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김창남 - '논다는 것'에 대하여

‘논다는 것’에 대하여

김창남(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1.‘논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논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 문명의 창조성을 놀이 활동으로부터 도출하는 호이징하의 개념(Homo Ludens)을 빌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노는 인간’이며 과거에 놀았고 지금 놀고 있거나 앞으로 놀 인간이다. 놀이(형식화되어 있는 좁은 의미의 놀이가 아니라 ‘논다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놀이라고 부른다면)는 인간의 삶에서 피해갈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놀이의 형식과 방식은 한 두 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우리가 ‘논다’는 말과 관련된 활동이나 현상, 개념들을 얼핏 떠올려보기만 해도 ‘놀이’의 개념이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다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논다’는 말은 예컨대 여가, 노름, 오락, 휴식, 농담, 대화, 수다, 게임, 장난, 구경, 감상, 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의 활동을 의미하기도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killing time)이기도 하고, 심지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doing nothing 이것도 어떤 의미의 활동이다)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놀이 활동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다면 일하지 않는 것, 비노동 혹은 비생산의 상태라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논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노동’과의 상대적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흔히 놀이를 ‘무가치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우리가 ‘노동’을 가장 가치 있는 활동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쓰는 ‘놀고 있네’라는 말에는 생산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으로서 ‘노는 것’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다.  ‘노는 것’이 즐거운 것은 오직 노동을 전제로 할 때이다. 노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가 흔히 백수라 부르는)에게 논다는 것은 단지 악몽일 뿐이다. 

   그러나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사람은 ‘일하기 위해’ 산다는 관념이 성립된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랜 옛날 자연의 생명력만으로 충분히 인간이 먹고 살 수 있던 시절에 인간들은 일하지 않았다. 일정한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이 시작되었지만 이 때의 인간들은 단지 필요한 만큼만 노동을 했을 뿐이며 그 외의 시간은 노동 이외의 활동(즉 넓은 의미의 놀이)에 바쳐졌다.

   고대사회에서 노동은 결코 ‘신성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천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 아닌) 노예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삶은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중세 기독교 문화에서 노동은 신이 내린 형벌이었다(“너희는 고된 일을 함으로써만 양식을 얻게 되리라--창세기”). 노동을 찬미하는 것은 당연히 신에 대한 모독이었고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가를 보장하고 이를 어기면 엄벌에 처했다.  1700년 경 프랑스의 일반 평민들의 비노동일은 연 160일 정도였고 18세기 중엽의 기록에 따르면 연간 180일 정도 일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말하자면 일 년의 반 이상을 놀며 지낸 셈이다. 근대 사회를 이룬 신흥 부르조아지들은 이렇게 게으른 평민들을 비난하면서 노동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근대 부르조아 혁명은 가톨릭의 반노동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 이데올로기의 승리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동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고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근대 사회에 와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노동권’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그에 대응해 ‘여가’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토지로부터 쫓겨 나온 농노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노동자로 재편되어 갔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구원의 방식이며 자기실현의 형식이며 부와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노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기보다 노동을 위한 장치, 즉 재생산(recreation)의 메커니즘으로 이해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부각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잉여생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가치를 확장해 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노동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착취를 필요로 하며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노동 이데올로기’이다. 노는 자, 게으른 자를 소외시키고 벌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사회 구성원을 일정한 기간 동안 숙련된 노동력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천부의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사회주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노동의 개인성과 자기실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가치 증식을 꾀했다면 사회주의는 노동 자체를 규범화하면서 생산력 증대를 위한 집단적 에너지로 삼았다.  요컨대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근대사회를 이끈 것은 노동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노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는 것’은 최악의 경우 죄악이고 최선의 경우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은 노동시간을 무한정 연장하게 되고 그 결과 노동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 결과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문제가 중대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고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를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마르크스의 사위였던 라파르그(Lafargue)가 ‘게으름 부릴 권리’라는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 1883년이다.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놀 권리’의 확장을 위한 역사였다.

