 고통을 의미하며 직장을 잃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은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설사 과로를 하는 한이 있어도 실직보다는 낳은 것일 수밖에 없다. 기술발전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은 줄어들지만 그것이 다수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소수 사람들에게 ‘과점’시키면서 나머지를 항구적인 주변부 노동자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양극화의 과정에서 이른바 20 : 80의 사회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IMF의 해법으로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했던 것은 이러한 비극을 예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닿아있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 나누기가 실현되든, 20 : 80의 사회로 가든, 이제 ‘노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노동보다도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노동거부’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테제는 바로 그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2.‘개미와 베짱이’ 신화의 역전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 우화를 통해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스런 노동(학생에게 노동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공부를 의미한다)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 참고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노동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것,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노동 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신세대에게 이런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한낱 낡은 윤리 교과서 마냥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아이들은 서슴없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개미보다 지금 놀고 있는 베짱이를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아이들의 타락한 윤리관 때문도 아니고 당장의 쾌락을 제공하는 대중매체의 영향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미의 윤리관으로 지탱되어온 사회가 분명한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IMF사태는 그 극적인 파탄을 대변한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을 얻어 열심히 일해도 아주 쉽게 ‘정리해고’될 수 있다는 것, 즉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수고가 결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아이들은 IMF사태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거기다 문화산업(혹은 오락산업, 요컨대 노는 것과 관련된 산업)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아이들은 열심히 ‘노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끝내 정리해고되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열심히 노래부르며 논 베짱이는 잘 나가는 신세대 스타로 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이다.

   개미의 ‘미래를 대비하는 근면한 노동’보다 베짱이의 ‘현실을 즐기는 재미있는 삶’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선택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노동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사회적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원적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의 총량은 줄고 있거나 적어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인데 반해 노동력은 (인구 증가, 수명 연장 등에 의해) 증가한다.  만일 현재와 같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노동 이데올로기가 유지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노동할 수 있는 소수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악몽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일찌감치 노동의 신성함보다 놀이의 즐거움을 선택하는 사람(그리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재와 같은 시장 구조에서는 ‘놀이의 즐거움’조차도 결국은 소수의 승리자를 향한 엄청난 경쟁의 시스템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보다 베짱이를 선택한 사람의 수는 늘어나지만 그 가운데 ‘잘 나가는 스타’로 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처럼 모든 분야에서 마이너리그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는 것조차 ‘모 아니면 도’식의 양극화된 길을 밟게 된다.  서태지처럼 뜨거나 라면만 먹다 좌절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악몽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전망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영역이며 변수로서 고민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어떻게 잘 놀게 할 수 있는가, 죄의식이나 좌절감이나 심적 고통 없이 즐겁게 놀 수 있게 하는가, 노동의 재생산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노는 것 자체로서 의미 있는 삶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는가, 노동만큼 놀이가 삶의 가치 실현이며 보람이며 자기 구원일 수 있게 하는가, 등등의 문제들은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에 필수적인 고민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3.놀이의 주체와 형식

   내가 언어학자가 아니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놀다’라는 말과 ‘놓다’ 그리고 ‘낳다’라는 말이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산’ ‘창조’의 의미를 가진 ‘낳다’가 물건을 위치시킨다는 의미를 가진 ‘놓다’라는 말과 같은 말임은 예컨대 경상도에서 아이를 ‘낳다’는 말을 ‘놓다’고 발음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놓다’라는 말과 ‘놀다’라는 말은 형태상으로도 그렇고 ‘위치를 갖게 하다’와 ‘움직이다’라는 의미의 상관성으로 보아도 같은 말에서 파생한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생산과 창조를 의미하는 ‘낳다’와 ‘놀다’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내가 굳이 전공 분야도 아닌 언어학적 추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노는 것이 사실은 생산과 창조의 의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놀이는 생산 활동에 대한 기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다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짐승을 사냥하는 일과 농사짓는 일을 흉내내면서 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춤과 노래는 사냥과 노동 같은 그들의 ‘노동’을 담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놀이는 생존을 위한 일상적 삶(노동)을 ‘낯설게’ 재현하는 행위였다.  ‘흉내내기’ 혹은 ‘낯설게 하기’는 놀이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이는 이후 역사속에서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의 놀이 형태들을 만들어내며 가지치기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두 가지 지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하나는 놀이하는 주체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놀이 자체의 산업화(혹은 상업화)이다.  물론 이는 모두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노동에 대한 통제와 조직화를 통해 유지된다면 그 노동의 조직화는 일정한 방식으로 놀이를 제공하고 통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10분간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50분간의 노동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휴식(즉 놀이)은 철저하게 노동 시간을 중심으로 편제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벗어난 일상의 삶은 사실상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마치 마이더스 왕의 손처럼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벗어난 일상의 삶조차 철저히 상품화한다.  노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오락과 휴식은 상품화한 형태로 제공되며 사람들은 이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놀이를 ‘소비’한다.  돈 없는 사람은 놀 수도 없는(혹은 노는 것에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놀이에서도 다시 한번 소외되어야 하는 것이다. 

