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를 싫어하는데 하기는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학연수 갈 생각은 해본 적이 없고 외국에 살고 싶었던 적도 없고 내 나라가 제일 편하지- 라고 생각해왔다 (쓰고보니 좀 꼰대 같은가...). 다들 유학 준비를 시도하길래 토플까지는 어떻게 했으나 GRE는 단어 외우다가 도저히 못하겠다 싶어 그만뒀다. 외국 사람과의 로맨스는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 어학원에서 외국인 강사가 나는 한국에서 IT 공부 해보고 싶어서 왔는데 너네 대학이 영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아- 라고 핑계를 대길래, 약간 어이없어서 너가 한국어를 배워보면 어때? 라고 했더니 '너가 가르쳐 준다면' 이라면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와서, 겸사겸사 그 뒤로 학원을 끊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플러팅도 아니고 서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나는 다락방님처럼 사교적이지 못하다. 이 성격이 외국어를 배우는 데 상당히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것 같다.
나에게 영어는 새로운 기회나 즐거움이 아니고 언제나 '쪽팔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고 지금도 그렇다. 업무상 외국인들과 교류해야 할 일이 많은 편인데, 발표나 이메일로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할 수 있지만 (이메일은 ChatGPT 덕분에 많이 편해졌다) 화상으로 회의를 하거나, 발표 후 질의응답 시간이 오면 긴장할 수 밖에 없다. 대답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잘 못 들으면 미안한데 다시 말해줄래? 라고 물어봐야 해서 괴롭다. 일 얘기만 할 때는 사용하는 어휘가 한정적이라 그나마 괜찮은데 일 대충 끝나고 일상 대화할 때가 되면 더 괴롭다. 오래 같이 있어서 음식 얘기 가족 얘기 이런 거 다 하고 나면 책이나 영화 얘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대화에 끼기가 정말 힘들다. 그들은 다 읽어봤을 거라 생각하는 책인데 내가 제목도 못 들어본 책 (고전류)도 있고... 이야기하다가 너 이거 읽어봤니? 아니. ... 어색한 침묵 그리고 갑작스런 화제 전환. 이럴 줄 알았으면 어학 연수를 고민해봤을텐데...
지난주 수요일엔 모르는 외국인들과 만나서 일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므로 일상 대화를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지만 아직 발표 자료만 대충 준비한 상태로 아이가 일요일 밤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월요일 휴가, 독감 확진되어서 화요일도 휴가. 집사2는 바빠서 수요일에는 꼭 휴가내라고 윽박지름. 애 하나에 고양이 두 마리 시중들다보니 자료도 더 고쳐야 하고 스크립트도 써서 몇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좀처럼 나질 않았다. 결국 한글로 대충 써서 ChatGPT에게 번역해 달라고 한 스크립트를 읽어보는데, 내가 쓴 게 아니라서 입에 더 안 붙고 외워지지도 않았다. 학생일 때는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파워포인트에 대본을 함께 보여주는 '발표자 모드' 라는게 생겼으므로 파일에 스크립트를 붙여서 겨우 출장을 갔다. 전날 잠은 한 세 시간 잤나... 어찌어찌 기차타고 가면서 읽어본 게 기억에 남았는지 발표는 대충 했고 초면이다보니 별로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아서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왔다. 기차타고 오는데 어찌나 피곤하던지... 성심당에서 빵 사들고 타서 종착역까지 꿀잠을 잤다. 지나고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동안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결국 내가 걱정한 건 '쪽팔리는 것' 이었던 거다. 그냥 나 원래 못해! 라고 당당하게(?) 하면 될텐데 그건 못하고 그렇다고 미리 준비도 못하고... 그런 내가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다.
(가슴에 사무쳤는지 이렇게 길게 장황하게 쓴 것 좀 봐...)
그런데 그쯤이었나, 요즘 핫한 드라마 '이 사랑 통역되나요?' 를 보다가, 어? 나 알아들었어! 의 경험을 하게 됐다. 영어는 아니고 일본어였는데, 다음주에 집사3과 일본으로 여행가려고 (일본어 못하는데 잘 다녀왔었지만) 작년부터 듀오링고를 둘이 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가면 일본어도 배운다고 하고, 미리 알아두면 좋지 뭐? 하면서 나름 모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사실 히라가나를 못 익혔다. 익힐 생각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는 듀오링고에서 알파벳으로 된 발음 표기를 보면서 그걸 일본어랍시고 회화를 하고 있는건데... 뭐 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지 않나? 이전에 히라가나를 외우려고 몇 번 시도해보았으나 암기는 너무 힘들었다. 여튼, 이런 식으로 글자는 못 읽으면서 회화 진도만 나가던 와중,

여기서 찍은 장면 중 히로가 'きれい' 라고 하는 게 딱 들렸다. 사실 난 이 글자는 못 읽고 ㅋㅋㅋ 듀오링고에서 kirei 로 본 건데, 어쨌든 깨끗하다 / 예쁘다, 아름답다 의 뜻을 갖고 있는 단어다.
자막을 보기 전 그 단어가 귀에 들리는 경험을 하면서, 되게 기뻤고 근 두 달간 듀오링고를 해온 보람을 느꼈다. 그저 한 단어 알아들었을 뿐인데... 이런게 외국어를 배우는 즐거움인가?! .... 글자는 못 읽지만 또 이렇게 알아들어도 되잖아, 뭐 어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친구가 최근 한 언어를 더 하면 내 세계가 더 넓어지지 않을까? 라며 디지털 대학 실용회화과에 등록을 했다길래, 그것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근근히 살아오긴 했는데 앞으로도 한 20년은 더 책도 읽고 돌아다니고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원래는 북클럽 안식년에 충실하고자 원서 읽기 북클럽도 그만 하려고 했는데, 좀더 해볼까 생각하게 되었고, 영어는 여전히 싫지만 그래도 외국어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전에 다락방님이 좋다고 하셨던 책 (이미 갖고 있다)도 읽어볼까 싶다.
야심차게 전자책을 다운로드 해보았지만 역시 암기는 싫다...
종이책이었으면 그래도 펴보기라도 했을텐데 (라고 핑계를 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