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의 <착한 여자의 사랑>이 출간되기 전 운 좋게 받아 본 티저북이다. 단편집이라 티저북에는 <착한 여자의 사랑>이 아닌 <자식들은 안 보내>라는 단편이 실려있다. 제목만 듣고는 가늠이 되질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 읽었는데 처음에는 인물도 헷갈리고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그런 염려가 되었는지 출판사에서도 초반 부분을 잘 넘기면 새로운 내용이 펼쳐질 거라 안내하고 있었다.



 



호기롭게 카페에 들고 갔다 읽기에 실패했다. 책은 얇지만 카페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책은 덮어두고 케이크와 커피만 맛있게 먹고 왔지만 이 책을 도대체 언제, 어떻게 읽어야할지 조금 고민이 되기는 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버티다 가장 바쁜 시간(남편이 퇴근하지 직전, 나는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아이들의 귀찮음을 버텨야 하는 시간)에 책을 펼쳐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은 바쁜 시간을 홀라당 잡아먹고, 저녁 준비 시간도 완전히 늦추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 읽고 났을 땐 나도 모르게 "아, 이거 뭐지?" 라며 중얼거렸다.



 



이게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지금 브라이언이 누워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을 그 펜션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또한 그녀와 브라이언이 함께하는 삶의 표현이자 그들이 살고 싶었던 생활방식의 표현이었던 그 집과의 연결고리도 끊어졌다.


그녀, 폴린은 어느 바비큐 파티에 갔다가 연극에 출연해 보지 않겠냐는 제프리의 제안을 받는다. 어린 아이가 둘이나 있는 입장에서 참여한다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대본을 외우고 연습에 참여한다. 그리고 폴린의 가족과 시부모님이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 갑자기 찾아온 제프리의 전화를 받고 모텔로 돌아가 다시는 가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은 그 사실을 '대번에 믿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폴린과 제프리는 남편의 반응에 의아해 하면서도,


"그의 잠재의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다들 그렇게 알잖아요."


라는 폴린의 말에 '그렇게' 체념한다.



 



그녀는 그럴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댈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말을 하려고도 해봤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삶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마댓자루를 뒤집어쓰고 끈으로 묶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삶은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녀도 눈이 맞아 달아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충격적이고도 이해할 수 없게도 자신이 가진 전부를 포기해버리는 여자가 되려는 것이다.


그녀는 어린 아이와 남편을 떠나 제프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안나 카레니나가 했던 것이었고, 마담 보바리가 하고 싶어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브라이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 자신을 받아줄 거라 확신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 고꾸라지고 있었음에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마댓자루를 뒤집어쓰고 끈으로 묶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거라 여겼다.



지금 뭔가가 달려오고 있다. 트럭이다. 달려오는 것이 트럭만은 아니다-엄청나고 암울한 사실이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 그 사실이 난데없이 와버린 건 아니다. 줄곧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뜬 뒤로, 심지어 밤중에도 줄곧 잔인하게 그녀를 찔러댔다.



'줄곧 대기하고 있'던 무엇.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이 다를 뿐, 내가 폴린의 행동에 놀랐던 부분은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제프리에게 가서 다시 가족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행동에 스스로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머리에 마댓자루가 씌워졌다.'며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건 극심한 고통이다. 만성적인 고통이 될 것이다. 만성적이라는 말은 영원하긴 하지만 한결같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매 순간 느끼지는 않겠지만, 고통 없는 상태가 여러 날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 그 일이 그저 가슴 아픈 과거로만 남고 더는 현재의 것이 될 수 없을 때까지 그걸 끌어안고 살면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나는 그녀의 행동을 단절로 보았다. '줄곧 대기하고 있'던 무엇을 행동으로 옮기고 이전의 삶과의 단절. 그에 따른 고통은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려는 독단적인 '단절'로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봐라봐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마댓자루'를 써버리는 그녀의 단절이 가슴을 욱신거리게 했다. 그녀의 고통이 느껴졌고, 그 고통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각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스스로 모든 걸 등지는 모습이 슬펐다. 그러지 말았으면, 다시 돌아갔으면, 아이들 생각이라도 했으면 하는 섣부른 생각을 실을 수도 없었다. 그건 오로지 그녀만의 고독이자 단절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충고도, 아무런 걱정도, 아무런 안타까움도 내비칠 수 없어 가슴이 내내 욱신거렸다.