   놀이가 상품의 형식을 가지게 되면서 놀이의 방식과 놀이 주체의 형태도 변화하게 된다.  과거의 놀이가 주로 ‘체험’과 ‘참여’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놀이는 많은 부분 (참여 아닌) ‘구경’과 ‘소비’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놀이의 주체에서 놀이의 객체로 변하게 된 것이다.  노동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적 구성에서 놀이는 비창조적인 것이며 짧은 시간에 해결해야할 욕구이다.  그것은 탐구하고 창조하기보다 주어진 프로그램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결국 놀이 주체의 객체화란 노동 중심 사회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에 와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면서 놀고 싶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여기에는 여가와 소득의 증대, 사회적 가치의 변화 등 많은 요소들이 관련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노동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적 편제로는 충족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주체적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남의 노래를 듣기보다 노래방에 가서 스스로 목청껏 노래부르고 싶어한다.  백화점의 문화교실은 스스로 무언가를 체험하고 만들어보고 싶은 주부들로 넘쳐난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하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과거의 어느 세대에 비해서도 ‘주체적으로 놀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디지털 혁명, 즉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기술은 이들의 그런 욕망에 날개를 달아준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은 쌍방향성이다.  이는 TV같은 대중매체가 대다수의 사람들을 구경꾼을 만들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구경꾼일 뿐 아니라 작가이며 생산자이며 송신자이다.  뿐 아니라 컴퓨터와 인터넷은 노동과 놀이의 구분 자체도 애매하게 만든다.  많은 신세대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게 놀면서 돈을 벌고 있거나(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나지 않았는가) 돈벌이를 꿈꾼다.  요컨대 이제 놀이는 노동이라는 절대적 영역과의 연관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하며 가치있고 창조적인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4.잘 놀기 위하여

   이제 ‘논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하다가 남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며 놀아도 그만, 안 놀아도 그만인 여분의 활동도 아니다.  놀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노동만큼 중요한 삶이며 어쩌면 노동보다 더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  이제 잘 놀지 않으면 삶 자체의 가치나 보람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 개인은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하는 전망과 함께 어떻게 노는 시간을 관리하며 즐겁게 놀 것인가에 관한 기획을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개인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노는 인프라’를 구축해 내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노동에 투입하는가 못지 않게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잘 놀 수 있도록 하는가가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제이며 정책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 ‘논다는 것’에 대한 진지하고 과학적인 분석과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영역에 바쳐진 만큼이나 무게있는 학술적 연구가 쌓여야만 노는 것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잘 노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가능하다.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연구가 폭넓게 시도되어야 한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을 위한 아주 작은 시론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잘 놀기’를 위해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개념적 전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새로운 발상과 아이디어, 방법론, 이론화 등을 위해 의미있는 단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자유, 자율성, 주체성
  자유롭지 않으면 그것은 노는 것이 아니다.  참여를 강요당하는 놀이, 의무가 된 놀이, 중독된 놀이는 결코 즐거울 수 없다.  완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시작되고 언제든 자유의지에 따라 그만둘 수 있을 때 놀이는 즐거운 것이 된다.  기업이나 단체의 수련회가 즐겁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 경마나 노름에 중독된 사람에게 그것이 즐거움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는 늘 1인칭의 주체(나 혹은 우리)에 의해 선택되고 향유되며 중지될 수 있어야 한다.  ‘놀고 싶은 사람’이 ‘놀고 싶을 때’ 놀아야 ‘노는 것’이다.  특히 주체성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노는 것에서도 끊임없이 자본을 주체화하고 사람을 객체화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그물망을 온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내’가 노는 것이고 즐기는 것이지 ‘자본’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최소한의 자의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노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놀아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남아돌아도 스스로 놀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 메커니즘 속에 스스로 들어감으로써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구성하고 갈무리하는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자본의 공세에 투항한다.

