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황진이 시조

 

 

 

 

 

지금 소개 하고 있는 책과 함께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황진이가 지은 시조와

서경덕이 지은 시조를 올려 놓습니다.

잘 알려진 것만 선별해서 올려놓습니다.

 [황진이의 시조]


● 잣나무 배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 반달을 노래함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 산은 옛 산이로되...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 청산은 내 뜻이요...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 어져 내 일이야...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 別金慶元 (별김경원) 김경원과 헤어지며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 朴淵瀑布 (박연폭포)


一派長川噴壑礱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仞水潨潨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春玉碎徹晴空 (주춘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박연폭포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開豊郡)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다.


● 滿月臺懷古 (만월대회고) 만월대를 생각하며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爭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 松都 (송도) 송도를 노래함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그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이다.


● 相思夢 (상사몽) 꿈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청초 우거진 골에... <백호 임제>


*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 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 서경덕의 시조


*<성옹지소록>에 보면 황진이가 거문고를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서경덕 또한 거문고를 즐겼으며, 거문고에 대한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성리설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一氣)'로 파악하였는바, 그는 이 하나의 기를 '태허(太虛·우주 생성 이전의 상태)' 개념으로 표출하고 '선천(先天)'과 일치시켰다. 모든 현상세계가 생성되어 나오는 동정(動靜) 생극(生克)의 계기는 이 하나의 태허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는 '이(理)'를 '기'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기'가 생성 작용하는 '후천(後天)'의 현상세계에서 그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는 자기통제력으로 파악하였다.


즉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한정한 것이다. 그가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과 <줄 있는 거문고에 새긴 글>을 나란히 지었던 것도 바로 소리 없는 가운데 소리를 듣는 음악의 본체와 소리 속에서 음률의 조화를 즐기는 음악의 응용으로, '태허―선천과 동정―후천'의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기철학적 세계를 생생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無絃琴銘(무현금명)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琴而無絃, (금이무현)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

存體去用. (존체거용) 본체(體)는 놓아두고 작용(用)을 뺀 것이다.

非誠去用, (비성거용)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

靜基含動. (정기함동) 고요함(靜)에 움직임(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聽之聲上, (청지성상)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不若聽之於無聲, (불약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악지형상)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不若樂之於無刑. (불약악지어무형)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 (악지어무형)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乃得其 , (내득기 )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外得於有, (외득어유) 밖으로는 있음(有)에서 체득하지만,

外得於無. (내득어무) 안으로는 없음(無)에서 깨닫게 된다.

顧得趣平其中, (고득취평기중) 그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음을 생각할 때

爰有事於絃上工夫 (원유사어형상공부) 어찌 줄(絃)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가?


2.

不用其絃, (불용기현) 그 줄은 쓰지 않고

用其絃絃律外官商. (용기현현율외관상) 그 줄의 줄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

吾得其天, (오득기천)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

樂之以音. (락지이음)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

樂其音, (락기음)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

音非聽之以耳, (음비청지이이)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

聽之以心. (청지이심)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彼哉子期, (피재자기) 그것이 그대의 지표이거늘

曷耳吾琴. (갈이오금) 내 어찌 거문고를 귀로 들으리?


琴銘(금명)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鼓爾律, (고이율) 그대의 가락을 뜯으며

樂吾心兮, (락오심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諧五操, (해오조) 여러 가지 곡조를 고르되

無外淫兮 (무외음혜) 밖으로 지나치진 않는다.

和以節, (화이절) 강단으로써 조화시키어

天其時兮, (천기시혜) 날이 가고 사철이 바뀌듯하며,

和以達, (화이달) 통달함으로써 조화시키어

鳳其儀兮. (봉기의혜) 봉황새도 법도를 따라 춤추게 한다.


2.

鼓之和, (고지화)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

回唐虞兮, (회당우혜) 요순시대로 돌아가며,

滌之邪, (척지사)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

天與徒兮. (천여도혜)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

操?洋, (조아양) 높다란 소리?넓은 소리를 타지마는

人孰耳兮. (인숙이혜) 그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繁而簡, (번이간)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有如味兮. (유화미혜) 간략한 데 뒷맛이 있느니.


