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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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나의 독서 흐름을 살펴보면 형편없었다. 일과 관련된 독서는 하고 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독서는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짙었다. 아무리 그 전의 독서 열정을 끌어올리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나의 환경이 바뀌었고, 조금씩 나이가 들어갔다. 시간의 흐름에 맡기자 싶다가도 이러다 예전처럼 독서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버렸고, 우연히 하루키의 신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틈틈이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과 신간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 나의 시선을 끌만 한 책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3년 만의 하루키 신간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신간이 나오려면 아직 한 달 여의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읽지 않은 하루키 책을 읽자는 욕구가 올라왔다.


나에게 하루키 작가는 좀 이상하다. 20대 초반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이질적인 정서적 낯섦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하루키 작품을 읽지 않다가 <1Q84>를 읽게 되었고 바로 옴 진리교 지하절 사린사건을 다룬 <언더그라운드>를 읽고 하루키란 작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과 또 다른 르포 작가 하루키를 마주하고 나서 비로소 하루키란 작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루키 작품을 읽었다. 하루키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변에서 하루키를 좋아하냐는 질문이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루키 책을 60권 정도를 읽게 되자 ‘그냥 이 정도면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자’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하루키 신간이 나오면 바로 읽었다. 하지만 3년 전 발표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200쪽 정도 읽고 말았는데, 신간 소식에 마음이 동요되자마자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다시 중간부터 시작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책이 꽤 두꺼웠기 때문에 브런치 라이브 독서를 켜고 읽었다. 완독까지 약 6시간 정도가 걸렸다. 정말 오랜만에 눈뜨면 하루키 책을 읽고, 잠들기 전에도 읽고, 외출을 줄여가면서까지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이든 소설가가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소설가의 임무를 다한 게 아닐까? 하루키는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설득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 속의 도시와 그림자의 행방, 이후에 이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 궁금하고 초조했다. 오로지 두 주인공이 도시 밖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을지 초점이 맞춰져 나름대로 상상과 기대를 하며 읽어나갔는데,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조금 멍했다. 내가 읽은 이야기를 다시 복기하고, 결말을 다시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내가 그 도시에서 너를 만난다 해도, 그곳에 있는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16쪽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오는 건 더 어려운 도시지만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17살 소년 ‘나’는 16살의 소녀를 만난다. 나이가 들어서도 만나기 힘든 영혼이 통하는 인연을 ‘나’는 어린 나이에 만났다. 그리고 그 소녀를 상실했을 때, 소녀를 찾아 둘이 이야기 나눴던 그 도시로 들어간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도시가 실재했고, 시력을 잃는 행위를 거친 후 꿈 읽는 이가 되어 소녀를 만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야기했듯 소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를 만나러 이 세계로 왔다는 말도 할 수 없다. 그 도시는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한 장소’이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시의 모습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그림자를 분리시켜야 한다. 그림자와 분리된 후 각각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와 ‘나’는 다른 세계에 살아가지만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현실 세계의 ‘나’는 그림자고 이 도시에 존재하는 ‘나’가 본체인 세상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그렇게 소녀를 찾아 도시에 들어가 그녀의 ‘본체’를 만나지만 ‘나’는 죽어가는 그림자를 살리기로 한다. 웅덩이로 뛰어들어 그림자와 탈출을 하려는 순간 ‘나’는 도시에 남는 선택을 한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만나길 염원한 소녀 곁을 떠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림자가 그 도시를 탈출하는 순간 ‘나’도 이 세계로 돌아와 버렸다. 40대가 된 ‘나’는 현실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림자를 한 번 잃었고,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경험하고, 진심으로 좋아해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면 현실의 세계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런데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후쿠시마현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도서관 관장으로 취직을 해서 나름 대로의 시도를 한다. 그 도시에서 ‘꿈 읽는 이’로 살아갈 때 도서관에서 일했으므로, 무언가 연관성을 있을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임 관장 고야스 씨를 만나 인수인계도 받고, 타인과 처음으로 소녀와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야스 씨가 겨울에 쓰도록 안내해준 방에서 그 도시의 도서관에서 본 똑같은 난로를 마주한다. 고야스 씨는 치마를 입고 항상 같은 베레모 모자를 쓰는 의상은 독특하지만 ‘나’에게 의지가 많이 되는 사람이었다. 고야스 씨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때 함께 오래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고야스 씨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독특한 의상을 갖게 된 연유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고야스 씨와 ‘나’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밝혀졌을 때도 어쩌면 그 도시는 진짜 존재하는 도시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가 분명 그 도시를 경험했지만, 그 도시를 아는 이는 없었고 돌아가는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나’가 도서관 관장으로 오게 된 이후부터는 어쩌면 그 도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만족하며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나’는 진짜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려 잠시 머무는 사람처럼 현실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만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실종되는 일이 발생한다. 자폐적인 성향을 보이고, 무엇보다 그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도시의 지도를 그려낸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이 방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나’는 단순 실종이 아니라 어떤 경계를 넘어 버렸다고 인지한다. 그리고 그 소년이 매개물이 되어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혼란스러웠다. 나는 당연히 ‘나’와 그림자를 이분법으로 놓고, 도시에서 탈출한 그림자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나’는 현실에서든 그 도시에서든 본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지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정확히는 ‘나’를 기억하는)에 모든 초점이 쏠려 있었고, 회오리가 몰아치듯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름 정리해 둔 소설의 흐름과 규칙(이 소설에서 존재하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이 한순간에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 도시에 있었고, 현실 세계에서 꿈 읽는 이로 오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년에겐 가족, 현실 세계의 미련이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세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숲에 두고 온 인형이 그림자라면 도시의 소년은 본체여야 했다. 그렇다면 도시로 다시 돌아온 ‘나’도 본체여야 했다. 여전히 그림자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그래야만 현실과 도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집는 소녀의 말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696쪽


