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과 3월 두 달에 걸쳐 여러분들과 함께 읽기로 한 <제2의 성>을 나는 작년 초 좀 읽다 말았다. 아마 1권의 제3부 신화 어딘가를 읽다 말았는데, 정확히 어딘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독서괭님 올리신 몽테를랑의 말을 보니 약간 익숙한 게 그건 읽은 것 같고 D.H. 로런스를 읽다만 것도 같다 (지금 책과 함께 있지 않다 ^^;). 



작년에 <제2의 성>을 읽을 때는 참고할 책도 없고 인터넷에 접속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래서 각종 고유명사와 모르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어 답답했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그런 거 찾아보느라 책 읽는 속도가 느리다) 그 중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실존, 초월, 내재... 뭐 이런 것들이었다.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는데 계속 나와... 그래서 다시 읽기 전에 이걸 좀 정리하고 갔으면 싶었는데 갑자기 내가 전에 사놓고 안 읽은, 공쟝쟝님이 그렇게 읽으라고 읽으라고 다른 철학 책 안 읽고 이거만 읽어도 일단 괜찮다고 하셨던 <페미니즘 철학 입문>이 떠올라 펴보니, 3부에 보부아르가 있다! 그래서 와- 이거 읽고 읽으면 되겠다! 하면서 신나서 시작한 게 2월 5일. 



일단 서문을 읽었다. 서문 읽어보니 너무 잘 읽히고, 좋고, 그래서 어느새 1장 <페미니즘 철학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가 또 읽고 (그러다가 오타가 있다고 투덜거리며 사진을 올렸다). 그동안 내가 의문을 가지고 있던 걸 쏙쏙 집어주시는게 너무 좋았다. 김은주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도 너무 쉽게 잘 풀어주셔서 좋았는데 이 책도 그런 거다. 그래서 안되겠다 그러면 어차피 3장까지 페이지 수도 별로 안 되니까 2장도 읽고, 3장까지 읽은 다음에 개운한 마음으로 <제2의 성>을 읽어야지! 했다. 그런데... 










(이 책도 좋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 여러가지 일이 있었는데 일단 저녁마다 주말마다 기절해서 자버리기도 했고, 아이 생일이 있어서 하루 휴가도 썼고,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도 해줬고, 책모임에서 뒤풀이 한다는데 약속해버려서 거기도 잠깐 가고... 하다 보니까 이번주가 되었다. 그래서 <페미니즘 철학 입문>의 3장은 오늘 겨우 다 읽었다... (사실 거의 다 읽은게 한참 전이고 마지막 몇 페이지만 오늘 읽음) 



<제2의 성>은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이 있길래 출퇴근하며 듣고 있다. 전에 한 번 읽어서 그런지, <페미니즘 철학 입문>에서 전체 맥락을 짚고 실존과 초월, 내재의 개념이 정리가 되어서 그런지 가끔 졸리지만 진도가 잘 나간다. 제2부 역사의 챕터 3 읽는 중 (이 챕터들은 왜 숫자만 있고 제목이 없는가). 물론 듣다보니 논리를 아주 치밀하게 따라가지는 못하고 대충 어어 그렇구나 하며 넘어가고 있다. 그게 당시엔 기발한, 골때리는 내용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라서, 그걸 이렇게 이렇게 하나하나 논리를 세워가며 따졌구나, 이 사람 정말 똑똑하다 하며 듣고 있다. 생물학적인 내용은 이제 좀 아닌 걸로 밝혀진 것도 있을 것 같은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고. 



사실은 <페미니즘 철학 입문> 3장 내용을 좀 옮겨 뒀다가 나중에 다시 보고 싶어서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엔 내가 궁금해했던 실존, 초월, 내재 뿐 아니라 <제2의 성>의 논지가 요약되어 있다. 물론 <제2의 성>을 스스로 읽고 이 논지를 깨우치면 좋겠지만, 보부아르는 천재고 책은 너무 두껍고... 좀 정리하고 가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제2의 성> 의 내용만이 아니라 김은주님의 해설도 좋다. 내 머릿속에 조금씩 단편으로 남아있는 페미니즘 책들이 꿰어 정리되는 느낌이다. 