偶吟(우음) 우연히 짓다 <화담 서경덕>


殘月西沈後(잔월서침후) 잔월도 서쪽으로 진 뒤에

古琴彈歇初(고금탄헐초) 오랜 거문고 타기를 비로소 쉬네

明喧交暗寂(명훤교암적)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這裏妙何如(저리묘하여) 이 속의 오묘함이 어떠하냐


책과 함께 읽으시면 황진이에 대해서 더 진한 친근감을 느끼게 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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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ainapple > [퍼온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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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il Wears Prada - O.S.T.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Various Artists 노래 / 워너뮤직(WEA)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음악이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mp3 사이트에서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받은 후 구매를 결정했다.

1번 트랙에 실린 Madonna의 Vogue(마치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려고 만든 것처럼 제목이 'Vogue'다)는 영화음악 애호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 음반에서 가장 쉬우면서 확 다가오는 건
1. Vogue - Madonna
4. Seven Days in Sunny June - Jamiroquai
9. Feelin' Hypnotized(Black Liquid remix) - DJ Colette
10. Tres Tres Chic - Mocean Worker
이렇게 4곡이었다.

패션잡지사의 긴장감과 막간 세련됨을 잘 표현한 이 네 곡이 이 음반의 매력을 아주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영화만큼 성공을 거둔 Notting Hill의 사운드트랙은 영화 자체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것이므로 음악 또한 그렇고, 매우 호평받은 앨범이었다. 리메이크곡이 다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빼놓을 수가 없는 훌륭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대중에게 아주 잘 알려진 Madonna, U2, Jamiroquai, Alanis Morissette 등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뮤지션들의 노래가 아주 영화와 잘 어우러져 있다. original score가 아닌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꼭 영화와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이 앨범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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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11-1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이미지 사진 구경왔습니다.
음반 재킷이네요.
하이힐 굽이 삼지창이라니!
영화 제목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하루(春) 2006-11-1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포스터이기도 해요. 좀 더 선명하게 나오면 더 좋을텐데... 영화가 발랄하고 인상적이더라구요. 그래서... ^^
 
Jason Mraz - Waiting For My Rocket To Come
제이슨 므라즈 (Jason Mraz) 노래 / 워너뮤직(WEA) / 200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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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Geek in the Pink가 실린 2집 <Mr. A to Z>가 먼저 소개됐지만, 이 앨범이 2002년 발표한 Jason Mraz의 데뷔작이다.

Jason은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의 소유자이며, 그 목소리를 아주 잘 활용한다.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유려한 음색에 매료된 이들이 나 말고도 많을 것 같다. 가볍게 박자를 맞추며 즐기기 적당하다. 이런 음반을 들을 때면 늘 생각한다. "그래,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은 이런 거였지."라고...

CD 플레이어에 걸고 첫 곡부터 듣고 있으면 우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너무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귀여운 외모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뒤를 잇는다. 여러 장르를 뒤범벅한 젊은 뮤지션의 의욕이 보기 좋아서다.

acoustic에 강한 점도 마음에 든다. 꾸미지 않아도 가창력은 이대로 훌륭하니 뭘 더 바랄까 싶다. 당연히 계속 기대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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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2-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잘하던데요. 음. 목소리에 대한 표현은 늘 너무 어려워요.

하루(春) 2006-12-0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더군요. 저는 The Remedy(I won't worry)가 이 앨범에서 요즘 제일 좋아요.
 

The Devil Wears PRADA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냐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합리화하는 앤드리아.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앤드리아는 에밀리를 밟고 미란다에게 선택받는 대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흥미로운 점을 꽤 많이 갖추고 있다. 초반 5분의 법칙도 잘 지키고 있고..
어리버리 앤드리아가 어정쩡한 자세로 편집장실에 전봇대처럼 붙박혀 있는 동안
에밀리가 받은 이른 아침의 전화 한 통은 <런웨이>의 모든 직원들을 순식간에 초긴장상태로 몰아 넣는다.