(2)탈일상, 탈노동 혹은 일상의 낯설게 하기
   논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일상에서의 탈출, 특히 노동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스트레스 해소니 기분 전환이니 현실 도피니 하는 것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노동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탈일상, 탈노동의 시공간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안겨 주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가 노동과 일상에 속박된 우리의 삶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오래 동안 대중 오락의 현실도피 기능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기구의 역할을 한다고 비판받아온 까닭이 그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이런 식의 비평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반성과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논자에 따라서는 대중 오락의 현실도피 기능이 오히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침윤을 막는 보호막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놀이의 의미를 탈노동에서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노동 중심의 삶의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탈(脫)이라는 부정적 개념의 도움없이 놀이 자체를 긍정적 의미로 재구성하는 방법은 없을까?  놀이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를 낯설게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상을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즐겁게 반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3)평등한 공간으로서의 놀이--탈위계 혹은 위계의 역전
   등산을 가면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는 역전된다.  산에서는 산을 잘 오르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가진다.  놀이의 의미는 이처럼 일상적 위계를 벗어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놀이라는 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일상의 신분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놀이 자체에 대한 지식(문화자본)으로 만나게 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노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로 보면 놀이는 모든 사회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평등의 영역’이다.  적어도 ‘평등’에 가까울수록 놀이는 재미있는 것이 된다.  직장 상사와 함께 가는 노래방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노래방이 더 즐겁다.  물론 문화자본의 차이는 존재한다(예컨대 노래 잘부르는 사람과 못부르는 사람).  이 때 문화자본의 경제자본으로의 이전가능성이 적을수록 놀이는 다수에게 즐거운 것이 된다.  즉 돈이 걸려있지 않을 때, 혹은 현실적 위계와 관련이 없거나 현실적 위계가 역전될 때(노래방에서 점수가 낮을수록 메리트가 주어지는 경우), 놀이는 즐거운 것이 된다.

(4)비생산, 비효율의 즐거움
   놀이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경제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 아니다.  돈이 걸려 있는 놀이 형태도 있지만(경마, 도박 등) 이 경우에도 한 쪽의 돈이 다른 쪽으로 이동할 뿐 총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생산성, 효율성 등의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적어도 생산성에 대한 강박, 효율성에 대한 강박이 적을수록 놀이는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도 경쟁은 존재한다.  놀이에서의 경쟁은 일상과 노동세계에서의 경쟁과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놀이에서도 일상의 경쟁 논리를 적용하곤 한다.  그럴 경우 놀이는 쉽게 재미를 상실한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놀이도 경쟁적으로 하려하고 그만큼 잘하기 마련이지만 경쟁 논리가 작용하면 할수록 참여자 전체에게 부여되는 즐거움의 총량은 줄어든다.
  
(5)창조성, 역동성, 변화가능성
   경제가치를 생산하지 않더라도 놀이는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이다.  노는 것에도 분명 일정한 정도의 자기 투여가 필요하다.  그 투여되는 에너지는 노동활동에 투여되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일정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조적이다.  놀이 활동에는 노동 활동보다 많은 상상력이 허용되거나 요구된다.  또 놀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노동, 특히 대량 생산 체제하의 노동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반복하는 과정이지만 놀이는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가진다.  대개의 놀이는 처음 소란, 무규범의 상태로 시작되지만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일정한 규칙과 형식을 갖추게 된다.  물론 그 규칙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고스톱 규칙의 무한한 변형들).  주체적 욕구에 따른 변화가 용이할수록 놀이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놀이가 아니다.

