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전 7권)를 4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나우시카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참 힘들었습니다.
나우시카와 사람들 하나하나의 감정에 그대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일까요.
(그때 쓴 독후감은 http://www.aladin.co.kr/blog/mypaper/450091)

이번엔 두 번째로 읽어서인지 아니면 나이 든 탓인지(몇 년 전부터
눈물은 헤퍼졌는데 감정이입은 도리어 잘 안 된다는... -.-)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전에는 힘겹기만 하던 여정을 재미를 느껴 가며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읽은 내용을 다 잊은 건지 아니면 처음에 헛읽었던 건지 몰라도,
아, 나우시카가 이런 이야기였구나, 하고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 듭니다.
만화책 [나우시카]가 영화 [나우시카]보다 더 깊고 넓다는 건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본격적인 시작이고
[모노노케 히메]는 그의 완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나우시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을 보다 보면,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오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에서 허무가 시작됩니다.
허무는 포기로 이어지든가 열정으로 이어지든가 합니다.
인간이 그대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둬,
아니면
인간을 통째로 바꿔버리자!

열정은 모든 것을 일관된 한 가지 계획에 다 담으려는 욕심을 낳고,
똑똑한 소수 인간이 전체 역사를 완벽하게 계획대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오만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계획대로 착착 움직이기엔 너무 많고 다양하며 또 어리석고 개성 넘치는
인간의 역사는 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요.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 그러나 내 존재에 대한 자긍심을 포기하면
모든 생명을 아끼고 두려워하는 자세까지 같이 버려지는 게 아닐까.

나우시카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삶이란,
꼭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통째로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적어도 인간이 처음 문명과 역사를 만들어낼 때에는,
그 역시 자연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자연이 내놓은 과제에 대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우시카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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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06-28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나우시카를 읽었을때 받았던 감동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군요..^^
리뷰로 올리시지 그러셨어요..

가랑비 2006-06-2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리뷰로 한 번 올려서요. ^^ 공감해주셔서 고마워용.

로드무비 2006-06-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두 번 읽고 리뷰를 올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가랑비 2006-06-2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생각이랑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는 거요. ^^

반딧불,, 2006-07-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도 아직도 참 그림들이 무서워요.
차라리 영화는 덜...;;

가랑비 2006-07-1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그렇지요, 영화는 참 예쁜데, 만화책은 좀 힘들어요. ^^
 

신문 보기를 게을리 해서 말이죠,
제가 아는 이 분이 한겨레에 글을 쓰시는 걸 이제야 알았지 뭡니까. 호호호.

****

낙랑공주는 왜 조국을 배신했을까
한겨레
[관련기사]
다르게 읽기 깊이 보기

텔레비전 드라마 덕인지 갑자기 아이들에게 고구려 관련 책들의 인기가 좋아졌다. 한 번도 대출되지 않던 고구려 왕조사나 동명성왕과 관련된 책들은 반납 즉시 다시 대출이다. 동기야 무엇이든 사서교사의 입장에선 그저 기특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니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시대가 뒤죽박죽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못 알고 있는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아이들을 모아놓고 고구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들이 텔레비전에서 보는 주몽은 말이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야.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야. 텔레비전에서는 해모수가 고조선의 유민을 모으는 독립군처럼 나오던데, 원래 알려진 얘기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해. 유화부인은 물의 신이었던 하백의 딸이었고.”

아이들이 점점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몽에서 시작하여 부여에 두고 왔던 유리왕자 이야기, 갑자기 나타난 유리왕자 때문에 왕위를 잇지 못하고 남쪽으로 갔던 소서노와 온조 비류 이야기, 유리왕의 셋째아들로 고구려 3대 임금이 된 대무신왕의 이야기, 그리고 그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낙랑공주 이야기.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 자리를 뜨는데, 갑자기 5학년 여학생이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선생님, 도대체 왜 우리나라 여자들은 그렇게 바보 같아요? 읽기책에 나온 박제상 부인도, 남편만 기다리다가 남편 죽으니까 따라죽어서 자기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더니, 낙랑공주는 또 뭐에요? 자기를 이용해 먹은 호동왕자한테 속아서 아버지도 배신하고 나라도 망하게 했잖아요?”

당황스러웠지만 비죽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평범하게 오래 사느니 나라를 구하고 비장하게 죽고 싶었고, 온갖 충신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을 분하게 생각했었다. 그 아이가 다시 도서실을 찾았을 때, 나는 강숙인의 <아, 호동 왕자>를 찾아 권했다.