   기술의 발전은 노동과 놀이를 둘러싼 이같은 길항관계에 새로운 상황을 가져왔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게 되면서 천부인권으로서의 인간의 노동권은 위협받게 된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끊임없는 ‘고용의 불안정’ 상태에 놓여있게 되는 것이다.  생산된 부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필요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라 해도(분명 그렇지만) 그 부는 구성원 전체에 분배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부의 수준은 올라가더라도) 여전히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라는 사회 구성이 유지되며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실업보다는 차라리 과다한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노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고용의 불안정은 직장에 남은 자에게는 과로를, ‘노는 자’에게는 빈곤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에 예속된 노동 이데올로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이른바 시장과 효율의 원리를 구현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시장논리와 효율주의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고용은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노동자들은 더욱 더 노동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IMF사태로 늘어난 실직자들에게 ‘노는 일’은 끔찍한 고통을 의미하며 직장을 잃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은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설사 과로를 하는 한이 있어도 실직보다는 낳은 것일 수밖에 없다. 기술발전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은 줄어들지만 그것이 다수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소수 사람들에게 ‘과점’시키면서 나머지를 항구적인 주변부 노동자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양극화의 과정에서 이른바 20 : 80의 사회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IMF의 해법으로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했던 것은 이러한 비극을 예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닿아있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 나누기가 실현되든, 20 : 80의 사회로 가든, 이제 ‘노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노동보다도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노동거부’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테제는 바로 그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2.‘개미와 베짱이’ 신화의 역전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 우화를 통해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스런 노동(학생에게 노동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공부를 의미한다)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 참고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노동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것,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노동 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신세대에게 이런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한낱 낡은 윤리 교과서 마냥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아이들은 서슴없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개미보다 지금 놀고 있는 베짱이를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아이들의 타락한 윤리관 때문도 아니고 당장의 쾌락을 제공하는 대중매체의 영향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미의 윤리관으로 지탱되어온 사회가 분명한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IMF사태는 그 극적인 파탄을 대변한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을 얻어 열심히 일해도 아주 쉽게 ‘정리해고’될 수 있다는 것, 즉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수고가 결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아이들은 IMF사태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거기다 문화산업(혹은 오락산업, 요컨대 노는 것과 관련된 산업)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아이들은 열심히 ‘노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끝내 정리해고되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열심히 노래부르며 논 베짱이는 잘 나가는 신세대 스타로 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이다.

   개미의 ‘미래를 대비하는 근면한 노동’보다 베짱이의 ‘현실을 즐기는 재미있는 삶’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선택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노동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사회적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원적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의 총량은 줄고 있거나 적어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인데 반해 노동력은 (인구 증가, 수명 연장 등에 의해) 증가한다.  만일 현재와 같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노동 이데올로기가 유지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노동할 수 있는 소수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악몽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일찌감치 노동의 신성함보다 놀이의 즐거움을 선택하는 사람(그리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재와 같은 시장 구조에서는 ‘놀이의 즐거움’조차도 결국은 소수의 승리자를 향한 엄청난 경쟁의 시스템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보다 베짱이를 선택한 사람의 수는 늘어나지만 그 가운데 ‘잘 나가는 스타’로 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처럼 모든 분야에서 마이너리그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는 것조차 ‘모 아니면 도’식의 양극화된 길을 밟게 된다.  서태지처럼 뜨거나 라면만 먹다 좌절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악몽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전망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영역이며 변수로서 고민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어떻게 잘 놀게 할 수 있는가, 죄의식이나 좌절감이나 심적 고통 없이 즐겁게 놀 수 있게 하는가, 노동의 재생산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노는 것 자체로서 의미 있는 삶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는가, 노동만큼 놀이가 삶의 가치 실현이며 보람이며 자기 구원일 수 있게 하는가, 등등의 문제들은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에 필수적인 고민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3.놀이의 주체와 형식

   내가 언어학자가 아니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놀다’라는 말과 ‘놓다’ 그리고 ‘낳다’라는 말이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산’ ‘창조’의 의미를 가진 ‘낳다’가 물건을 위치시킨다는 의미를 가진 ‘놓다’라는 말과 같은 말임은 예컨대 경상도에서 아이를 ‘낳다’는 말을 ‘놓다’고 발음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놓다’라는 말과 ‘놀다’라는 말은 형태상으로도 그렇고 ‘위치를 갖게 하다’와 ‘움직이다’라는 의미의 상관성으로 보아도 같은 말에서 파생한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생산과 창조를 의미하는 ‘낳다’와 ‘놀다’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내가 굳이 전공 분야도 아닌 언어학적 추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노는 것이 사실은 생산과 창조의 의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놀이는 생산 활동에 대한 기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다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짐승을 사냥하는 일과 농사짓는 일을 흉내내면서 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춤과 노래는 사냥과 노동 같은 그들의 ‘노동’을 담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놀이는 생존을 위한 일상적 삶(노동)을 ‘낯설게’ 재현하는 행위였다.  ‘흉내내기’ 혹은 ‘낯설게 하기’는 놀이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이는 이후 역사속에서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의 놀이 형태들을 만들어내며 가지치기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두 가지 지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하나는 놀이하는 주체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놀이 자체의 산업화(혹은 상업화)이다.  물론 이는 모두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노동에 대한 통제와 조직화를 통해 유지된다면 그 노동의 조직화는 일정한 방식으로 놀이를 제공하고 통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10분간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50분간의 노동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휴식(즉 놀이)은 철저하게 노동 시간을 중심으로 편제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벗어난 일상의 삶은 사실상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마치 마이더스 왕의 손처럼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벗어난 일상의 삶조차 철저히 상품화한다.  노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오락과 휴식은 상품화한 형태로 제공되며 사람들은 이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놀이를 ‘소비’한다.  돈 없는 사람은 놀 수도 없는(혹은 노는 것에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놀이에서도 다시 한번 소외되어야 하는 것이다. 