(6)육체성과 정신성
   놀이에는 육체적인 형식과 정신적인 형식이 있다.  양자는 상보적이다.  예컨대 육체노동자는 정신적 놀이의 즐거움을, 정신노동자는 육체적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다.  쾌락에는 육체적 본능에 가까운 쾌락(jouissance)과 정신적(문화적)으로 구성된 쾌락(plaisir)이 있다.  섹스의 오르가즘,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의 짜릿함을 즐기는 것이 육체적 쾌락이라면 말놀이의 즐거움이 문화적 쾌락에 해당한다.  육체적 쾌락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과 본능이지만 문화적 쾌락은 문화적 코드를 이해할 때에만 즐거움이 발생한다.  육체적 쾌락은 모든 사람과 공유할 수 있지만 문화적 쾌락은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함께 느낄 수 있다.  요즘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놀이 문화의 차이가 커지고 있는 것도 신구세대 간의 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그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기성세대에게 만득이 시리즈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육체적 쾌락은 일정한 조건을 만들어주어 체험하게 하는 것이고, 정신적 쾌락은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를 활용하여 ‘문화적으로’ 기획되고 프로그램화되어야 한다.  오락산업이 주로 jouissance에 의존하는 방식(놀이공원, 테마파크)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보편적이고 손쉽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jouissance는 자극이 반복될수록 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X-스포츠의 등장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하긴 일상 생활 자체가 롤러코스터나 진배없이 위험하고 불안정한 시대니까.) 세대별 계층별로 문화적 차이를 즐기는 것과 함께 세대간 계층간에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에 기반한 놀이 문화의 발전시키는 기획은 우리 사회의 공동 문화적 기반을 확충하고 사회적 통합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7)새로운 놀이 공간으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
   사이버스페이스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놀이 공간이며 노동 공간이다.  노동과 놀이의 대립을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삶의 틀을 구축함에 있어 사이버스페이스는 필수적이며 가장 중심적인 영역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예컨대 놀이공원 같은 물리적 공간보다 훨씬 손쉽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놀이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아주 쉽게 일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스위치 OFF로 쉽게 일상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쌍방향성과 능동적 참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창조적 표현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다.  요컨대 훌륭한 놀이터이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이용하여 즐겁게 놀거나(게임)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고(인터넷, 가상현실), 새로운 관계맺기를 실현할 수도 있으며(채팅), 현실의 일상과 놀이를 연결할 수도(사이버 거래, 예약) 있다.  사람들이 가진 창조적 에너지와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진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터이다.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가 하는 것은 단지 ‘잘 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틀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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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5-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총총

그런데 여러가지 생각거릴 던지네요. (생산성-효율성)에 경도되어 정말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것도 모르는- 이렇게 (생산-효율) 도그마에 다시 빠져서야... ... 우리가 가진 다중성, 다가성 가운데 점점 늘려야될 것은 무엇일지? 

조금은 다르지만 다른 '놀이' '여가'에 대해 생각이 덧붙여져 흔적을 남깁니다.

1.

자본은 출발선에 대해선(정규-비정규-실직)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생산성-효율성)의 측면에서 '여가와 놀이'를  목놓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가장 큰 투자거리임을 알아차려 '개질'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시간관리'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합니다.

효율화되지 않은 우리에게, 일에만 맹목정진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효율과 생산성이란 두마리의 토끼를 잡아줄 것처럼 흥분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일'을 중심으로 '여가'와'시간관리'라는 의식에 협공당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인 것은 아닐까요?  자본의 (여가와 놀이-시간관리)의 접근에 전적으로 부정은 하지 않습니다. 초창기 자본의 절약,근검성 만큼이나 전근대성이 보지 못하던 시야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니 맹목적인 부정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측면에서 전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시간관리'와 '여가'?인데, 무척이나 (생산성-효율성)이 높은 사람들이죠. 일과 관계망의 확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형 인간의 돌풍도 만들어낸 적도 있고,  그 덕에 다이어트 광풍을 몰고가고 있기도 합니다. 엇나간 경우 다단계 마케팅의 전도까지 있었지요. 아직도 암약하고 있을 겁니다.손님이 왔다는군요. 다시...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 그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  너무 아쉬운 것은 그 관점의 꼭지점, 성공이란 무엇인가? 어떤에 대한 합의나 노력,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고싶은 것, 꿈, 해야될 것 사이의 꼭지점( 그 꼭지점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과 상투적인 것일 확율이 크죠.)에 대해 '자본'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나본 여러 전도사님들도 아쉽게도 이에 대한 물음에 진지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도일지 모르겠지만, 그 꿈이 나눠지지 않고 아파지지 않고서는 그냥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자본'의 전도사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학교든, 사회라는 영역이든, 일터든

3. 더욱 더 무서운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통해  (생산성-효율성)에 집착한 '성공'이란 습속이 내면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세상에서 배운 그것이 고스란히, 김교수님이 이야기한 '놀이'라는 것은 조금도 배여있지 않은 채, 초등학교라는 블랙박스를 통과한 결과, 그 '성공'이란 훈련된 녀석만 툭 튀어나오더군요.