현실에 존재했던 ‘나’는 본체가 아니라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의 ‘나’와 도서관의 ‘나’가 교차 되면서 섞이기 시작한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의 대화에서 원래 모습으로 ‘환원된’ 것이며, ‘나’의 ‘그림자는 바깥 세계에서 무사히, 멀쩡하게 살아’서 ‘훌륭하게 대역을 해내’고 있다는 말들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란 ‘나’의 질문에 소년은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하고, 본체와 그림자의 진위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이 소설에서 ‘나’가 소녀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전은 도시에 존재하는 ‘나’와 현실에 있는 ‘나’를 그림자나 본체로 규정하지 않고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도시에서 나갈 수 있다고 했으니 더 이상 소녀와의 재회의 여부에도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가 마음먹기에 따라 도시와 현실을 오갈 것이며, 어떤 존재든 이제는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하루키는 독자를 설득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완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설득당하고 있던 세계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허구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실은 지독한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다. 이 또한 어떤 것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었고, 그것을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나’만큼의 비밀스럽고 절절하진 않더라도, 내 안에 새로운 세계가 자리한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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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들 ㅣ 모호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 난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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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 초가 되면 노벨문학상 발표를 기다린다. 내가 아는 작가인지, 혹은 내 책장에 있는 작품인지 궁금해서다. 올해는 앤 카슨이란 작가가 수상했는데, 전혀 모르는 작가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저자의 작품을 구입했다. 총 5권의 책을 쌓아두고 조금씩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난해했고, 문학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소개며 설명을 조금씩 읽으면서 저자의 작품은 장르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이 집중을 할 수 없어 가장 얇은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굉장히 짧은 글들의 연속이었지만 읽는 동안 이 글의 장르를 떠올릴 수 없었다. 모든 제목에 ‘짧은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글을 만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접근 방식이 생경했고, 전혀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 익숙해져서 이해하려 하면 글이 끝나 버렸다. 옮긴이의 글을 읽고 나서야 ‘편의상 시집으로 분류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그 어떤 장르의 울타리에서도 벗어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읽는 내내 시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고, 앞 뒤가 알 수 없는 꿈의 잘라다 놓은 기분도 들었고,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정말 장르의 울타리 없이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게 쓰인 작품이었다.