“이 책을 읽으면 고구려 초기 이야기들을 많이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낙랑공주의 마음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작가 선생님은 말이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목숨으로써 가르쳐주었다고 쓰셨더라.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호동 왕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아이는 아직 책을 반납하지 않고 있다. 아이의 반응이 궁금하다. 목숨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을 해봐야만 낙랑공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 호동 왕자> 강숙인 글. 푸른책들/8500원.

범경화/대전 복수초등학교 사서 교사 bkh0904@naver.com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356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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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6-2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멈멈머 저도 몰랐어요.

호랑녀 2006-06-2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 위에
녹색세상 꿈꾸는 어쩌구~ 하고
장애인 친구 어쩌구~ 하는 것도 아마 그 사람이 쓴 거라죠? =3=3=3

sooninara 2006-06-2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멋진 글입니다.^^

2006-06-2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6-06-2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대단하신..호**님 멋지시군요~~~~~

가랑비 2006-06-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이, 뿌듯하여라. ^________________________^

06-27 12:51에 속삭이신 님, 제가 미리 댓글 남기지 않은 게 잘못이죠 머. 모르고 찾아와 주셨던 게 더 반가워요.

chika 2006-06-2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

조선인 2006-06-28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호랑녀님, 앞으로는 열독할게요. *^^*

가랑비 2006-06-2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새벽별님께서 진즉에 주목하시던 작가의 책이었군요! 그럼 저도 보관함에다...
치카님, 조선인님, 저도 앞으론 "함께하는 교육" 면을 꼬박꼬박 봐야겠어요. ^^

호랑녀 2006-06-2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벼리꼬리님, 저는 개인적으로 뢰제의 나라가 더 좋았어요. 강숙인 작가의 책이요.

가랑비 2006-06-3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넵, 기억해두겠습니다.

건우와 연우 2006-06-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가요. 책제목 잘 기억해둘께요^^ 꾸벅...

가랑비 2006-07-0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반갑습니다. ^^
 

2006년

제1호

6월21일

 


 


사저널 기자들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시사저널 기자들은 그야말로 시일야방성대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창태 사장이 시사저널에 처음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기자들은 서로 말하기를, “금창태 사장은 보수언론 출신이어서 시사저널과 코드는 맞지 않겠지만, 최소한 언론인으로의 양식은 있을 터이니 편집권을 훼손하지 않은 채 시사저널의 새로운 비전을 열 수 있으리라”며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은 많도다. 천만 꿈밖에 날치기 편집권 강탈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사태는 비단 우리 기자들뿐만 아니라 시사저널을 거쳐 간 선배들이 몸과 마음을 바치며 만든, 권력과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 시사저널의 정체성에 칼을 들이댄 사상초유의 사건이었다.

 

아, 슬프도다. 소위 시사저널의 사장이란 자는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삼성의 위협에 겁먹어 벌벌 떨며 시사저널 기사를 난도질하는 강도가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사장이란 자가 편집국 간부들과의 회의석상에서 “언론이 힘들 때 기댈 곳은 삼성밖에 없다. 그러니 삼성에 깔짝거리는 기사는 쓰지 말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사장과의 결별을 선언했어야 했다.  

 

아, 17년의 정론지사를 삼성에게 들어 바치고, 시사저널 기자들로 하여금 자본의 노예가 되게 하고는, 뒤늦게 ‘기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변명만 늘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금창태 사장은 사상초유의 날치기 편집권 강탈도 모자라 이윤삼 국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속 인사까지 자행하려 하는가. 이는 금창태 사장과 경영진의 태도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시사저널의 언론정신을 고수할 마음이 없다는 확고한 의지였으리라. 그런데도 어리석은 시사저널 기자들은 그 순간까지 회사 측의 책임있는 반성을 기대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취재에 나설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독자들의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시사저널 편집국 동지들이여, 자본의 노예된 시사저널 식구들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시사저널의 언론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시사저널 기자들은 6월 21일 오전 10시, 비상 총회를 개최한다. 편집국 전 기자들이 총궐기하여 한밤중에 빼앗긴 편집권을 되찾아오고, 편집권을 날치기로 강탈한 사장을 시사저널에서 축출할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은 하루로 족하다. 우리는 곡을 거두고 빼앗긴 우리의 권리를 찾는 투쟁의 한 길로 나설 것이다.