소설은 30년 전, 한 가족의 휴가지에서 시작해서 '그녀의 자식들은 성장했다'로 마무리된다. 그녀의 큰 딸 케이틀린과의 대화로 소설은 끝나는데, 폴린은 제프리와 '한동안' 살았음을 알게 되었고, 이후로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한 치의 망설임과 오차도 없이, 어떠한 환상이나 사랑의 달콤함 없이 극단적으로도 보이는 소설 <자식들은 안 보내>는 그렇게 가슴을 후벼 파고 내게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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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2-07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거 좋아해요. 부드러운 생크림이 있어서요.^^

안녕반짝 2018-12-10 10:53   좋아요 0 | URL
그죠? 한 번 맛보고 나니 생크림 케이크만 먹게 되더라고요^^
딸아이 데려가면 혼자 저걸 다 먹습니다.^^
 

 

 

- 알라딘에서 2018년 통계를 내주었다.

어제 주문한 내역은 포함이 안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나 많이 주문했을 줄이야!


분명 요즘에 책이 너무 많아져서 최대한 늘리지 않고 있었는데,

통계를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7월 이후로 좀 애쓴 티가 보이지만 9월에는 왜 그리 많은건지!



노력해도 책 조절은 안 되는구나!

그냥 지금처럼 살자! ㅋ


내년에는 또 얼마나 사고 읽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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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18-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놓을 데가.....빌려 보자...로 바꿔타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카알벨루치 2018-11-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0.5% 던가 그렇던데 이참에 확 질러서 0.1%로 달려볼까요? 싶지만....그것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솔로몬의 격언을 떠올려봅니다 ㅎㅎ열독 응원합니다!!!
 
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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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아버지가 어린 학생에게 소리치는 것을 목격했다. 학생은 버스정류장 전광판에서 노선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전광판이 안 보인다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학생은 무안해서 정류장을 벗어났고 할아버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한 아주머니께서 학생한테 나오라고 좋게 말하지 왜 그렇게 뭐라고 하느냐고 한 마디 하자 할아버지도 맞받아치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광경과 내가 보아온 몇몇 일들이 겹치면서 노인들은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너그럽지 못하는지 내심 못 마땅했다. 나도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 노인이 되겠지만 내가 보아온 노인들의 모습으로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스스로 살아 온 세월의 결이라 여겼다.


늙은이는 공격적이고 언제나 저기압이다. 81쪽

이 문장을 보며, 저자 또한 노인이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워하며 이유 없이 마음이 옹색해 지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일상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피로한데 의외로 정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놀랐다.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 짐작하고 덤벼들었지만 내가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겼고, 생각하고 싶은 문장에 메모지도 붙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글이 너무 솔직해서 마음을 열게 되었고(그 나이가 되면 숨길 게 없어지는 걸까, 아니면 저자만의 개성일까?), 끼니마다 맛이 상상이 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저자를 보면서 엄마 음식이 생각났다.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53쪽

박찬일 작가는 ‘음식은 추억과 기억의 매개체인 게 분명하다.’고 했는데 이 문장과 함께 내 어릴 적 기억이 얽히면서 음식에 관한 여러 추억들이 떠올랐다. 엄마가 해주던 팥묵이며 명절이면 집에서 만들었던 유과, 무조건 밥 말아 먹었던 시레기국까지. 임신 중에 엄마의 시레기국이 먹고 싶어 장장 7시간을 거쳐 친정에 내려왔던 일과 결국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일들이 떠올라 음식의 추억과 기억의 연관성과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자 또한 일상을 꼼꼼히 기록하며, 성장과정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나이의 상관관계를 따지곤 한다.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아아, 이런 게정신병이다. (187쪽)’ 스스로 성격이 안 좋다고 말하고, 변덕스런 내면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 같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려는 모습 같기도 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성장하는 것인지, 늙어가는 것인지,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183쪽)’ 는 문장 앞에는 30대 후반인 나도 확신이 없었다. 이런 기분이 나이 들어서까지 느껴진다면 노인이기에 스스로를 다스리고 너그러워져야 하는 건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글만 봐도 어떠한 환상을 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 더 나아가 우울하고 극단적인 모습까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늙음을(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을 이렇듯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며 내가 숨기고 살아가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떠올려보았다. 어쩌면 이렇듯 쉽게 고백하고 시원해질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자는 암 선고를 받고 2년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랫동안 괴롭혔던 우울증이 사라지고 알차게 변했다고 했다. 우리의 수많은 고민도 어쩌면 불확실한 죽음 때문이 아닐까란 겸손한 마음을 가져본다.

