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아, 스승의 날 주변이면 제발 우리 교사들을 욕하지나 말아 다오.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게 학생 탓이랴


올해부터 서울지역 초중고 학생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교총에서 스승의 날을 자율휴업일로 정한다고 정한 게 작년 일이니 초·중·고교 교장협의회의 발표는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이 날만 되면 촌지수수 등 교육부조리 문제가 거론됨으로써 오히려 교권이 떨어지고 교직사회의 신뢰가 추락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는 데 이해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냉소적이 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공식 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부터 금지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진지한 발언이다.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어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논리는 자명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스승이란 불필요하게 높은 단어다. 교사만으로도 충분하고 많은 사람들은 종종 그 단어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면 교사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소정의 자격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럼 일반적인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별 거 아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 그걸 내가 억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너 개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직업에 어울리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준을 강화하고 교육을 시키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고 부적절한 인물들을 솎아내는 것이지,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르게 강요하고 지킬 수도 없는 기준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권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스승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환경 속에서 정상적인 직장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일에는 단계와 한계가 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건 노력과 실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스승의 은혜’가 강요하는 기준이 불가능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습관적으로 낭송하지 말고 그 가사를 한 번 의미를 되새겨가며 읽어보라. 황당하기가 무협물 주제가 같다.

교사는 존경받을 필요 없다.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존경받는 교사가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건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교사가 인격적으로 뛰어나다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그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 적 없고 노인네들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지금의 우리 학교는 정반대이다. 존경의 대상이 없는 시스템 속에서 존경에 대한 강요와 자화자찬만이 존재한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스승의 날’, 제발 교사 욕이나 하지 말자...


오늘 아침 한겨레 신문에 실린 이 글을 두고 말이 많다.

물론 학교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독재>와 <군국>의 망령이 춤추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그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 놓고는 불안한 부모 마음이야 어느 나라라고 다르랴만,

한국에서처럼 <촌지>, <치맛바람>이 존재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글을 쓰는 필자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스승의 날을 만들어 두고, 그 날 주변만 되면 온갖 매체가 <교사>라는 핫바지 저고리를 두들겨 패는지... 심히 불편하고 우울한 일이다.


학교가 신뢰받는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지 못한 데에는 분명 교사들의 잘못도 크다. 그렇다고 ‘스승의 날’을 만들어 두고 교사 집단을 매도하는 데에는 ‘합리적 비판’ 이상의 ‘과장된 기대’가 담긴 것이나 아닐는지...


민중의 신문 ‘한겨레’조차 이토록 교단을 비하하고 폄훼하는 기사를 싣는 행태는 정말 슬프다. 아무리 자기네 사람이 아니라고 발뺌하더라도, 신문사 기고문은 ‘신문사 취지에 맞는 글’이라는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서는 실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런 욕지거리에 가까운 것을 기사라고 싣는 일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스승의 날 행사를 하면서 꽃 한 송이를 가슴에 받는 일은 조금 쑥스럽지만, 아이들이 부르는 스승의 은혜 노래는 매년 가슴 찡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교사 아닌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그렇다고 그 노래를 <금지>하게 하자는 발상은 정말 <독재, 군국주의> 시대의 잘못된 교육이 낳은 산물이 아닐까?


솔직히 나도 스승의 날이면 찾아가고 싶은 선생님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더 쓸쓸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선생님이 어디 근무하는지 알지만, 찾아가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 다닐 때, 남학교에서의 폭력은 얼마나 일상적인 일이었던지... 그렇지만, 내가 교사가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결코 저런 교사가 되지 않겠다는 것.’ 그런 열정으로 사범대학을 다녔고, 18년째 교사를 하고 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이런 것을 교사의 기준이라고 만든 필자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폭력>의 잔상이 남았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소설가 씩이나 되었다는 사람이 이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은 잘못이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논지를 전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저런 험악한 용어로 도배하는 것이 기준이라면, 필자가 교사를 욕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이렇게 원흉이 많아서야 세상 살겠나?


아, 이런 글을 읽다 보니, 그리고 그 글에 머리가 아프다 보니...

그나 나나 참으로 <불행한 시기>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불행한 학교를 그대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증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북한>에 대한 증오를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이 땅에 태어나서,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며> 자란 폭력적인 세대다.

그래서 진정한 원흉을 보지 못하고, 눈 앞에 거슬리는 것을 증오하게 되는 것 같다.


선거 철이 되면 전라도를 증오하고, 경상도를 증오한다. 보라색을 증오하고, 파란색을 증오한다. 내 머릿속에도 그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증오하는 대상이 있어서, 증오하지 않는 대상을 찍을 뿐이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교권 회복이란 말을 이 사람도 알고 있었구나...

교권이 회복되어야 함을 이 사람도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교사들의 권리만이 아니다.

이 사람, 심각하게 아픈 사람이다. 그의 회복을 빈다.


그리고, 교권 회복보다 중요한 일은, 학교 교육을 정상화 시키는 일이다.

그 일은 작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사의 힘에 기대는 것이지만,
크게는 국가 교육과정의 차원에서 거론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 관료들의 복지부동과, 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무관심 앞에서,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화두로 붙잡고, 교육부와 싸우고, 그들에게 호소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이다.


한국 학교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지나치게 삽질이 많다.(삽질은 불필요한 일을 무능하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속어다.)

불필요하게 암기를 하고, 반복 학습을 한다. 그것이 사교육의 정체다.

학교의 교육과정과 수업 시간을 대폭 축소하여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교사의 시간당 투입 수를 늘리고,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폐해는 <교수 투입>을 늘리려고 할 뿐이지, <학습>이 늘어나도록 힘쓰지 않는 것이다.

1주일에 한 시간 배우는 과목을 없애고, 집중적으로 몇 과목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교육 과정 전반을 수정하는 큰 일이다.


교사를 <새 鳥>같이 보는 시선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삐뚤어진 눈 때문에 학교 교육을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아, 스승의 날 주변이면 제발 우리 교사들을 욕하지나 말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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