그러다 시 같기도 하고, 산문 같기도 한 이 글을 이해하며 읽는 게 아닌 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장을 이해하고, 앞 뒤 문맥을 찾는 것이 아닌 느껴지는 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이다. 마치 미술관에 가서 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 그림을 마주하고 느끼는 것처럼 저자의 시들을 내게 다가오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나서 옮긴이의 글에서 카슨의 어릴적 이야기와 함께 이 시집은 ‘원래 그냥 짧은 제목만 달린 그림들’이었단 말을 듣고 나서 그제야 내가 그림이 없는 액자 속에 시를 읽은 것이며, 이 시를 한 편의 그림처럼 봐도 무방함을 깨달았다. 그저 짧은 그림과 긴 그림으로 구분할 뿐, 그림이 내게 툭 다가오듯 그림을 그저 글로 만난 것 뿐이라고 말이다.


그는, 간통을 범하는 사람처럼 서둘러 차가운 초록빛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붙잡았다. 강은 돌로 된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다. 강은 자기 입술 쪽으로 쇠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색채광선주의에 대한 짧은 이야기> 19쪽


조르주 쇠라가 자신의 점묘법을 활용한 회화 사조를 줄여서 ‘색광주의’라고 한다고 하는데, 쇠라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강이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자기 입술 쪽으로 밀어 붙인다’라는 표현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쇠라처럼 저자도 한 편의 그림을 시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그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진다. 모든 시가 이렇게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의 그 느낌처럼 감각적으로 보고 느끼고 지나가는 것도 괜찮았다. 모든 작품을 이해하고 넘어가고, 느낌을 표현하고 꾹꾹 담아내지 않듯이 또렷하지 않은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윤곽을 만들어 냈다. 그게 명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더라도, 그저 육감으로 만났다.


그의 작품군은 기대, 욕망, 통찰력, 공포, 수치심과 저항을 독창적이고, 간결하지만 함축적이고, 제멋대로인 방식으로 극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13쪽



마거릿 크리스타코스의 발문에서처럼 이 혼란을 어찌어찌 통과했다. 또렷함이 아니라 뭉게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듯, 혹은 하나로 합쳐졌다 떨어지듯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이 순간에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것을 앤 카슨의 사조로 볼 수 있다면 나도 적당히 발을 들인 셈이다. 그래서 저자의 세계로 좀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나 역시 저자의 작품 안에서 경계선을 정해두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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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마음속 기록, 난중일기 ㅣ 처음 만나는 고전
이진이 지음, 이광익 그림, 한명기 감수 / 책과함께어린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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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여수는 이순신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우리동네 도서관 이름도 이순신 도서관이고, 우리집에서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이순신 어머님이 사시던 곳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익숙한 여수 지명과 장소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오래 전에 이곳을 거닐고, 지켜주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뭉클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이순신 장군이(이하 장군 호칭은 빼겠다) 일본과의 전쟁 준비 기간은 불과 1년 2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류성룡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뒤, 짧은 기간 동안 전쟁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전란 중에 쓴 일기’라는 뜻의 <난중일기>는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연도별로 구별해서 총 7권의 일기를 남긴다. 이 책에는 이순신의 일기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고, 일기에는 없는 장계(전투 결과를 임금과 조정에 보고)를 통해 임진왜란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중일기>가 더 궁금해져서 책장에서 원본 <난중일기>를 꺼냈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읽었으니 더 상세한 전쟁에 대한 기록과 이순신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었다.

 

<난중일기>를 읽는 내내 이순신의 고독과 외로움에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나이가 들기 전에 읽었던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위대함과 일본을 물리쳤던 짜릿한 전투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전쟁의 많은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이순신의 힘듦이 오히려 더 잘 보였다. 개인적인 결정 하나를 할 때도 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한 뒤에 하는 것도 벅찰때가 많다. 그런데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이순신의 고충은 감히 이순신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의 강직한 성격뒤에 병사들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또 다른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도 읽고, 영화 <명량>,<한산>,<노량>도 모두 보았다. 이 책도 두 번째 였고, 그렇게 많은 이순신에 관한 작품들을 만나면서도 만날때마다 너무 가엽다. 할 수만 있다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이순신과 병사들에게 뜨뜻한 국밥을 실컷 먹여주고 싶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환경이 너무 어려웠다. 군량미가 도착하지 않을 때 병사들을 걱정하는 마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병사들을 알리기 위해 신분을 따지지 않고 기록하고 장계를 올리는 모습에 이순신의 노고와 애씀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렸다. 전쟁이 7년 동안 이어지고, 때론 나라도 이순신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몸이 아픈 와중에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많은 것을 결정해야 했을 때도 이순신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대했으며,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너그러웠던 이순신도 꼭 잊지 말았으면 해. 또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도 <난중일기>를 통해 꼭 기억해 주길 바랄게. 160쪽