   놀이가 상품의 형식을 가지게 되면서 놀이의 방식과 놀이 주체의 형태도 변화하게 된다.  과거의 놀이가 주로 ‘체험’과 ‘참여’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놀이는 많은 부분 (참여 아닌) ‘구경’과 ‘소비’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놀이의 주체에서 놀이의 객체로 변하게 된 것이다.  노동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적 구성에서 놀이는 비창조적인 것이며 짧은 시간에 해결해야할 욕구이다.  그것은 탐구하고 창조하기보다 주어진 프로그램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결국 놀이 주체의 객체화란 노동 중심 사회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에 와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면서 놀고 싶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여기에는 여가와 소득의 증대, 사회적 가치의 변화 등 많은 요소들이 관련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노동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적 편제로는 충족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주체적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남의 노래를 듣기보다 노래방에 가서 스스로 목청껏 노래부르고 싶어한다.  백화점의 문화교실은 스스로 무언가를 체험하고 만들어보고 싶은 주부들로 넘쳐난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하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과거의 어느 세대에 비해서도 ‘주체적으로 놀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디지털 혁명, 즉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기술은 이들의 그런 욕망에 날개를 달아준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은 쌍방향성이다.  이는 TV같은 대중매체가 대다수의 사람들을 구경꾼을 만들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구경꾼일 뿐 아니라 작가이며 생산자이며 송신자이다.  뿐 아니라 컴퓨터와 인터넷은 노동과 놀이의 구분 자체도 애매하게 만든다.  많은 신세대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게 놀면서 돈을 벌고 있거나(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나지 않았는가) 돈벌이를 꿈꾼다.  요컨대 이제 놀이는 노동이라는 절대적 영역과의 연관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하며 가치있고 창조적인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4.잘 놀기 위하여

   이제 ‘논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하다가 남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며 놀아도 그만, 안 놀아도 그만인 여분의 활동도 아니다.  놀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노동만큼 중요한 삶이며 어쩌면 노동보다 더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  이제 잘 놀지 않으면 삶 자체의 가치나 보람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 개인은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하는 전망과 함께 어떻게 노는 시간을 관리하며 즐겁게 놀 것인가에 관한 기획을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개인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노는 인프라’를 구축해 내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노동에 투입하는가 못지 않게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잘 놀 수 있도록 하는가가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제이며 정책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 ‘논다는 것’에 대한 진지하고 과학적인 분석과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영역에 바쳐진 만큼이나 무게있는 학술적 연구가 쌓여야만 노는 것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잘 노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가능하다.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연구가 폭넓게 시도되어야 한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을 위한 아주 작은 시론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잘 놀기’를 위해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개념적 전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새로운 발상과 아이디어, 방법론, 이론화 등을 위해 의미있는 단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자유, 자율성, 주체성
  자유롭지 않으면 그것은 노는 것이 아니다.  참여를 강요당하는 놀이, 의무가 된 놀이, 중독된 놀이는 결코 즐거울 수 없다.  완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시작되고 언제든 자유의지에 따라 그만둘 수 있을 때 놀이는 즐거운 것이 된다.  기업이나 단체의 수련회가 즐겁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 경마나 노름에 중독된 사람에게 그것이 즐거움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는 늘 1인칭의 주체(나 혹은 우리)에 의해 선택되고 향유되며 중지될 수 있어야 한다.  ‘놀고 싶은 사람’이 ‘놀고 싶을 때’ 놀아야 ‘노는 것’이다.  특히 주체성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노는 것에서도 끊임없이 자본을 주체화하고 사람을 객체화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그물망을 온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내’가 노는 것이고 즐기는 것이지 ‘자본’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최소한의 자의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노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놀아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남아돌아도 스스로 놀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 메커니즘 속에 스스로 들어감으로써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구성하고 갈무리하는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자본의 공세에 투항한다.

