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과 3월 두 달에 걸쳐 함께 읽기로 했던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이틀 넘겨서 완독했다.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22년 1월이었고, 한 번 멈췄더니 다시 손이 가지 않아서 '이러다 못 읽겠구나' 했는데 다른 분들과 함께 읽은 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다. 느슨하나마 함께 한다는 것은 힘이 된다. 먼저 완독하셔서 용기를 주신(?) 햇살과함께님 감사드리며 곧 다른 분들의 글도 올라오길 기다리겠다.
보부아르의 논지가 집약된 1권은 감명깊게 읽었다. 1949년이란 시기 (프랑스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지 얼마 안된) 에 이렇게 논리를 확립하고 책을 낸 보부아르 너무 똑똑하고 멋진거다. 2권은 1권에서 주장한 여성의 현실 상황에 대해 (많이) 자세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1-3부는 예시가 매우 자세하여 그것을 세세히 읽다보면 지금 이 예시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망각하게 되면서 (...) 기계적으로 읽게 되곤 했다. 저번에도 썼지만 2권의 상세한 예시들은, 여성보다는 여성을 이해하고 싶은 남성이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느낀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막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며 역시 이 언니 너무 멋지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 이 두꺼운 책을 기꺼이 완독할 만큼 여성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남성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지만.
2권의 2부 마지막쯤에 가서는 지쳐갔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거야? 언제까지 이 조금 아는 이야기가 이어지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을 때쯤에는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하는 생각만 들었고.
3부 '정당화' 에서는 세 유형의 여성 (사랑에 빠진 여자, 나르시시즘의 여자, 신비주의 여자) 분류를 통해
'타자로서 머물러 있기를 강요하는 세계에서 주체의 불가능한 자기실현의 시도가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지를 보여준다' (해제 중, 1004쪽)
라고 하는데, 단순히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에도 약간 의문이 있었지만 이 부분의 내용은 잘 공감이 안 되었다.. 2부 마지막에서 '여성 조건의 경제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재성의 한가운데서 자기의 실존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 경우를 3부에서 이야기하겠다고 했는데, 현재는 이미 '여성 조건의 경제적 변화' 가 약간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파트에 비해 3부의 내용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하기에 좀 무리있는 내용이 많지 않았나 싶다.
1부 다음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해방을 향해' 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4부, 14장 '독립한 여자'였다. <제2의 성>이 부담스럽다면, 1부와 4부, 결론만이라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많이 길지 않고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 힘들지 않다.
4부를 읽으며 가지고 있던 질문은 2부 마지막쯤에서 생각한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였고, 그래서 인상깊었던 부분은 이 부분이다.
그녀에게는 자기가 임의로 가장 어려운 길을 도맡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자문한다. 여자는 부단히 자기의 결심을 새롭게 일신해야만 한다. 그녀는 자기 앞에 하나의 목표를 곧게 세우고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녀의 걸음걸이는 소심하고 불확실하다. ... 그러므로 그녀는 그만큼 더 우아하고 경박하게 보이려 전념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도약을 억제한다. ... 그녀는 힘을 쓸데없이 쓰지 않고 아껴 두겠다고 결심한다. ... 그녀는 인내와 근면에만 성공의 기회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특히 약간의 창조성이나 독창성, 어느 정도의 사소한 발상을 요구하는 연구나 직업에서 그런 타산적인 태도는 해롭다. ... 지나치게 성실한 여학생은 권위에 대한 존경과 박학다식의 무게에 눌린 나머지 시야가 가려져서 비판적인 감각과 지성을 죽여 버린다. ... 신중함은 평범함이 되어 버린다. 여자에게서는 모험이나 무상의 경험을 하려는 취미, 사심이 없는 호기심을 발견하기 어렵다. ... 이런 방법으로는 명예로운 이력을 실현할 수는 있어도 위대한 행동을 실현할 수는 없게 된다. ...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오늘날의 여자에게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잊는 것이다. (947-951)
보부아르가 생각하는 '초월'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실현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 이 '초월'은 남성적 사회에서 추구하는 성취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 물질적인 성공 같은 것은 이 '초월'의 의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보부아르는 학자였으니 공부와 관련한 성취를 자연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다양한 가치 혹은 현재의 상태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발전' 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이야기한 '도약' '새로운 일신' 이 꼭 그런 선형적인 개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도달해야 하는 '정도' 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태도에 가까운 것 같다. 눈치보지 말고 겸손하지 말고, 노력을 아끼지 말고, 꼭 해야 하는 일 말고 다른 것도 해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욕하지 않을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해 보자 라는 이야기인 것.
일정 정도의 자격을 갖춘 뒤, 그리고 특히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뒤에 나는 특별한 목표 없이 적당히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가정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이미 할만큼 했다는 생각으로, 쉽게 자기만족했다. 작년에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업계의 대충 희망' '진짜 희망이 나타나기 전의 대타 같은 희망' 이 되고 싶다, 그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작년 말 - 올해 초 쯤부터는 업계와 상관없이 그냥 좀더 내가 하고싶은 것을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현상유지하고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이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충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서, 더 이상 '나' 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좀더 잘 해보고 싶다라는 건 딱히 무엇을 성취하겠다는 것만은 아니다. 북플에서 '읽었어요' 그리고 별표 다섯 개를 누르고, 조금 더 한다면 문장 몇 개를 옮긴 뒤 내가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을 적지 않고 넘어가는 대신, 귀찮음을 무릅쓰고 머리를 굴려가며 뭔가 적고 넘어가겠다는 결심같은 것이다. (글을 더 잘 쓰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그것은 내가 눈치를 보느라 못 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의 한계이다-라고 주장해본다) 어쨌든 내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좋다.
<제2의 성>을 읽고 남성과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내가 '초월'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는 이야기만 하니 좀 핀트가 어긋나나 싶기도 한데... 내가 그런 내용을 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남성과 함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그에게 종속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그는 모르겠고 적어도 나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아이에게도 그런 생각을 이제 말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평안한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이 상태에서 '초월' 에 신경쓰려고 한다.
+ <제2의 성>을 읽고 두 권의 책을 더 읽어보려고 하는데, 하나는 보부아르의 평전이다. 이 책은 전에 사르트르와 계약관계를 맺는 부분쯤까지 읽었다. 보부아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았으니 <제2의 성>을 읽는데 사전 정보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2의 성>을 읽어보니 보부아르는 그 이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서 왜 <제2의 성>을 쓰게 되었는가까지는 읽었어야 되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이정순 번역가의 해제를 보면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쓴 이후 (사실 <제2의 성>에서는 학문적인 태도로, 약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좀더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고 한다. 몰랐던 사실인데 (...) '343 선언'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보부아르가 왜 '여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로 변모했는지 알고 싶고, <제2의 성> 보다 늦은 시기의 보부아르의 글도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 대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4월 읽을 책에 넣어놓질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