 

이 모든 게 <난중일기>에 녹아 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중에도 일기를 남긴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일기라도 쓰지 않으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숨통이 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덕분에 후손들은 전쟁과 이순신의 개인적인 감정들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얼마나 무모하고, 많은 피해를 낳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느껴졌다. 7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을 자신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서 시작된 노량 해전에서 결국 마무리 짓긴 했지만 끝까지 병사들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감히 이순신의 근처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순신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 뿐이지만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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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마지막 잔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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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여는 순간 낯이 익었다. 책날개에 익숙한 작가와 그린이 소개를 보는데 너무 익숙했다. 그제야 책 제목을 다시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분명, 이 책의 단행본은 없어서 신간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 검색결과에 『중국행 슬로보트』 단편집에 실려 있던 작품이었다. 이미 읽은 책을 또 구입한 모양이었지만 안자이 미즈마루가 오로지 이 소설을 위해 20편의 일러스트를 실어 따로 출간한 책이라고 하니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타계 10주년을 맞아(2024년) 온전한 한 권의 책이 탄생했으니 그것 또한 기념일 것 같다.

서서히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에 이 책을 읽으니 아직은 무덥고, 땀이 뻘뻘 난다기 보고 잔디를 깎는 장면이 싱그러워 보였다. 아직 나를 덮치지 않는 더위 때문인지 반듯하고 가지런히 잘려 나가는 잔디를 상상하며 오로지 푸르름만 떠올렸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 특유의 시니컬함과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인물의 내면과 생각의 파편들에 깊게 다가가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이 잔디 깎는 일을 그만 두었을 때, 한낮의 꿈처럼 내 기억속에서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연인과 여행을 가려고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지만 헤어지자는 연인의 편지가 도착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계속 하게 된 잔디 깎는 일은 주인공에게 적격이었다. 가장 먼 거리의 집을 택해서 느긋하고 꼼꼼하게 잔디를 깎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의식을 치르듯 행해진다. 당연히 고객들 입장에서는 평이 좋을 수밖에 없고, 사장은 이 일을 오래 하길 바라지만 주인공은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야 했고, 또한 딱히 돈을 벌어야 할 목적도 상실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집의 에피소드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일을 하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들 또한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연인과의 잠자리가 기억나다가도, 잔디 깎는 일을 하면서 딱 한 번 갖게 된 그 집 부인과의 잠자리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잔디 깎는 일이 주인공을 지탱해 준다는 느낌까지 사라지게 했다. 오로지 나의 기준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과 ‘다른 표현은 없을까?’라는 생각이 지배할 때 철저히 관찰자가 된다. 어떤 작품은 깊이 몰입하다가도 무언가 나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작품에서 한 발 짝 튕겨 나온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그 기억들이 솟아났다.

