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우리는 수목원 코디네이터…하루 일과는 나무와의 대화
2006-03-09 18:18 | VIEW : 38
우리는 수목원 코디네이터…하루 일과는 나무와의 대화

[세계일보 2006-03-03 00:21]    





광릉 국립수목원 한쪽에 마련된 온실. “쏴∼쏴∼” 이곳저곳으로 물 뿌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새내기 수목원 코디네이터 박미정(21·여)씨는 온실의 여러 화초에 물을 주고 주변을 청소하느라 분주하다.

오후엔 실외에 있는 나무들에 필요한 갖가지 일을 해낸다. “사실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은 그다지 바쁘지 않아요.

꽃피는 봄이 오면 수생원이나 습지원 관리 등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 꽤 기대하고 있어요.”

간단한 일 같지만 어떤 꽃은 잎이나 꽃에 물이 닿으면 안 되기에 물을 떠놓아 아래에서 스며들도록 하고,

꽃이 핀 나무는 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뿌리 쪽으로 물을 뿌리는 등 이래저래 마음 쓸 일이 많다.

축축한 데서 자라는 고사리는 물을 듬뿍 줘야 잘 자란다고.


우리는 수목원 코디네이터


원예학을 전공한 그를 비롯해 올 초 국립수목원에 둥지를 튼 수목원 코디네이터 10명이 하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길을 찾거나 수목원 방문 절차를 묻는 관람객의 문의 전화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방문객 명단을 작성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때론 곤충 표본을 학명에 따라 정리하거나 채집한 종자의 분류학상 소속과 이름을 정하는 ‘동정(同定)’이라는 전문적인 일도 한다.

이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린 박미정씨는 평소 좋아했던 나무의 사계절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는 게 가장 기쁘단다. 대학과 전공을 고를 때에도 식물원이나 수목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일하는 모습을 먼저 그렸다. 여러 사설수목원에 지원했으나 올해야 그 꿈의 첫발을 내디딘 박미정씨처럼 수목원 코디네이터는 모두가 숲과 자연 그리고 사계절을 가꿔갈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박미정씨의 대학 동기인 박미진(26·여)씨가 수목원코디네이터가 된 이유도 예사롭지 않다. “사무실에 앉아서 뭘 하기보다 자연에서 흙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에요. 같은 과 친구들은 플로리스트로 많이 진출하지만 너무 흔하잖아요.”

국립수목원을 비롯한 공·사립 수목원이 올해부터 시작한 수목원 코디네이터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산림청이 내놓은 제도. 올해 국·공·사립 수목원에 35명이 배치될 예정이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여. 보존과(3명)·표본과(3명)·조사과(3명)·관리과(1명) 등 각자 소속과 하는 일이 다르지만, 이들이 그리는 미래도 나무를 주제로 한 칼럼니스트(강지희), 학예사(김현숙), 식물분류학 관련 연구원(고은미, 김혁진) 등 천차만별이다.

지난해 식물분류학 석사를 받은 뒤 인턴 연구원으로 1년 동안 일한 김혁진(29)씨는 2년차 국립수목원 식구. “사실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배우는 데에는 끝이 없잖아요. 학교에서 식물분류학에 한정해서 배웠는데, 전공 분야가 다양하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여러 학문을 접할 수 있거든요.” 김혁진씨의 바람은 전문 연구직. “지금 하고 있는 일도 하찮은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식물 연구에 푹 빠지고 싶습니다.”

천리포수목원 수목원 전문가 양성과정 4기로 1년을 보내고 수목원 코디네이터가 된 김회원(25)씨는 국내에는 생소한 수목원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 “전문적인 연구 분야에서 종사하기보다 가지치기, 번식, 식물 분류 등 수목원의 모든 것을 익히고 싶어요.”