(2)탈일상, 탈노동 혹은 일상의 낯설게 하기
   논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일상에서의 탈출, 특히 노동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스트레스 해소니 기분 전환이니 현실 도피니 하는 것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노동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탈일상, 탈노동의 시공간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안겨 주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가 노동과 일상에 속박된 우리의 삶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오래 동안 대중 오락의 현실도피 기능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기구의 역할을 한다고 비판받아온 까닭이 그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이런 식의 비평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반성과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논자에 따라서는 대중 오락의 현실도피 기능이 오히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침윤을 막는 보호막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놀이의 의미를 탈노동에서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노동 중심의 삶의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탈(脫)이라는 부정적 개념의 도움없이 놀이 자체를 긍정적 의미로 재구성하는 방법은 없을까?  놀이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를 낯설게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상을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즐겁게 반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3)평등한 공간으로서의 놀이--탈위계 혹은 위계의 역전
   등산을 가면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는 역전된다.  산에서는 산을 잘 오르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가진다.  놀이의 의미는 이처럼 일상적 위계를 벗어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놀이라는 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일상의 신분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놀이 자체에 대한 지식(문화자본)으로 만나게 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노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로 보면 놀이는 모든 사회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평등의 영역’이다.  적어도 ‘평등’에 가까울수록 놀이는 재미있는 것이 된다.  직장 상사와 함께 가는 노래방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노래방이 더 즐겁다.  물론 문화자본의 차이는 존재한다(예컨대 노래 잘부르는 사람과 못부르는 사람).  이 때 문화자본의 경제자본으로의 이전가능성이 적을수록 놀이는 다수에게 즐거운 것이 된다.  즉 돈이 걸려있지 않을 때, 혹은 현실적 위계와 관련이 없거나 현실적 위계가 역전될 때(노래방에서 점수가 낮을수록 메리트가 주어지는 경우), 놀이는 즐거운 것이 된다.

(4)비생산, 비효율의 즐거움
   놀이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경제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 아니다.  돈이 걸려 있는 놀이 형태도 있지만(경마, 도박 등) 이 경우에도 한 쪽의 돈이 다른 쪽으로 이동할 뿐 총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생산성, 효율성 등의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적어도 생산성에 대한 강박, 효율성에 대한 강박이 적을수록 놀이는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도 경쟁은 존재한다.  놀이에서의 경쟁은 일상과 노동세계에서의 경쟁과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놀이에서도 일상의 경쟁 논리를 적용하곤 한다.  그럴 경우 놀이는 쉽게 재미를 상실한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놀이도 경쟁적으로 하려하고 그만큼 잘하기 마련이지만 경쟁 논리가 작용하면 할수록 참여자 전체에게 부여되는 즐거움의 총량은 줄어든다.
  
(5)창조성, 역동성, 변화가능성
   경제가치를 생산하지 않더라도 놀이는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이다.  노는 것에도 분명 일정한 정도의 자기 투여가 필요하다.  그 투여되는 에너지는 노동활동에 투여되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일정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조적이다.  놀이 활동에는 노동 활동보다 많은 상상력이 허용되거나 요구된다.  또 놀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노동, 특히 대량 생산 체제하의 노동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반복하는 과정이지만 놀이는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가진다.  대개의 놀이는 처음 소란, 무규범의 상태로 시작되지만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일정한 규칙과 형식을 갖추게 된다.  물론 그 규칙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고스톱 규칙의 무한한 변형들).  주체적 욕구에 따른 변화가 용이할수록 놀이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놀이가 아니다.