반면 ‘인생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말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하루를 알차게 보낸 날도 있고 하루를 때우듯 보내는 날도 있는데 그럼에도 어떻게든 된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완벽하든, 엉망진창이든 어쨌든 그것도 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독립적인 나로 살아가려면 어찌 되었든 나의 일상이, 사고가 진솔해야 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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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할지라도 그럼에도 사랑하심 - 사무엘상 2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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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이 책을 마주하기 싫었다. 제목만 보고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내용인가 보다 짐작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기를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 열악함에도(매일 야근 하는 남편, 육아, 집안일 등등) 허투루 읽지 않고 끝까지 정독했다. 이상하게 읽기 싫었던 마음과 달리 나를 계속 잡아끌었고, 수없이 무너졌다, 폭발했다를 반복했다. 너무 깊은 은혜가 되어 한바탕 눈물을 쏟다가도, 독서를 방해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내가 책을 읽으며 은혜를 받으면 뭐하나 싶었다. 당장 내 눈앞에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감정조절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람 피운 남편, 힘든 시댁, 힘든 상사, 힘든 사람들과 환경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내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그들이 수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이다. 51쪽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저런 상황인데 저 말씀이 정말 감사하게 들릴까? 계속되는 남편의 야근으로 혼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사실 하나에 뭔가 억울함이 서릴 정도로 속 좁은 나인데, 이런 상황을 복음에 빚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내 몸이 좀 편했으면, 내 걱정과 염려와 분노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좀처럼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 해결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랬기에 은혜롭다가도 책에서 눈을 떼어 현실을 마주하면 짜증이 자꾸 솟구쳤다.


꼭 좋은 남편과 살아야만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나를 교훈시키기 위해 이상한 남편과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상황을 두고 자꾸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따지면 안 됩니다. 67~68쪽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무뚝뚝한 남편을 보면 종종 인간적인 마음으로 날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현재 행복한가를 고민할 때가 있다. 하지만 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남편은 꼭 말을 해야 아냐고 하고 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해도 늘 곁에 있는 사람 취급만 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왜 내가 이렇게 짜증이 나 있는지를 따져보니, 한 달 넘게 야근에 찌들어 있는 남편보다 온전히 육아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엉뚱하게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 고백을 하는데 펑펑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사랑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무뚝뚝한 남편과 살게 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에서 자라다보니 사랑보다는 방임에 가까운 성장을 지나왔다. 그래서 깊이 사랑 받았다는 기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내 스스로도 굉장히 이기적일 때가 많다. 어린 시절 부족했던 사랑을 나는 남편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남편에게는 그 한 마디가 하기 힘들었다. 조금 특별하게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님과 성도들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고백을 듣고 있으면 당황스러웠다. 외도, 도박, 술, 이혼 등등 모두 감추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는다. 그렇게 상처받고 죽을 것 같은 사람들만 찾아오라고 광고를 하셨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고백을 하고 점점 커져 만 명이 넘는 교회가 되리라고 목사님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암나귀’만 찾아 헤맸던 사울처럼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암나귀’가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첫 번째는 사랑이었다. 사랑을 맘껏 주지도 못하고, 그랬기에 사랑 받고(남편, 아이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투성인데도 나는 ‘하나님이 그토록 못 잊어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평안했다가 다시 되돌아보면 순종이 아닌 제사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좌절했다. 그리고 나의 불행과 우울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렸던 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사무엘이 옆에 있음에도 하나님 없는 예배 중독이 되어버린 사울을 비난할 수 없었다. 끝내 회개하지 못한 사울도, 그런 사울을 끝까지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무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라며 염려하셨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했다. 지금껏 아니라고 했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기적인 내 자신의 원수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으로 싸웁니다. 내 욕망에 거슬리는 것이 다 내 원수입니다. (226쪽)’란 말처럼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중심을 잡고 있으면 큰 구원이 이루어져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그럴 때 나, 가정, 교회를 살리는 일임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의미를 희미하게 깨달아갈 무렵 책의 말미에는 북한 선교사님의 입을 통해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탈북을 하고 싶은 이유가 찬송을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탈북을 권하자 할아버지는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며 잠시 기도를 하고 오시더니 울면서 ‘저 아무개 목사가 우리를 돕겠다는데 따라갈까요, 말까요?’란 질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 두는 지 아느냐?’라는 대답이 들려왔다고 했다. 오히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라며 경찰이 오고 있다며 목사님께 어서 가시라고 했다. 목사님이 한 번 더 탈북을 권했지만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압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나는 예배당 종도 쳐 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다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않겠소. 압네다. 압네다.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지요. 264쪽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나는 마지못해서 하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에 물어보는 믿음이며 그럼에도 순종하고 따르는 확신이 내게 있는가 싶어서였다. 나는 여전히 내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있다. 그걸 하루도 지키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젠 감추고 싶지 않았다. 고백할 때 악은 사라진다고 했다. 힘이 없어진다고 했다. 필요하면 수없이 고백하고 싸워서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저 할아버지의 믿음을 닮고 싶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순간 깊이 내려와 나는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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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2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적인가 우연인가 -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파헤치다
리 스트로벨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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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역사 속에 활동해 오신 하나님을 보여 줄 목적으로 평소의 자연 질서에 한시적으로 예외가 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실행하시는 사건이다. 30쪽