계약기간 1년,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손에 쥐지만 이들에겐 김회원씨처럼 각자 돈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 대중교육을 담당해 교육 프로그램을 짜는 강지희(26·여)씨는 “돈 욕심을 버리고 보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며 “원래 식물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고집이 아니라 아집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운을 뗀다. 아집 탓인지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강지희씨 역시 몸 편하고 보수가 그나마 나은 시공 설계 회사도 버리고 ‘식물쟁이’를 고집한 것. 그는 “외래종이 많은 천리포에 비해 국립수목원에는 설립 취지에 맞게 토종 식물이 대부분”이라며 “영화 ‘편지’를 보고 막연히 수목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일이 업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간사, 환경영향평가 관련 회사 등 이력이 다양한 김혜련(26·여)씨는 “환경영향평가를 주업으로 했을 때 월급은 많았지만, 자연이 좋아서 일을 시작한 애초 동기와 달리 잘못된 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역할의 한계에 답답했다”고 털어놓는다. 산림자원학을 전공한 그에게 환경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사무실보다 자연에서 일하기를 원했고, 지금 수목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박물관 경영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서만 2년째 일하고 있는 맏언니 김현숙(34·여)씨는 “산림청에서 꼼꼼하게 계획을 짜서 코디네이터 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도 “근무 조건도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전공 관련 분야에서 자기 경험을 쌓아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제도”라고 평한다. 조사과 소속 박물관에서 일하는 그 역시 학예사의 꿈을 다지며 수목원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에게 맑은 공기와 향긋한 풀내, 흙 냄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에너지인 셈.

햇볕 따사롭고 알록달록 꽃들이 만발하는 봄이 오면 관람객들은 이들의 소박한 정성으로 잘 단정된 수목원 곳곳에서 봄 내음을 맡겠지만, 하루하루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이들의 봄은 바로 오늘일지도 모르겠다.


글 정재영, 사진 황정아 기자 sisleyj@segye.com


ⓒ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부를 어떻게 사랑하지?
어른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아이들도 달라집니다
  안준철(jjbird7) 기자   
오래 전에 담임을 맡았던 한 제자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지난 1월에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 노량진 고시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아마도 오랜만에 영어 공부를 하다가 제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수업시간에 1형식 2형식 설명하실 때 제대로 한번 들어서 공부 좀 해둘 껄 이런 후회가 좀 들었습니다. 평소 공부에 취미도 없던 제가 남들처럼 5시간 자면서 나머지 시간 공부에 매진한다는 게 쉽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부해야하지 그런 공부요령 등 또한 2년 정도 해서 안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들로 처음부터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고등학교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공부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편지를 다 읽고나자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제자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면 시간을 내어 영어 기초라도 다시 잡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인 모양이지요. 어쨌든 저는 편지를 보내온 제자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러 답장을 썼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단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부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지. 모든 일이 그렇잖아. 좋아하고 즐기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게 되어 있지.'

이 편지를 받은 제자는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조금은 이상하게 들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고 아직은 세상 물정을 몰라 공부를 게을리 했던 과거 학창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 처지에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이 조금은 낯설고 한가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공부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기 시작한 것은 편지를 보내온 제자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뒤늦게 속을 차리고 대학에 가기 위해 도서관에 박혀 공부를 하는데 처음에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느라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어느 날인가 영어문장을 해석하던 중에 갑자기 몸과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영어 자체라기보다는 해석된 문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영어독해 예문은 대체로 저명한 작가의 책이나 논문에 실린 명문장이었기에 사전과 씨름하며 어렵사리 문장을 해석하다보면 마치 흙 속에서 보석이라도 캐낸 듯한 그런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 서너 시간 수면을 취하고 온종일 공부를 해도 피로한 줄을 몰랐던 것이지요. 그 후로는 차츰 다른 과목들도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흥분과 희열 속에서 날밤을 세우곤 했습니다.

저는 명절 때 어린 조카들을 만나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공부를 사랑해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너무 당연하고 너무 익숙하다보니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새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마나한 말이 되고 말지요. 하지만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고 낯선 표현이기에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공부를 사랑하라고? 공부를 어떻게 사랑하지? 이렇게 말이지요.