4. 사회활동 역시(자의적인 판단이겠으나..넘 냉소적인가요) (생산-효율-경쟁)의 틀내에서 운영되는 것 같아 아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실무력, 대응력에는 점수를 주겠으나 장기적 안정성, 녹아들기에선 점점 세상의 생리를 닮아가는 듯한, 한몸에 두 머리를 보는 듯한, 전혀 다른 버전이 감싸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읽으면서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학교급식 제보 잇따라…부실한 학교급식 그 원인은?
하니Only 김미영 기자
▲ 문제가 된 광주 동아여고 3월21일 저녁 학교급식 사진.
[관련기사]

광주광역시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급식으로 제공된 ‘계란탕’을 소개한 <한겨레> 28일 기사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뜨거웠다. 기자의 메일함에는 학교 급식의 문제점을 성토하는 독자들의 제보가 빗발쳤다. ‘부실한 급식’ 제보는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경기 광명과 이천, 강원 춘천, 경북 안동, 경기 이천 등 전국에 걸쳐서 제보가 쏟아졌다.

<다음>, <네이버> 등의 포털에도 학교급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나 사진이 올라왔고, <한겨레> 기사엔 수천건의 댓글이 달렸다. 한 누리꾼의 제보가 발단이었지만, 부실한 급식으로 ‘속앓이’하고 있던 학생이 한 둘이 아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학교급식은 700여만명에 이르는 성장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음에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식중독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고, 영양 균형과 위생에 대한 문제제기도 잦았다. 지난 6일과 7일 전북 완주와 대구의 고등학교에서 식중독이 발생하는 등 학교급식은 맛과 영양을 떠나서 ‘식중독’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부실한 급식은 성장기의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식사의 즐거움’을 맛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재정이 부족하다, 급식 대상 인원이 많다는 게 되풀이되는 변명이었다.

“반찬 최악이고요. 맛도 이상해요. 돈가스 줄 때는 한 개도 안되는 사이즈를 반 잘라서 줍니다. 김치는 빠지는 날이 없고, 왜 반찬이가 국에서 무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 건지. 감자는 제대로 깎지 않고 밥에서는 양파망이나 나사 같은 것도 나와요.”(경북 구미의 ㄱ중·고등학교)

“식판과 숟·젓가락이 제대로 닦이지 않는 날이 많아요. 하루 급식비가 2200원꼴인데, 24일 저녁 메뉴가 잔지국수, 밀쌀밥, 참치김치볶음, 고구마맛탕인데 참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오죽하면 선생님들도 밖에서 밥을 먹겠습니까.”(인천광역시 ㅇ고등학교)

<한겨레>에 접수된 학교급식 제보를 종합해 보면 허술한 식단과 식자재 관리말고도 인스턴트·반조리식품이 거의 매일 메뉴에 오르고 있었다. 2000원 안팎의 급식비를 받지만 학생들 다수는 ‘1천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실한 식단’이라는 불만을 쏟아냈다. 단무지, 카레라이스, 라면과 떡볶이, 무국이나 파국 등 급식메뉴는 대동소이했다.

중소 급식회사 중간관리자라고 밝힌 이는 ‘계란탕’ 급식원가를 따지면서, 국산 포기김치가 Kg당 1400~1800원임을 감안하면 배식된 양이 100g 남짓이어서 140~180원, 만두처럼 보이는 냉동식품 150원, 오이무침인지 무말랭이 100원, 밥은 정부미를 쓰기 때문에 200원, 계란탕 140원(계란 90원, 국물 50원)으로 최대 800원을 넘기 힘들다고 분석했다. 이 제보자는 “98년 학교급식을 추진하는 초기부터 지켜봤는데, 문제는 예산부족을 빌미로 위탁급식이라는 정책을 만든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 학교급식 ‘불만’ 끊이지 않는 배경엔?