실존철학의 기본 개념은 자유예요.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것이 실존철학이 던지는 질문이에요.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자신이 타자의 위치에 놓여있을 때는 자유롭지 못하고, 주체의 입장에 섰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정말로 보부아르가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자유의 개념입니다. 그 자유란 주어진 게 아니라 실존을 통해 참여를 해서 쟁취하는 거라고 했죠. (104)



남성들의 많은 작업들이 여성을 제2의 성, 즉 타자의 위치로 만들고, 이를 오랜 기간 여성들에게 내면화시키고, 또 그것이 사회 일반의 개념인 것처럼 만들었다는 분석을 1부에서 진행한다면, 2부에서는 그렇다면 그런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 자라나는가를 분석해요. (105)



이 책의 2부는 생생한 묘사, 실제 경험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있어요. 이런 걸 보면 '이게 과연 철학적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특히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이 굉장히 구체적인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서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실존'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가진 시간과 공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탐구이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철학적 성찰을 시작합니다. (106)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타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를 타자화함으로써 '인간'이 되었던 거죠. 이게 굉장히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실제로 남녀의 위치라는 건 언제나 비대칭적이라는 걸 밝혀냅니다. 이것이 페미니즘의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에요. 우리가 페미니즘을, 그 이론을 이해한다는 건, 남녀의 성차가 비대칭적인 상태이며 그것들을 교정하려는 어떤 시도가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라는 걸 이해한다는 거예요. (126-127)



그런데 여기에서 보부아르는 이런 질문을 던져요. '분명히 남녀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인데 여자는 왜 한 번도 저항을 안 하지?'... 다른 모든 곳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면 자기를 주체로 세우고 외부를 타자로 세우고, 이쪽이 주체면 저쪽을 타자로 세우는 쟁투관계라는 게 성립이 되는데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한 번도 투쟁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거죠. ... 여기서 보부아르는 페미니즘 운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 왜 그런가 생각을 해봤더니 "여자들은 타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다." ...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여성들만의 고유한 과거, 역사, 종교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노동자 계급처럼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연대감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같이 살지도 않는다는 거죠. ... "여자들은 주거-노동-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고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들의 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사이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다." (128-130)



보부아르는 여자들도 이 세계가 남자들의 손에 쥐여 있다는 것에 공모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여자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오래 쌓였으니까 사실 지치는 게 있다는 거죠. 조금 올라가기만 하려고 해도 너무 힘든 거예요. 사실 저는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그렇게 행복한 일이 아니라고 자주 말해요. 그렇지 않나요? (133)



페미니즘은 언제나 구체적인 이야기들에서 시작해요. '페미니즘이 철학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죠. 페미니즘 저서들을 보면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왜 그렇게 시작할까요? 추상적으로 접근하면 여자들이 벗어날 수가 없어요. 구체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지, 문제를 느끼고 바꿀 수가 있는 거죠. 그래야 구체적인 수단을 마련할 수 있잖아요. ...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의 출발은 여성들의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나요? 라고 할 때 '경험을 말하고 경험을 경청하라. 그리고 경청을 통해 우리는 페미니즘의 출발을 마련할 수 있다' 라고 하죠. 보부아르도 그래서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고요. (134-135)



페미니스트들은 이 세계에서 보편이라고 선언된 것들에 대해서 다시 물어요. ... 그래서 페미니즘이 급진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어요. 래디컬하다는 건 근본적인 뿌리에 대해서 말하는 건데,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가치가 사실상 남성의 지배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그걸 다시 검토하면서 시작하자는 거니까요. (136-137)



보부아르는 인간을 유한한 존재, 죽음 앞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극복하는,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초월의 존재, 기투(나를 던지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 자유를 완성하고 자유를 만들어가는 존재로서 보는 입장을 굉장히 중요하게 강조해요. (143)



우리는 자유를 어디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freedom의 자유죠. 그런데 보부아르가 봤을 때 '어떤 쇠사슬로부터 해방됐어' 가 자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새로운 것을 쟁취하는게 자유 liberty 예요. 누군가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건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거잖아요. 노예의 위치에 있었던 거죠. 노예의 위치가 아니라 자기 자유의 내용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게 자유의 기본이죠. 보부아르는 리버티라는 자유의 입장에 서 있는 거예요. (145)



남자들은 자라면서 자기가 주체가 된다는 것만 생각하지 타자로서의 경험은 없이 자란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부아르에 따르면 여성은 자기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이고 싶은 동시에 내가 타자라는 사실 사이에서 분열이 생기고, 거기에 시달린다는 거죠. (154)






... 너무 다 좋아서 다 옮기지 않는게 너무 힘들었다. 