(6)육체성과 정신성
   놀이에는 육체적인 형식과 정신적인 형식이 있다.  양자는 상보적이다.  예컨대 육체노동자는 정신적 놀이의 즐거움을, 정신노동자는 육체적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다.  쾌락에는 육체적 본능에 가까운 쾌락(jouissance)과 정신적(문화적)으로 구성된 쾌락(plaisir)이 있다.  섹스의 오르가즘,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의 짜릿함을 즐기는 것이 육체적 쾌락이라면 말놀이의 즐거움이 문화적 쾌락에 해당한다.  육체적 쾌락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과 본능이지만 문화적 쾌락은 문화적 코드를 이해할 때에만 즐거움이 발생한다.  육체적 쾌락은 모든 사람과 공유할 수 있지만 문화적 쾌락은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함께 느낄 수 있다.  요즘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놀이 문화의 차이가 커지고 있는 것도 신구세대 간의 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그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기성세대에게 만득이 시리즈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육체적 쾌락은 일정한 조건을 만들어주어 체험하게 하는 것이고, 정신적 쾌락은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를 활용하여 ‘문화적으로’ 기획되고 프로그램화되어야 한다.  오락산업이 주로 jouissance에 의존하는 방식(놀이공원, 테마파크)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보편적이고 손쉽게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jouissance는 자극이 반복될수록 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X-스포츠의 등장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하긴 일상 생활 자체가 롤러코스터나 진배없이 위험하고 불안정한 시대니까.) 세대별 계층별로 문화적 차이를 즐기는 것과 함께 세대간 계층간에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에 기반한 놀이 문화의 발전시키는 기획은 우리 사회의 공동 문화적 기반을 확충하고 사회적 통합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7)새로운 놀이 공간으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
   사이버스페이스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놀이 공간이며 노동 공간이다.  노동과 놀이의 대립을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삶의 틀을 구축함에 있어 사이버스페이스는 필수적이며 가장 중심적인 영역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예컨대 놀이공원 같은 물리적 공간보다 훨씬 손쉽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놀이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아주 쉽게 일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스위치 OFF로 쉽게 일상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쌍방향성과 능동적 참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창조적 표현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다.  요컨대 훌륭한 놀이터이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이용하여 즐겁게 놀거나(게임)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고(인터넷, 가상현실), 새로운 관계맺기를 실현할 수도 있으며(채팅), 현실의 일상과 놀이를 연결할 수도(사이버 거래, 예약) 있다.  사람들이 가진 창조적 에너지와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진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터이다.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가 하는 것은 단지 ‘잘 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틀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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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5-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총총

그런데 여러가지 생각거릴 던지네요. (생산성-효율성)에 경도되어 정말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것도 모르는- 이렇게 (생산-효율) 도그마에 다시 빠져서야... ... 우리가 가진 다중성, 다가성 가운데 점점 늘려야될 것은 무엇일지? 

조금은 다르지만 다른 '놀이' '여가'에 대해 생각이 덧붙여져 흔적을 남깁니다.

1.

자본은 출발선에 대해선(정규-비정규-실직)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생산성-효율성)의 측면에서 '여가와 놀이'를  목놓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가장 큰 투자거리임을 알아차려 '개질'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시간관리'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합니다.

효율화되지 않은 우리에게, 일에만 맹목정진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효율과 생산성이란 두마리의 토끼를 잡아줄 것처럼 흥분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일'을 중심으로 '여가'와'시간관리'라는 의식에 협공당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인 것은 아닐까요?  자본의 (여가와 놀이-시간관리)의 접근에 전적으로 부정은 하지 않습니다. 초창기 자본의 절약,근검성 만큼이나 전근대성이 보지 못하던 시야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니 맹목적인 부정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측면에서 전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시간관리'와 '여가'?인데, 무척이나 (생산성-효율성)이 높은 사람들이죠. 일과 관계망의 확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형 인간의 돌풍도 만들어낸 적도 있고,  그 덕에 다이어트 광풍을 몰고가고 있기도 합니다. 엇나간 경우 다단계 마케팅의 전도까지 있었지요. 아직도 암약하고 있을 겁니다.손님이 왔다는군요. 다시...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 그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  너무 아쉬운 것은 그 관점의 꼭지점, 성공이란 무엇인가? 어떤에 대한 합의나 노력,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고싶은 것, 꿈, 해야될 것 사이의 꼭지점( 그 꼭지점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과 상투적인 것일 확율이 크죠.)에 대해 '자본'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나본 여러 전도사님들도 아쉽게도 이에 대한 물음에 진지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도일지 모르겠지만, 그 꿈이 나눠지지 않고 아파지지 않고서는 그냥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자본'의 전도사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학교든, 사회라는 영역이든, 일터든

3. 더욱 더 무서운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통해  (생산성-효율성)에 집착한 '성공'이란 습속이 내면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세상에서 배운 그것이 고스란히, 김교수님이 이야기한 '놀이'라는 것은 조금도 배여있지 않은 채, 초등학교라는 블랙박스를 통과한 결과, 그 '성공'이란 훈련된 녀석만 툭 튀어나오더군요.

4. 사회활동 역시(자의적인 판단이겠으나..넘 냉소적인가요) (생산-효율-경쟁)의 틀내에서 운영되는 것 같아 아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실무력, 대응력에는 점수를 주겠으나 장기적 안정성, 녹아들기에선 점점 세상의 생리를 닮아가는 듯한, 한몸에 두 머리를 보는 듯한, 전혀 다른 버전이 감싸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읽으면서 궁금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