이런 심리적인 효과도 노릴 수 있지만, 지식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공부를 오래 지속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라톤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마라톤 선수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과도 같은 이치이지요. 실제로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상위권을 유지해오던 학생들이 고3이 되면서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십중팔구는 공부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짧은 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령, 운전면허증을 딴다든지 타이핑 속도를 늘린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십 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하는 학교 공부는 일류 대학입학이라는 한 가지 목표의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이 년도 아니고 십 년 이상을 공부에 몰두해야 하면서도 공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가정했을 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결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즘 대안학교에 대한 말이 무성한데 대안학교와 일반학교와의 차이점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대안학교의 최대 관심사라면 일반학교에서는 그런 배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부 그 자체보다는 시험 점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제도권 학교의 현실이지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학교에 갇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으니까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나 교사의 생각이 달라지면 아이들도 달라집니다. 얼마 전에 저는 올해 대학졸업반이 되는 아들과 잠깐 짬을 내어 산을 찾았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아내의 부탁도 있고 해서 임용고사를 눈앞에 둔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을 할 뻔하다가 다행히도 이렇게 말을 고쳐서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열심히, 아니 공부를 사랑해라. 너무 임용고사만 생각하지 말고 그 후에 네가 학교에서 만날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공부해라. 네가 배우는 지식이 결국은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필요한 지식이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네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대는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마쳤다. 그동안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라는 구호를 당연한 말인 양 받아들였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아실현의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대에게 타자는 더불어 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대상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대는 노동의 가치를 능멸하는 반교육적 환경에 있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그대가 이미 ‘나를 배반하는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말하고 있지만, 그대는 공교육 과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민주적 시민의식과 공공성의 가치관을 형성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이 땅의 뒤틀린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아무리 사회 구성원들이 물신주의에 오염되어 경제동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기본을 농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신체제 시절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덟 분에 대한 재심이 결정된 이 시간에도 우리는 참담한 역설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의 후광을 입은 사람이 걸핏하면 국가 정체성을 문제 삼는 적반하장이 관철되고 있지 아니한가.

민주적 시민의식과 공공성의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채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의식마저 지닌 그대는 앞으로 대학에 입학하든 아니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갖는 대신 오직 소유를 위한 집착에 머물기 쉽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비판정신과 인문정신을 함양하는 대신 토익점수, 학점, 취업준비에 매몰되기 쉬운 것이다. 또 그대는 앞으로 ‘탈정치’를 자랑스럽게 말할지 모른다. 그것이 그대가 혐오하는 정치를 온존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점조차 모른 채.

젊음에겐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사회정의에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오염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자유로운 활보가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젊음은 언제나 희망의 근거다. 사회 양극화에 관한 말만 무성할 뿐, 그것을 극복하려는 구체적 행동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서게 된 그대에게 시대에 불온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젊음이 우리 희망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불안을 지배의 주요 기제로 하는 사회일수록 자유와 저항은 그 자체로 불온이다.

수능을 마친 그대에게 우리 현대사를 공부할 것과 함께 두 가지를 간곡하게 당부한다. 첫째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는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에게 압박해 올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물질과 보이는 것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부디 ‘세계와 만나는 창’인 책을 벗하라. 둘째는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려는 경쟁으로 자기성숙의 과정을 마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허용된 삶의 길이에 비하면, 수능은 아주 작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일생 동안 오직 두 번 긴장한다. 대학입시 때 한번, 그리고 임용이나 취직할 때 한 번의 두 번뿐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자신의 삶일진대, 부끄러움은 없고 뻔뻔함이 판치는 사회에서 젊음은 이 시대에 ‘불온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펌 (2005-07-13 20:25:28, Hit : 433, Vote : 3
제목

 인간성에 호소한다 / 홍세화


서울대 2008 학년도 입학전형을 놓고 집권세력과 서울대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초동진압’을 하겠다는 발언까지 나오고, 서울대에서는 교수협의회와 평의원회까지 나서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은 집권세력의 신자유주의 기조와는 모순되지 않는 것인지, ‘대학은 산업이다’라는 발언이나 경제관료의 교육부 장관 임용, 또는 돈받고 인문학을 파는 행위엔 침묵했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똟어보는 안목을 가지고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여 그 바탕 위에서 행동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할 때, 서울대의 자율과 학문의 자유는 지성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논술이 본고사다, 아니다”란 논의는 ‘3불정책을 지키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계속해온 교육부의 기회주의의 산물이다. 그런 차원을 떠나서 볼 때, 논술은 그 자체로는 옳은 방향이다. 논술이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고 인문정신과 비판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오늘날 중고교는 쓰기와 읽기 중심의 교육을 할 준비가 돼 있지 못하고, 학생들은 이미 내신과 수능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다. 서울대가 제기한 통합교과형 논술은 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서울 강남의 고급 학원 중심의 사교육을 부추기게 될 것이 뻔하다. 또 특목고 열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의 첫 질문은 어린 사회 구성원들을 잠도 못 자게 할 만큼 억압하고 심지어 자살로까지 몰아가면서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다수 구성원들에게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일찍부터 열패감을 안겨주는 한편으로,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명문대학이 사회적 책임의식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양성하는가?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학 서열구조 아래서는 사회 공공성을 높일 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진 교육자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 학교 출신들이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보여준 역사적 사실도 그렇거니와,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사교육비를 투자했기 때문에 보상심리가 작용하는데다, 사익을 추구하는 특권의식을 견제할 수 있는 힘과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논란 당사자들 또한 거의 모두 내로라하는 교육자본을 갖고 있지만, 모두 기회주의적이거나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종종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서울대 등을 방어하기 위해 프랑스의 그랑제콜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랑제콜은 분야별로 분산되어 수적으로 ‘벌’(패거리)을 이루기 어렵고, 횡적으로 연결된 평준화된 국립대학들이 버티고 있어서 견제된다. 또한 권력학교와 학문학교의 구분 아래 그랑제콜에서는 학위를 주지 않고 대학에서만 학위를 받을 수 있다.

