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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초원의 빛 ㅣ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1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어릴 적엔 에밀리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다. 내게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그저 빨간 머리 앤의 작가일 뿐이어서, 에밀리 시리즈의 1권인 이 책, “에밀리 초원의 빛”을 읽을 때는 내내 에밀리와 앤이 비슷한 점, 다른 점을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2권 “에밀리 영혼에 뜨는 별”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에밀리를 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3권 “에밀리 여자의 행복”을 다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에밀리가 좋아졌다.
책을 읽는 동안 그저 에밀리가 좋지만은 않았던 것은, 사람이 다 그렇듯이, 에밀리에게는 사랑스러운 점도 있고 미운 면모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2권 112쪽) 하고 다짐할 때도 좋지만, 성서에 나오는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비유*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나는 지혜로운 처녀가 싫어. 너무 이기적이니까. 그녀들은 그 가련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조금쯤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저 부정한 집사나 마찬가지로 저런 처녀들에 대해서도 칭찬할 생각이 없으셨을 거야. 단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부주의하거나 어리석게 행동하면 빈틈없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므로 주의하라고 하고 싶으셨을 거야. 나라면 집에서 영리한 처녀들과 맛있는 것을 먹기보다 밖에 있는 어리석은 소녀들 가운데 섞여 그들을 돕고 위로하고 싶을 것 같은데”(2권 124~125쪽)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선 이런 생각을 내게 들려준 것이 고마워 에밀리를 꼭 껴안고 싶다. 성서의 이 부분에 대한 보수 기독교의 설교를 완전히 뒤집는 해석이다!
* 마태복음 25장에서(공동번역성서)
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하지만 ‘뉴문의 머리 집안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자꾸 들먹이고, 페리를 스스럼없는 친구로 삼아 잘 대해주면서도 “분명 스토브파이프타운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2권 353쪽)고 일기에 쓰는 걸 보면 에밀리가 미워진다. 나도 지금까지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통해 습득한 편견을 다 깨뜨리지 못했지만.
작가는 이 책을 에밀리의 ‘전기’라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2권 이후 일저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쉽다. 1권에서 나는 에밀리보다 야성적인 일저가 더 좋았다. 맨발로 숲을 뛰어다니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비겁한 짓에는 당당히 맞서고... 그런데 2권 이후 일저는 그냥 예쁘고 천방지축인 아가씨가 되어버렸다. 작가는 일저가 아름답고 매력 있다고 되풀이 ‘설명’하지만, 등장인물의 매력은 설명될 게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와 닿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에밀리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자꾸 쓰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건, 그만큼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기대와 희망과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게 아닐까. 또 부러웠던 건 에밀리가 끊임없이 교감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자연이다. 숲과 바람과 늘 대화할 수 있다니.
이들 책의 원제는 각각 Emily of New Moon(1923), Emily Climbs(1925), Emily's Quest(1927)인데, 3권의 번역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밀리 여자의 행복”이라니, ‘여자의 행복’이라는 게 따로 있단 말인가?
조선인님, 연보라빛우주님, 수니나라님 덕분에 이들 책을 장만했습니다. 고마워요! 세 분이 선물해주신 게 2004년 12월... 헉.
(덧붙임) 한 가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빼먹었다. 에밀리 이야기는 앤 이야기에 비해 "현실적"이다. 그래서 앤 이야기 등장인물들의 단점들이 때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과 달리, 에밀리 이야기 속 사람들은 실제로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견디기 어렵기도 하고 은근히 정이 들기도 한다. 좀더... 어른다운 이야기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