수백~수천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급식은 “모든 학생의 입맛에 메뉴나 맛을 맞추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급식 관계자의 설명처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위생·청결’, ‘식재료·음식의 종류’가 도마에 오르는 것은 문제다.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현행 ‘학교급식법’ 시행규칙은 △조리실·식품보관실 면적과 시설·설비 기준 △조리 및 급식설비·기구의 기준 외에 학교급식공급업자에게 △식품의 조리·가공, 포장·운반등 급식을 위한 전과정이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 △식품재료는 다양한 종류의 자연식품(안전성 확보된 가공식품 일부 사용 가능)을 사용할 것 △염분·유지류 또는 식품첨가물 등을 과다하게 사용하지 말 것 등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감시하고 개선을 유도할 만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미흡한 실정이다.

시행규칙은 급식 과정에서의 불만과 민원을 해소하기 위해 7인 이상 15인 이하의 학교급식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지만, 위원 구성을 학교장이 하도록 하고 있다. 학교급식위원회가 학교장의 재량권 안에 있는 까닭에 효율적 감시와 비판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학교급식제정및조례제정운동본부, ‘학교급식법 개정과 조례 제정운동’ 진행

학교급식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던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이원영 보좌관은 이번 일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학교급식비 지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저질 식재료가 납품이 되고, 인스턴트·반조리식품이 식단에 오르는 것”이라며 “정부와 정치인들이 부실급식이나 식중독 문제가 터져 나오면 말로만 해결하겠다고 했지 실질적 개선책을 내놓지 못해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학교급식소위원회가 참여업체 선정이나 식재료 구입과정에 참여해야 하지만 학교장이 자기 사람을 심으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라며 “업체를 선정할 때도 단순히 금액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나 검증이 된 식자재를 납품할 수 있도록 수의계약 등의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우리농산물 사용, △직영급식 전환, △무상급식 확대 등이다. 이는 지난 2003년 발족한 학교급식법개정과조례제정을위한국민운동본부(운동본부)가 급식문제 해결을 위해 내건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다. 운동본부는 그동안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전락시켜온 잘못된 급식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과 함께 학교급식법 개정안을 구체화했다. 그러나 현재 최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1년 가까이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국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그 사이 ‘알탕 같은 계란탕’ 메뉴가 급식의 이름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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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3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해도 심해도 저 계란탕은 정말 심했네요. 휴==333
교사들이 학생 식당에서 밥을 같이 안 먹는 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교사들을 줄 서서 먹으라고 하거나,
새치기해서 먹으라 하기도 그렇고.
부모들은 도시락 싸주기 싫다고 하고...
학교마다 차이가 많아서 그것도 그렇고요.
자꾸 옆구리를 찔러서 좋아지도록, 교사도 학부모도 관심을 갖고 싸워야겠죠.
저도 다음주부텀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애들 식당에 가보려 합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식당에 가보게 된다면 더 나빠지진 않겠죠?

해콩 2006-03-3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부터 도시락을 싸다닌답니다. 그야말로 소박한 밥상이죠. 쌈장 한 종지랑 김이나 풀종류 조금 그리고 잡곡밥 ^^.

저희반 애들한테도 도시락 싸다니라고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는데.. 버릇이 안되어 힘든가봐요. 그냥 나처럼 대충~ 싸다니면 되는데 엄마가 안 싸주신다거나 무겁다거나 그러면서 급식은 맘에 안들어고하고..

급식으로 인해 아이들의 먹거리가 획일화되는 것도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급식의 질을 아무리 높여도 식재료의 문제점이나 대량으로 조리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점도 극복하기 힘들거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학교에 사물함 있으니 책가방도 그렇게 무겁진 않을 거고.. 두끼 다 도시락이 힘들다면 한끼만 싸와도 훨 건강에 좋을텐데... 도시락 까먹는 재미도 쏠쏠하고.. ^^ 옛날 생각 나네요.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급하게 도시락 까먹던..

글샘 2006-03-3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엔 해콩쌤 근무하는 학교로 가야겠군요.
쌈장 좀 뺏어먹게.ㅎㅎㅎ

해콩 2006-03-30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젠가 우연히 같이 근무하게 되면...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걸요. 쌈장이 문제겠습니까? 밥도 나눠드리죠. ^^

BRINY 2006-03-3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신입생들이 그래도 우리 학교 식당은 좋은 편이라고 하는거군요. 그나마 맨날 점심, 저녁으로 먹다보면 3학년때는 지겨워 하던데요. 결국 매점 매상만 올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