또 대학 서열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국가 경쟁력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바탕을 두고 자기성숙을 모색하고 실천할 때 그 결과로 획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논술의 방향은 옳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 서열체제를 그대로 둔 채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려는 수단이 돼선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논술을 요구하는 철학을 배반하는 행위다. 모든 이의 인간성에 눈물로 호소한다. 기득권 시각을 버리고 대학 서열체제 극복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자. 무엇보다 어린 사회 구성원들을 이 무지막지한 질곡에서 구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를 위하여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어린시절 필자에게는 한 가지 헷갈리는 일이 있었다. 늘 선생님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의 청소년이 존경해야 할 사람인 카를 마르크스의 평전을 읽었을 때 그의 삶은 ‘착한 아이’의 모습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들도 ‘잘나가는’ 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린 채 젊은날을 ‘쓸모없는’ 철학 공부로 보냈다가 빚더미에 앉은 망명객이 돼버린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자본론〉을 쓰고도 자신의 자본은 못 만들었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의 그러한 ‘탕아 행각’도 만만치 않았지만 부모의 허락도 없이 급진파 유대인과 약혼함으로써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준 그 부인 예니의 행동 또한 불효막심이 아니었던가? 예니의 이복오빠가 독일 내무장관이 되었어도 예니는 망명지 런던에서 태어난 아이의 요람을 살 돈이 없었고, 아이가 일찍 죽어도 관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탕아들끼리 평생 그렇게도 행복했다는 것이었다.

150년 전의 유럽 유산층에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길로 가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일처럼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은 월인천강, 하나의 달 그림자가 천 개의 강에 비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인 경쟁주의·출세주의는 부모의 마음에 내면화해 가정마다 ‘학업 장려’와 같은 미명 아래 자행되는 폭력의 원동력이 된다. 아이에게는 자기 스스로의 꿈을 꾸어볼 여유도 없이 부모의 꿈은 곧 아이의 꿈이 되고 만다. 입시 전쟁에서 패배하면 ‘불쌍한 무능아’ 아니면 ‘부모의 은혜에 보답 못하는 배신자’가 되는 줄 알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전쟁 준비’에 몇 해를 허비하는 것은 기본이다.

꼭 그걸로 끝나지도 않는다. 서양음악을 아이에게 시켜야 상류층이 된다는 ‘통념’을 익힌 부모들이 “신분 상승을 도모하라”는 사회의 절대명령대로 음악과 별 인연도 없는 자녀에게 악기 공부를 무리하게 시키는가 하면, “조기 유학을 안 보내면 안 된다”는 새로운 ‘상식’대로 부모 곁을 떠날 마음도 없는 불안한 아이들을 억지로 이역으로 떼어 보낸다.

사회가 강권하는 이런 폭력의 결과는 무엇일까? 평생토록 부모에 대한 원망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아이의 심신을 파괴시킬 수도 있으며, 또 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찾아내 사고하거나 표현할 줄 모르고 남을 따르기만 하는 세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작은 개발독재와 같은 ‘가국’(家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인격을 지키고 싶다면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능하겠는가? 뜻이 굳건한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겠지만 그에게는, 효도를 아직도 엄숙한 최고 덕목으로 주입시키는 사회에서 150년 전에 카를과 예니가 겪은 고뇌보다 한층 더 심각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역설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내세우는 부모라 해도 자신의 자녀가 마르크스처럼 행동할 경우 마르크스의 아버지보다 더 강경하게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수능날에 시험장에서 벽이나 문에 기대어 열심히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 필자는 감동되기는커녕 답답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내 아이가 암기 경쟁에서 남을 잘 눌러 올라서서 승리하기를”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하셨듯이 (부모의 의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 종교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