(3장까지밖에 안 읽었지만) 

여러분, <페미니즘 철학 입문> 혹시 안 읽으셨으면 읽으세요. 꼭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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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2-16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철학 입문> 미리 사두어 다행입니다. 읽기만 하면 되겠네요^^; 다 좋아서 옮기기 어렵다는 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수하님 늦은 밤이라 내일 아침 정독할게요^^

거리의화가 2023-02-17 09:21   좋아요 2 | URL
오... 보부아르의 실존 철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셨겠어요. 다른 철학자들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데도 유용하겠습니다. 126~130페이지 인용문 특히 좋네요. 덕분에 저도 이 책 읽을 결심을 해봅니다.

건수하 2023-02-17 09:24   좋아요 2 | URL
화가님, 갖고 계시군요! 이 책이 아주 쉽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강의를 녹음해서 옮기신 건지 구어체라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밑줄 찾기는 힘든데,
개념잡기는 아주 좋았습니다 ^^

공쟝쟝 2023-02-16 2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하님이 좋아하셔서 또 나자신이 기특해요💕

잠자냥 2023-02-16 21:27   좋아요 2 | URL
북플앱 삭제하고 알림 끈 거 맞니?

건수하 2023-02-16 21:39   좋아요 1 | URL
자냥님/ 댓글알림만 보고 깜짝 놀랬네요 저보고 북플 삭제하라고 하신줄 ㅋㅋ

건수하 2023-02-16 21:39   좋아요 1 | URL
쟝님 이제야 읽다니.. 잘못했어요!!

햇살과함께 2023-02-16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게 만드네요!
제2의 성 읽으며 보부아르 부분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건수하 2023-02-17 09:25   좋아요 2 | URL
제2의 성 읽고 나서 정리하는 느낌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고,
미리 한 번 훑고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

햇살과함께님 제2의 성 시작하셨네요. 쭉쭉 나가보아요!

햇살과함께 2023-02-17 09:35   좋아요 2 | URL
쭉쭉 안나가네요:;; 이제 서문 읽었어요 주말에 열심히 좀 읽어야지요!

바람돌이 2023-02-16 2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즘 철학입문을 딱 작년 이맘때쯤 읽었는데 <제2의 성>읽기 전에 보부아르 부분은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페미니즘 철학입문>은 정리를 굉장히 잘해줘서 정말 좋았던 책이었어요. ^^

건수하 2023-02-17 09:26   좋아요 2 | URL
정말 정리가 잘 되어있더라구요. 저는 펀딩할때 샀는데 왜 이제야 읽었는지 넘 아쉬웠어요 ^^
3장까지 읽었는데 시간날 때 뒷부분도 틈틈이 읽어둬야겠어요.

페넬로페 2023-02-17 14: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철학입문 사 놨는데 병행해서 읽어봐야겠어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것을 다 알고 넘어가기는 제 지식의 부족이 많아 그냥 훌훌 읽고 있습니다.
일단은 완독이 목표라서요^^

건수하 2023-02-17 20:31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 그러니깐 재미있네요 ^^

은오 2023-02-17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읽다가 생각하는 여자에 보부아르가 있었나?! 하고 목차 보고 왔어요ㅋㅋㅋㅋㅋ하아 페미니즘 철학 입문을 사야 하나😭 제2의성 읽고는 있는데 제대로 이해한건지 아리까리할 때가 있어서 고민되네요 오늘도 책 샀는데 아악

건수하 2023-02-17 21:54   좋아요 1 | URL
전반적인 내용을 짚어줘서 이해가 잘 되긴 했는데.. 서론에 있는 내용을 좀 쉽게 풀어줬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 뒤로는 상세한 예가 많이 나오니 안 어려운 거 같아요 :)

난티나무 2023-02-19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철학 입문!!!! 저도 막 읽으세요 또 읽으세요 했던 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아직 다시 안 읽고 있…@@ ㅎㅎㅎ

건수하 2023-02-20 16:09   좋아요 0 | URL
저는 3장까지 읽었고 베티 프리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오드리 로드 2장 이렇게 4장 남았어요. 7월에 <성의 변증법> 읽을 때 또 2장 읽어야겠다 하며… 오드리 로드는 잘 모르는데 또 기회가 있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