2006년 6월 21일  시사저널 기자협의회     


 

도대체 어떤 기사길래 그들은 두려워했나

 

삭제된 기사 내용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전략기획실장)의 인사 전횡에 관한 것으로 제목은 “이학수 부회장 권력, 너무 비대해졌다”였다. 6월19일 발매예정이던 <시사저널> 제870호(표지 날짜는 6월27일자) 60~62쪽에 걸친 원고지 20매 분량의 기사였다.

 

기사는 <엑스파일>처럼 경천동지할만한 특종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삼성그룹 내부의 권력 지형을 분석하고 비평한 기사였다. 삼성 그룹 2인자인 이학수 부회장이 계열사 사장단 인사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가 삼성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기사는, ‘주요 삼성 계열사 사장단이 이학수 부회장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진지 오래고, 최근에는 CFO들마저 전략기획실 재무팀 출신 인사로 배치되고 있다’는 내부인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학수 맨’으로 분류되는 주요 인물들의 실명과 사진을 싣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학수 부회장으로서는 마뜩치않은 기사지만, 사실 이 내용은 삼성 그룹을 취재하는 출입기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상식으로 통하는 놀라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단지 이를 기사화한 언론이 없었을 뿐이다.

 

편집국 한 기자는 “이번 기사가 삼성의 구조적 비리나, 이학수의 개인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도 아니고, 사내 2인자의 권한이 비대해진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사내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소개한 것 뿐이다. 이런 기사에 대해 삼성이 이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뜻밖이다. 이건희 보다 더한 성역이 이학수인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라고 말했다.


 

 

3년 전, 예언이 현실로!


다시 읽는 그 때 그 성명

 

아래는 2003년 4월 시사저널 신임 사장으로 금창태씨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사저널 기자협회가 긴급 발표한 성명이다. 성명 마지막 문단은 작금의 현실과 비추어 뼈아프게 읽히는 부분이다. 이번 사태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그 때 그 성명을 다시 읽는다.

  

금창태 대표이사 취임에 대한 기자협의회 입장 '금창태 대표이사 발행인 겸 편집인의 임명'.

 

3월31일 '느닷없이' 인사 발령문이 사내 공고판에 게시되었다. 기자협의회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사전 논의도 없는 일방적인 통고로 시사저널의 대표이사이자 발행인 편집인이 발령 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취임식을 한다고 한다. 마치 기습작전을 벌이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번 인사에 대해, 기자협의회에는 절차와 내용 면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중략)

 

기자 일동은 금창태 대표이사 영입 이후 시사저널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는 것이 아닐지 심각하게 우려한다.

 

'시사저널은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히며 자유와 책임의 참언론을 구현합니다.' '한국의 지성, 시사저널'의 창간정신이다. 시사저널은 그동안 독립언론으로서 숱한 고난 속에서도 창간정신을 지켜왔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형적이고 보수적인 언론 독점 구조에서 시사저널의 존재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앙일보 출신인 금 대표이사가 과연 시사저널이 지켜온 창간정신과 이른바 `코드'가 잘 맞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만일 금 대표이사가 독립언론으로서 지켜온 시사저널 정신을 훼손한다면 기자협의회는 결코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기대한다.

2003년 4월1일 기자협의회


 

 

심야의 쿠데타 국장도 몰랐다

 

새벽1시 광고팀장이 인쇄소에 전화해 기사 판갈이

 

<시사저널>17년 역사 초유의 ‘뒷구멍 기사 삭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6월15일 이후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6월15일(목요일)
- 오후 2시 30분경 : 이철현 기자가 삼성에 전화
이날 이철현 기자는 다음 주에 실릴 예정인 기사의 최종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삼성 전략기획실에 전화를 걸어 기사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고 이에 대한 삼성 그룹의 공식 견해나 반박 논리 등을 물었다. (기사 내용 관련 기사 참조) 이에 대해 이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차장은 “윗분과 상의해 답하겠다, 기다려 달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후 삼성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이철현 기자는 15일 오후 3시 기사를 1차 마감하고 취재총괄팀장에게 넘긴다.