머리로는 익히 알고 있다. 기적이란 단어도 종종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기적을 온전히 믿느냐고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기적에 관한 부분을 마주할 때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는 사람의 얘기도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떨까?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앙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믿음이지만 정 안 되면 억지로라도 믿어 넘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느니 억지로라도 믿고 넘겨 더 큰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이다.

그러다 기독교는 그러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게 당연하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리고 복음이 제대로 들어왔을 때 왜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어떻게 믿어지는지도 경험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를 영원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부활을 인정하면서 의심은 걷혔다. 하지만 정말 기적을 바라며 기도했을 때 반대의 경우를 목격한 적도 많다. 내 입으로 아픈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안수하셔서 온 몸이 깨끗하게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다. 내 기도가 부족할 때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끝내 치유하지 못하고 하나님 곁으로 간 성도들을 볼 때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죽음을 목전에 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평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내게 과연 그런 믿음이 있는가? 나라면 이렇게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저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부활의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294쪽

무신론자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혹은 그 반대인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적을 나는 이미 여러 번 체험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 임신중독증인 줄 모르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대학병원으로 가던 일. 너무 고통스러워 여기서 깨어나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무사히 딸아이가 태어났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는 사실. 첫 아이의 돌 무렵 두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아이 다리를 붙들고 중보기도를 100일만 해보라던 형부의 말을 듣고 일 년 뒤에 건강해졌던 일. 둘째가 태중에서 호흡이 없어 응급으로 수술했지만 뇌손상을 입었던 일. 많은 사람의 기도 속에 100일 뒤에는 뇌손상이 말끔히 사라진 일. 내가 만난 하나님을 자연법과 개연성을 운운하며 비논리적이라며 반박한다면 나 역시도 당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나 은혜 안에서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나 일지라도 나는 몇 번이나 하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고 말이다.

철저한 무신론자에다 노련한 저널리스트였던 저자가 기적을 신앙으로 풀어내는 과정은 흥미롭다. 뭐랄까.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며, 근거가 부족하고 논리정연하지 않다며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반박한다고 해야 할까? 은혜가 충만해 명쾌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터뷰 내용은 확연하게 다르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 보여 놀랐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적당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나름 평안한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지막 인터뷰어인 한 철학과 교수는 오랜 생활 아내의 투병을 지켜보는 일이 괴로우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는 모습에서 마음이 찡했다. 누군가 ‘요즘 어떠십니까?’ 라고 인사한다면 사실대로 ‘밧줄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요. 그런데 다행히 그 밧줄을 하나님이 엮으셨다고 말입니다.’ 라고 대답할 거라고 했다.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기꺼이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인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을 목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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