* 런웨이(runway) -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걸어다니는 스테이지를 일컫는 말. 영국에서는 캣워크(Catwalk)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한다. (출처:씨네21)

아이보리색 프라다 토트백을 들고 선글라스를 끼고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하는 미란다 프리슬리.
사족이지만, 올 초 외국에 나가기 전 면세점에 갔다가 사고 싶어서 몸살 날뻔한 빨간색 프라다 토트백이 있었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고도 싶었지만, 차마 사달라고 하지 못한... 젠장. 아이보리색도 있구나. 하면서 잠깐 부러웠다.

메릴 스트립이 나온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녀의 연기는 정확히 기억한다.
바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통해서다.
그 두 편은 벌써 오래전 영화니까 그녀도 늙었다.
하지만, 아~ 내가 알던 메릴 스트립이 맞나 싶을 정도로 끝내주게 멋있다.
메릴 스트립이 아니었다면 이런 미란다는 절대 탄생할 수 없었을 거다.

어리버리 앤드리아를 new 에밀리라 부르고, 받아적거나 외울 정신도 없는 어리버리한 비서 앞에서
속사포처럼 지시사항을 쏟아내고는 "That's all."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상대가 누구든 절대 타인 앞에서 굴하지 않는 미란다의 '굴욕'을 목격한 new 에밀리는
그 다음날 바로 해고통보나 다름없는 요구를 지시받는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해고해 버리는 게 더 낫겠다 싶지만, 어디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가야지...

지미 추나 마놀로 블라닉을 신고, 최신 고급 의상을 입은 미란다의 비서들은
100만명이 노리는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쇼핑백을 3~4개 들고 찻길을 무단횡단하고,
쌍둥이들의 숙제를 대신 해준다.

누구나 비싼 명품을 입고 싶어하고, 누구나 미란다 같은 삶을 원하는 건 아닌데
미란다는 잘못 알고 있었다.
미란다가 불쌍했다.
더이상의 결혼은 나와 맞지 않는 것이라는 듯 자기가 원하는 바를 손에 넣는 대단한 추진력의 미란다.

앤드리아의 대사처럼 미란다가 남자였으면 훨씬 높게 평가받았을 거다.
사랑과 나의 삶을 택할 것이냐, 가슴은 공허하지만 외모는 화려하게 살 것이냐.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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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09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였다면 존경받을 거라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 이 영화가 재미있는 건 메릴 스트립이 미란다이기 때문인 거 맞죠?^^

프레이야 2006-11-0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앤드리아는 분명 선택한 거죠. 미란다의 비서일도, 박차고 나와 기자로 일하는 것도요. 미란다의 비서일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루님, 오늘도 신나게 보내시기 바래요^^ 어느새 11월도 삼분의 일이 지나가려합니다...

하루(春) 2006-11-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영화가 참 쉽게 다가오더군요. 모든 장면, 대사가 다 생각나요. 주로 메릴 스트립 덕에 웃었는데요. 미란다가 불쌍해요. 그도 어쩔 수 없는 피고용인인 것 같아서요.
배혜경님, 그쵸. 미란다의 비서가 아니었으면 어디서건 절대 겪을 수 없는 경험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요. 멋있었어요.

blowup 2006-11-0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치만 해리포터 에피소드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졌어요.
전 그런 드라마가 징글맞게 현실적이었으면 좋겠거든요.
바람이 지나친가.-.-

하루(春) 2006-11-1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란다가 주문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복사, 제본까지 해서 기차에 탈 쌍둥이한테 주는 것까지 마친 건 좀 당황스러웠죠.
저는 이 영화 장르를 그냥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는데, 코미디로 분류하더군요. 패션계의 사정을 거의 모르는 관객들에게 판타지와 코미디를 제공하기 위한 좋은 장면이었다고 보는 게 이 영화를 위한 감상법이 아닐까 싶어요. namu님 귀여우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