 

- 오후 4시 10분 경 : 삼성이 회사로 찾아옴
임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전무와 이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차장이 시사저널을 찾아와 인근 커피숍에서 이철현 기자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임아무개 전무는 “삼성에게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므로 부탁드린다”라고 말했으며 해당 기자는 “삼성에서 민감하게 반응할만한 기사가 아니다. 기사와 관련해 해명할 것이 있으면 추가 반영하겠다. 하지만 이미 기사가 데스크에게 갔으므로 기사를 뺄 권한이 나에게 없다”라고 답했다.

 

- 오후 4시 경 : 사장이 편집국장에게 기사 삭제 요구
비슷한 시각, 금창태 사장이 이윤삼 국장을 6층 사장실에서 면담했다. 금 사장은 이학수 관련 기사를 빼라고 요구했으며 이윤삼 국장은 “기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기사를 보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금 사장은 이철현 기자를 설득하겠다고 나섰으며 이 국장은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통화가 끝난 뒤 금사장은 기어코 이철현 기자를 6층으로 호출해 “삼성이 회사 경영과 관련해 도움을 많이 줬다.기사를 빼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해당 기자가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고 답하며 사장실을 나왔다. 이 때 사장은 이학수 부회장이 자신의 학교 후배라는 사실도 언급했다.

 

- 오후 5시 경 : 국장 기사 게재 결심
장영희 팀장이 ‘기사 보내자 갈수있다’ 라고 하자 이국장은 ‘그러자’ 라고 말함.

 

- 오후 6시 경 : 삼성이 국장에게 전화
임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전무가 이윤삼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 기사는 이건희 회장 관련 기사보다 우리에게는 더 아프다. 기사를 빼는 것을 부탁한다”라고 했고 이 국장은 “임전무 뜻은 알겠지만 기사는 빠지지 않는다”라고 통보했다.

 

- 오후 7시30분 경 : 편집국 내부 논의
이윤삼 국장이 장영희 팀장과 김은남 취재2팀장과 회의를 갖고 기사에 대한 판단을 나누었다. 김은남 팀장은 ‘파괴력 있는 특종성 내용을 담은 기사는 아니지만 다른 언론에서는 다루기 힘든 기사이다. 삼성 내부에서 이견이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충분히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국장은 김 팀장의 의견을 경청했다. 오후 8시 삼성그룹 임아무개 전무의 확인 전화를 마지막으로 이 국장은 더 이상 삼성 측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밤 10시 : 삼성이 기자에게 전화
이아무개 삼성전략기획실 차장이 이철현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기사를 뺄 수가 없으면 미룰 수는 없나?”라고 부탁했으나 역시 기자가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6월16일(금요일)
기사 삭제 압력이 더욱 노골화되고 강해진다.

 

- 오후 3시 : 회장이 기자에게 전화
심상기 회장이 이철현 기자에게 전화해 “기사 내용이 인사 관련이라면 빼는 것이 어떠냐? 인사라는 것이 원래 잡음이 많은 것이고 사기업의 인사 내용이라면 기사화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 오후 6시 : 회장이 국장에게 전화
심 회장은 똑같은 내용의 요구를 이윤삼 국장에게 했으며 이 국장은 “회장 뜻은 알았으니 기자들과 상의해 보겠다”라고 답한다. 이 시각 이후로 국장은 심회장, 금사장, 삼성 그룹 측의 전화를 일체 받지 않고 5층 편집국에서 업무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 오후 7시40분~7시50분 : 삼성이 취재총괄 팀장 찾아옴
임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전무, 이아무개 삼성 전략기획실 차장이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을 방문한다. 임아무개 전무는 “(기사에 거론된) 당사자들은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벌일 수 있다. 삼성에게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므로 부탁한다”고 말했다. 장팀장은 “내가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 오후 8시 : 심상기 회장이 충정로 시사저널 본사에 직접 들어왔다.

 

- 오후 10시
6층에서 심상기 회장, 금창태 사장, 박경환 상무, 현병구 광고팀장 4인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편집국장 동의 없이 인쇄소에 연락해 기사를 광고로 판갈이하자고 결의가 이루어졌다.

 

- 오후 11시
심상기 회장이 충정로 시사저널 본사를 나감.

