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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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열자마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일이 후회 되었다. 저자의 이름에 몰두하다보니『타인의 고통』이라는 책 제목을 간과했으며, 무방비 상태의 훅 들어온 사진과 그림들은 곧바로 제목을 실감케 했다. 그 순간 책을 덮고 싶었다. 이제껏 전쟁에 관한 잔인한 영상과 묘사를 요리조리 피해왔던 터라 굳이 마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의무감처럼, 미뤄둔 숙제처럼 더 이상 피할 도리가 없다는 기분 또한 들었다. 여러 의미로 속을 뒤집는 사진과 글을 마주하면서 가능하다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이 책을 덮었을 땐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찝찝함과 나약함, 무기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을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

30쪽 _「<일리아드>, 또는 무력의 시」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한 인간’이었다가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 인간을 마주하는 일은 마치 내 영혼이 짓밟힌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타인의 고통’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지켜보는 위선과 싸우는 일 자체도 힘이 들었다.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결국 저자도 어떠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잔악함과 전쟁의 의미 없음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의 잔혹함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드러났다(카메라가 등장하지 않았던 이전에는 그림으로 남아 있지만 그림도 잔혹하긴 마찬가지다). 사진은 ‘그저 우리는 기록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는 주장’과 함께 ‘리얼리즘이라고 알려져 있는 주제와 동맹을 맺게’ 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은 언제나 특정한 시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때론 극적인 상황을 위해 전쟁 중에도 사진은 조작되기도 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릴 의무와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린 상황에 잘잘못을 따질 여력도 없었다. 그것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찾지 못해 마음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154쪽


나의 연민이 방관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언제든지 나도 고통에 ‘연루’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진에 찍혀야만 그 전쟁이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내가 고통의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 되지 못한 상황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게 얽히고설켜, 고통은 고통대로 무거운 마음은 마음대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잔악 행위들 중 도대체 어떤 잔악 행위를 우리가 다시 되돌아 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142쪽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 대상이 또렷한 경우에는 온갖 비난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잔인한 사진을 보면 볼수록 감각이 무뎌져가고,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 “관음증적인 향락(나는 안전하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에 젖어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무거운 주제에 대해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순간 이미 찍는 사람의 의도가 담겨버린 것처럼 저자도 이 글을 쓰면서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무겁고 복잡하고 답이 없는 문제를 낱낱이 보여주고 슬그머니 자리를 뜬 기분이 들 정도로 이 책을 읽는 나만 괴롭다. ‘타인의 고통’을 목도했다는 충격과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은 환멸이 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방관자이며, 안전한 연민을 느끼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겁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 언젠간 이 느낌마저 사라지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것이며, 책 속의 끔찍한 사진의 환영이 종종 나를 괴롭힐 거라는,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게 될 거라는 예감만 확실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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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티우먼 2022-11-1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속의 어떤사진만 보고 속이 메쓱거리고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잠깐 기절을 했네요. 전쟁다큐멘터리에서 더한것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솔직히 어린애들이 볼까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