이런 감정을 ‘나쁘다’, ‘옳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분명 오래전에는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는 작가는 내가 아니므로 가타부타 끼어들 수 없기에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내가 예견한 길에서 곁길로 빠져나가는 이야기의 흐름과 주인공의 행동들이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40대 중반을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소설 하나도 맘 편히 읽을 수 없다는 피로함이 몰려오다가도, 어쩌면 저자는 인간 내면의 이런 복잡하고 숨기고픈 감정을(나만 숨기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을 빌려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는 장면들과 표현들을 마주하면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불쾌한 감정을 지나, 솔직한 감정의 표현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저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집에서의 그 평범하지 않는 상황들처럼 말이다. 첫 만남에서 여주인의 담배 요구, 술을 건네주고, 맘에 들게 깎인 잔디를 보며 죽은 남편을 떠올리다가 먹을 것을 챙겨주며, 보여 줄게 있다며 자신의 딸의 방을 보여주며 성격을 물어보고, 마지막에 팁을 받는 그 모든 과정들을 그저 받아들이게 된다. 분명 소설을 읽으면서 서걱거리던 낯섦들이 내 일상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종종 일반적이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주인공처럼 무덤덤하게 그 상황에 그저 최선을 다 한다. 그리고 나서 되짚어 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상황들이 많다. 이 이야기도 헤어진 연인과 잔디 깎는 일, 그리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흘러가는데, 일부분만 보며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굳이 판단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주인공처럼, 그저 일상의 흐름이라고 여기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일상이 쌓여 한 사람의 자아가 만들어 지겠지만 그 자아 또한 이러면 어떠하며, 저러며 어떠하리. 그저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오후에 마지막 잔디 깎는 일을 들여다 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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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지음, 최산호 그림 / 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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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달 전, 2주 동안 뉴욕 여행을 갔었다. 모국어를 쓰지 못한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맨해튼을 걷고 있으면서도 움츠러드는 건 어쩔 없었다. 동선이 제약적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정보들은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집을 떠나 이 먼 곳에 와서 낯선 곳을 걷고 있고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현실감은 없었지만, 이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은 두렵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라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제한적일 테지만 분명 집으로 돌아가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나도 돌아올 거야. 이 정도의 여기라면. 85쪽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했던 뉴욕 여행이어서 그런지,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지하철과 길거리의 온갖 냄새로 강렬하게 기억되는 뉴욕은 한국과 자꾸 비교하게 만들었다. 비싼 물가,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은 듯한 거리의 사람들, 도시의 소음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일 언어는 나를 더 혼미하게 했다. 그랬기에 다시 뉴욕에 올 일이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파리를 좋아하고, 그곳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들과 자잘한 인연을 맺고,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모습이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 도시를 사랑하고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걸까? 파리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라고 해도, 예술가들만 파리를 사랑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왜 그토록 낯선 도시가 낯설게만 느껴지고 즐기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시간이 우리를 잠시 막고 있을 뿐.
시간은 당신의 모든 가능성을 숙성시키는 중이라고. 21쪽
 
파리에 있는 ‘카페 팔레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근처 국립고등미술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아지트라고 한다. 저자는 이 카페 주인이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유를 가난한 학생들에게 주인은 가끔 와인과 음식을 건넸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에게 가진 것은 그림뿐이고, 줄 수 있는 것 또한 그림뿐이니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곳을 오가는 수많은 잠재적 예술가들에게 ‘시간은 당신의 모든 가능성을 숙성시키는 중이라고’ 말해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 가능성에 부디 나에게도 와 닿았으면 싶었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마흔에 겨우 파리에서 첫 책을 출판한 헨리 밀러처럼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이라고, 나에게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거라는 위로의 말처럼 들렸다. 다만 내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구체적이지도 않고, 시도도 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속에 무언가가 소용돌이 치기를 조금은 무모하게 기다리고 있다. 
 
어렴풋이 뉴욕에서 저자처럼 여유롭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관광객임에도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뿐, 충분히 맘 놓고 즐겼을 법도 한데 나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자체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내 능력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고, 내 안의 수많은 가능성과 뉴욕 도시가 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접목 시키지 못했다. 여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꼭 무언가 결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데, 무언가를 얻으려고만 하고 그 자체를 여유롭게 바라보지 못했다. 나도 저자처럼 뉴욕을 여러 번 경험하면 골목골목을 기억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 생길까?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 없이 오롯이 파리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익숙해야만 편안한 것이 아닌 낯섦과 익숙함이 주는 설렘과 편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와인부터 창가에 심겨진 꽃 이야기, 공원에서 받은 낯선 이의 달콤한 생일 선물까지 꼭 저자의 경험만 녹아 있는 게 아니라 파리 시내에 바람처럼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노래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수다 같은 이야기를 몽롱하면서도 편안하게 들었다. 잔뜩 움츠러든 강직성 대신 유연하고 어떤 상황이든 내면을 거쳐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여유와 편안함과 마주했다.
 
파리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간다 해도 저자처럼 이런 시선으로 그 도시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각자 자신만의 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이 천차만별로 쌓이는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그러다 렌즈 안에 더 기억되게 하고, 간직하고 싶은 세상이 있을 것이고 그럴 때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여운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보다, 어느 날 선물처럼 남겨진 여운이 현실과 이어진다면 그게 더 행운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현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후회 없이 하루를 이겨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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