 

- 오후 12시
이국장과 장영희 총괄팀장이 퇴근했다. 두 사람 모두 이 때까지 회사 상층부의 결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6월17일(토요일)

- 새벽 1시
현병구 광고팀장(부국장)이 삼화인쇄에 전화를 건다. 그 시각 인쇄소에서 <시사저널> 인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양아무개 과장이었다. 양 과장에 따르면 현병구 팀장은 “이미 제작 부서와 다 이야기가 되었으니 기사를 빼고 대신 광고를 넣어달라”라고 요청했고, 양 과장은 별다른 이의 없이 기사를 뺐다고 한다.

 

- 오후 5시~6시 경
금창태사장이 안철흥 기협회장에게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기사 삭제 사실을 알렸고, 그 직후 기협회장이 국장에게 사태를 알림. 이 시각까지도 국장은 기사 날치기 삭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

 

6월19일(월요일)

- 오전10시
편집국 전체회의에서 이윤삼 국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이날 오후 5시 기자협회 비상총회에서 심상기 회장에게 4대 요구조건을 제시했고, 수요일 10시까지 답을 달라고 결의했다.

 

6월20일(화요일)

-오후 12시30분 경
‘이윤삼 편집본부장 의원 면직‘이라는 요지의 인사발령이 편집국 알림벽에 게재되었다. 오후 6시 기자협회 2차 비상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사태의 심각성과 긴박성을 인식하고 편집권 사수를 위한 전면 투쟁을 결의했다.


 

 

사태의 본질은 ‘삼성맨’ 사장

 

시사저널 사장직보다 삼성과의 의리가 더 중요?

 

겉으로 드러난 이번 사태의 발단은 이학수 삼성 그룹 부회장 관련 기사가 편집국장도 모르게 ‘뒷구멍 삭제’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기사 하나가 게재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다.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이 독립 언론의 편집권에 영향을 미치는 메카니즘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연결 고리에는 지난 3년간 삼성을 대변하며 편집권 강탈에만 골몰해온 ‘삼성맨’ 금창태 사장이 있다.

 

비극은 2003년 4월 시사저널 신임 사장으로 금창태 전 중앙일보 사장이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삼성맨’이 시사저널 사장으로 온다는 소식에 기자들은 <시사저널>의 정체성이 흔들릴 것을 우려했지만 회사 측이 ‘금사장은 판매·경영에만 관여할 뿐, 편집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보장함에 따라, 기자들은 그의 <시사저널> 입성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발표된 시사저널 기자협회 성명이 기자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부속기사 참조)

 

취임 이후 금사장은 <시사저널>에 얼토당토 않은 딱지를 붙이면서 보도 성향을 문제삼았다. 그는 “좌파 언론이 되어서는 비전이 없다”라며 “중도 우파 잡지가 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역설했다. 기자들은 “언론사가 무슨 좌파 우파 이데올로기를 따지느냐, 사안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라고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금사장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라고 물러섰지만 이후 금사장은 정치 기사 등을 둘러싸고 편집국 간부들과 빈번하게 갈등을 빚었다.

 

정치 기사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였다. <시사저널>은 정치권력보다 더한 성역이 된 삼성그룹에 대해 공정한 보도를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발생했다. 2003년 제716호 기사에 게재된 문정우 편집장의 칼럼 <우리 현병구 광고부장>은 삼성의 압력에 시달리는 주간지 편집장의 고뇌를 솔직히 드러내 언론계의 화제가 되었다.

 

이런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집국 기자들은 <삼성 구조본 ‘매직 파워’의 비밀>(2005년 04월 29일 경) <구설 오른 ‘이건희 슬로프’> [851호] 2006년 02월 03일 경) 등 다른 언론에서 담지 못하는 삼성 관련 기사를 다뤘다. 기사 90%이상을 삼성 관련 기사로 채운 삼성 통권호를 발행해 언론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2005년 9월12일, 830호). <시사저널>은 44꼭지 75쪽에 걸쳐 할애된 삼성 특집 기사에서 <무노조 경영의 비밀:무노조 신화뒤에 지대위 있었다> <삼성 비판기사 이렇게 막는다> <누가 삼성을 움직이는가> <후계자를 보는 눈> 등 민감한 사안을 다뤘다. 이 특집호가 나간 이후 광고국은 영업에 극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삼성 특집은 이윤삼 신임 편집국장의 주도아래 이루어졌다. 특집이 발행되기까지 이윤삼 국장은 ‘인간적 수모’에 가까운 압력을 회사와 삼성측으로 받았다. 금창태 사장은 삼성으로부터 편집국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보다는 삼성을 편들기에 급급했다. 기사 발행 이후 개별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기사에 등장한 평소 친분이 있는 모 삼성 인사를 옹호하며 기자를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시사저널> 기자들은 이학수 부회장 관련 기사가 ‘뒷구멍 삭제’된 근본 이유가 금창태 사장이 <시사저널> 사장의 정체성보다 ‘삼성맨’으로서의 의리에 더 목매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1938년 8월생인 금사장은 1965년 중앙일보 편집국 기자로 언론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중앙일보는 삼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금사장은 1980년 중앙일보 사회부 부장을 거쳐, 이후 1991년부터 1993년 3월까지 중앙일보 자회사인 동양개발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는 1985년 중앙일보 편집국 국장직무대리에 올랐으나 자신의 후배인 편집국 기자들로부터 임명동의를 받지 못해 끝내 편집국장이 되지는 못했다. 금사장은 1999년 10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중앙일보 사장을 맡았다. 중앙일보가 1999년 4월 형식적으로 삼성그룹과 계열분리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삼성 그룹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한 간부가 전하는 삼성의 대 언론 영향력에 대한 그의 철학은 이러했다. 워낙 자주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라고 한다.

 

‘언론이란 정도를 추구해야한다느니, 불편부당해야 한다느니 해봐야 소용없다. 겉으로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발 밑으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언론은 기업이기 때문에 영업을 해야 한다. 힘들 때 최후에 기댈 수 있는 데는 결국 삼성 뿐이다. 그러니까 삼성에 대해서는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기사 좀 쓰지 말자’

 

그의 전횡을 참다못한 기자들은 지난해 금사장에게 퇴진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시사저널> 사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 시사저널 사장 자리가 자신에게 경제적으로도, 명예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성원들을 모욕했다. 오로지 자신을 불러들인 사주에 대한 후배로서의 도리 때문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한 편집국 기자는 다른 일에는 무능하지만, 유독 삼성 관련 기사를 막는 일에는 뜨거운 열정을 발휘하는 금사장을 보며 “사장이 취임 3년 만에 처음으로 야근하면서 한 짓을 보라”고 평했다. 그의 인생에 그토록 소중한 삼성과의 인연이라면, 그 길로 가는 게 회사와 금사장 개인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시사저널>830.831호
삼성은 어떻게 한국을 움직이나



<시사저널> 811호
삼성 구조본 대해부




<시사저널>851호
구설 오른 '회장님 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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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6-2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막힌 일이네요. 위대하여라 삼성.

물만두 2006-06-2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chika 2006-06-2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상실. ㅡㅡ^

호랑녀 2006-06-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그냥 넘어가면 안되겠지요?
시사저널 편집국에 전화하고 정기구독 해지할까요?
거의 창간 즈음부터 지금까지(모으지는 않지만) 정기구독하고 있었는데...
대단하군요, 삼성.

반딧불,, 2006-06-2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도 안찹니다.
그래도 시사저널은 믿었건만.

가랑비 2006-06-2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후다닥 올리고 회사 행사 땜에 서둘러 나갔다가 주말에 시체처럼 뒹굴고, 이제야 왔습니다. ^^ 조선인님 만두 언니 치카님 호랑녀님 반딧불님 반가워요. 흑흑. 이러다 괜찮은 잡지 하나 망가지는 거 아닌가 몰라요. 호랑녀님, 정기구독 하시는군요. 독자의 힘을 보여주세요. 불끈!
 

바쁘다고, 여유가 없다고, 나중에 보자고...
열어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법원에 호소해달라고 긴급한 메일이 날아오는데도.
대법원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데도.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미안합니다...

천성산, 도롱뇽 소송
바람을 부르는 일
 
 
 

  그동안 천성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 전국의

  도롱뇽의 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천성산 문제를  통해 이 사회가 움직여가는 중심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른들의 세계를  우리의 어린 친구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울음과 분노를 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음을 들키지 않키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왼쪽 민들레 사진을 클릭하면 초록의 공명 영상물이 뜹니다)

 



 "내가 아픈 만큼, 천성산 문제가 중요했어요"  


  [대법원 판결 이후] 지율스님 일문일답              김곰치님 프레시안 기고글   2006-06-02 오후 8:29:26     
 
   
  대법원이 2일 '천성산 터널(원효터널)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공사를 중단할 이유가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린 가운데 전교조 부산지부 사무실에서 '천성산 지킴이' 지율 스님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스님은 이날 오후 "아직 판결문을 받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침묵하면 대법원의 판결 내용이 다 옳다고 생각할까 우려했다"고 급히 회견장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다음은 소설가 김곰치 씨가 기자회견 현장에서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현실과 동떨어진 2003년 보고서 참조
 
  - 판결문을 보면, 이번에 환경공동조사를 정밀하게 실시했고,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평가에 의하더라도 터널공사가 환경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돼 있습니다.
 
  "천성산을 두고 지금까지 환경영향평가를 다섯 번 했습니다. 94년에 첫 환경영향평가가 있었고, 그때는 도롱뇽이라든지 지하수, 양산 지역의 활성화 단층 문제, 그리고 생태계보존지역, 늪과 계곡 등 천성산의 가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성산 일을 시작했고, 그 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속철도공단에서 3번에 걸쳐 영향평가를 하게 됩니다. (판결문에 언급된) 대한지질공학회에서 한 것은, 활성화 단층이나 생태계 문제점이 전혀 언급이 되지 않은 2003년도 보고서입니다.
 
  이번에 3개월 동안 새로 한 것이 있는데, 대법원에서 그 결과를 중심으로 판결을 내리리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시간적으로 많이 거슬러 올라간 2003년도 보고서를 참조할 줄은 몰랐습니다. 또 한국환경정책평가원의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평가서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지질공학회는, 천성산의 늪 밑이 화강암으로 돼 있다고 했었어요. 근데 이번에 조사를 해보니 화강암이 아니라 실트질 모래였습니다. 또 늪 밑으로 물이 오가는 화분구조로 돼 있다고 시추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늪과 지하수의 연결성이 나온 것입니다.
 
  사실 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성산 주변의 주민들이 이미 지하수 고갈, 늪지 고갈, 저수지 고갈로 고통을 받고 있고 공단과 합의 과정에 있다는 겁니다. 현상이 지금 드러나고 있는데 현상과 반대되는 과거의 보고서를 가지고 재판이 이뤄졌다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 천성산 일대의 지질적 특성이 설계 및 공법에 충분히 반영된 만큼 환경이익이 침해될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심과 2심에서 주된 논거로 제시된 대한지질공학회 보고서에는 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온다고 했습니다. 근데 이번 공동조사에서는 분당 1톤이 빠진다고 나왔습니다. 하루에 1400여 톤입니다. 충? 瑾?예측하고 대비한다고 해도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지하수 유출 문제는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과 맞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현재의 통설이나 기존의 판례상 신청인들이 환경권을 근거로 공사금지를 청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환경권을 이야기한 것은, 사회와 개인의 환경권을 이야기한 부분도 있지만, 실은 천성산 자체가 열 개의 보존구역입니다. 생태계보존구역, 습지보전구역, 문화재보존지역, 전통사찰보존지역, 자연환경보존지역, 야생동물보호구역, 도립공원, 산림보호구역 등 여섯 개 국가 부서에서 열 개의 법적 보존구역으로 묶어 놓았는데, 지금 그 훼손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인적 가치의 문제나 환경이익의 침해라는 말 자체가 저는 합리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지난 3월부터 지하수 유출과 관련하여 유량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그만두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유량조사가 천성산 문제를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1년 후에도 오늘의 법원 결정처럼 천성산과 지하수와 생태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를 바라지만, 문제는 현상으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고속철도 터널이 지나가는 전국의 전 구간에 지하수가 유출되고 있고, 39개의 저수지 중 몇 개가 말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데, 아무 문제 없다니…"
 
  - 대법원에서 결정이 나와 이제는 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는데, 계속 유량조사를 하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천성산 문제를 통해 사회가 움직이는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언론이, 시민들이, 전문가들이, 시민단체가…. 종교인들도 물론 반성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가치관으로 움직여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유량조사가 할 것입니다.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영향이 없다고 했어요.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영향을 느끼는데. 터널을 뚫는데 물이 안 샌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상식이니까요. 그런데 정부와 공단은 상식에 벗어난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터널이 뚫리는 구간 열 개 지역을 답사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대한 터? 括?황악사 직지터널인데요, 겨울 갈수기에 조사하니 하루에 450톤 물이 빠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터널이 배수터널이고 물이 빠지는 것이 상식인데, 유량조사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 소송 결과가 나왔지만, 저희는 1년 후 천성산이 어떻게 변했는지, 3년 후 계곡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태계보전지구인 무제치 늪은 어떻게 마르는지 유량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쓸 생각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천성산을 다녀갔고, 조사하고 보고서를 냈는데, 그 전문가들을 향해 법원의 답을 구할 것입니다."
 
  - 그동안 수 차례 단식을 했는데, 마지막 단식 후 회복은 어떤지.
 
  "개인적으로는, 단식 후 회복을 별로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천성산을 의심해본 적이 없듯이 그냥 자연에 맡긴다는 마음으로 병원에 다니지 않고 약물치료를 하지 않고 있고요. 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게,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아픈 만큼, 이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아프고 제가 마음 상한 만큼, 천성산 문제가 나한테는 중요했구나, 생각을 했어요.(눈물) 제가 차라리 아플 수 있을 때가 좋은 때라는 생각도 했어요.(눈물)"
 
  - 이번 소송이 가처분신청인데, 만약 환경파괴의 명확한 근거들이 나온다면, 본안소송이나 법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유량조사를 계속 한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환경파괴의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난다면, 법적 소송도 다시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소송이 제기되겠지요. 근데 법적 소송의 대상이 누구냐는 문제가 더 큰 문제예요. 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천성산 공사를)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법적 소송을 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차라리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 오늘 판결로 인해 일부에서 '봐라, 아무 문제 없지 않느냐, 대법원도 터널공사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느냐' 하고 그동안 문제를 제기해 온 스님한테 비난이나 질타가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차라리 제가 틀렸기를 바랍니다. 제가 욕을 먹고 (천성산에) 정말 피해가 없기를 바래요. 제가 원하는 건 어쩌면 그것밖에 없습니다. 천성산에 아무 피해가 없이 고속철도가 건설되기를 바랍니다. 저를 비난하는 그분들이나 법원이 옳기를 바랍니다. 근데 문제는 (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4년 넘게 천성산 문제에 매진해 오셨는데, 어쨌거나 대법원이 기각 판결을 냈습니다. 지금 개인적인 심정은 어떻습니까?
 
  "저는 천성산을 생각할 때마다, 많은 비유를 했지만, 그 중 한 가지가 '천성산,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바람을 불러 홀씨를 날려보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공사구간 중 3km 구간에 내원사 법적 소유의 4개 계곡이 들어가지만, 직접적인 피해자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내원사를 소송의 중점에 두지 않고 도롱뇽과 41만 친구들을 소송의 원고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개발과 발전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같이 서로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천성산이라는 이야기, 도롱뇽이라는 이야기, 늘 말과 꿈과 신화의 이야기라고 저는 말합니다. 이것이 비록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정말 현실입니다. 제가 지금 있는 곳은 산골 오지입니다. 연세가 팔십, 구십 된 노인들께서 이 많은 계곡에 가재가 없어진 지 오래됐다고 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은 계곡의 가재와 도롱뇽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이땅에 그 생명들을 불러보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치적이거나 거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행정적인 부분은 지금은 묻어두고 덮어둬야 할 때가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승패에 있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여러분들과 천성산을 통해 희망의 지도를 만들어나가자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위 영상물의 소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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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6-0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가랑비 2006-06-2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감사.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2006-05-30 [마이페이퍼] 안경을 벗으면_까트린 이야기 70


글 올린 지 이틀 만에 어느 분이... 고맙습니다. ^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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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5-3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가끔 들어오는 '비폭력대화'의 '고마워요'를 보면 벼리꼬리님이 떠올라요. ^^
(땡투,라고 썼다가 수정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써요 ^^;;)

마늘빵 2006-05-3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처음인가요? 나도 처음에 뭐였는지 궁금하네.

이매지 2006-05-3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늘 벼리꼬리님 서재는 처음 와보는데 저 페이퍼 참 좋네요^^

마늘빵 2006-05-3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림노래의 단초를 마련해주신 벼리꼬리님께 한표 꾹. 제가 돌림노래 시작했습니다.

물만두 2006-05-3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축하^^

울보 2006-05-3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가랑비 2006-06-0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치카 뿡뿡!!님^^ 아프님 이매지님 만두 언냐 새벽별님 울보님 감사감사! 이매지님 저여요, 저. ^^

2006-06-0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6-06-1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6-09 22:50에 속삭이신 님/헤헷. 고맙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