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나의 마을
타시마 세이조 지음, 박종진 옮김 / 뜨란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그새 절판되었네. 상품 정보에는 출간일이 2002년 6월 24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건 표지를 바꾸어 새로 펴낸 날짜이고, 내게 있는 책은 2000년 8월 18일 1판 1쇄를 펴냈다고 인쇄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그림 속 나의 마을]

내가 이 책을 살 무렵, 이 책을 소재로 만든 일본 영화가 막 수입 개봉되었다. 난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맑고 아름답게 펼쳐지리라 생각했고, 책도 그러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책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물론 일본이 패전한 후 어려웠던 시절, 병약했던 작가와 쌍둥이 형이 어른들 속을 무던히도 썩이면서 시냇물과 물고기와 새와 원시적 생명력을 경주했던 이야기가 팔팔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살던 시골 마을 어른들은 순박하고 착하지만은 않았다. 동구 밖 산기슭의 동굴에 떠돌이 늙은이가 와서 자리 잡자 ‘괜히 저런 데서 불 피우다가 산불이 나면 큰일난다’며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가서 떠돌이를 몰아내고, 민주 교육을 시도하는 젊은 교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쌍둥이 형제도, 낚시하러 갔다가 물고기가 낚싯줄을 끊고 도망쳐 낚싯바늘을 잃으면, 낚시도구를 파는 늙은 조선인 부부의 집에다 돌을 던지며 “조센진! 조센진!” 하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괴롭힘당할 때 옆을 지켜주던 센지(마을 전체의 기피 인물이었던)가 누명을 쓰고 교장에게 매를 맞을 때도, 정의감이 강한 엄마가 무슨 까닭에선지 센지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을 때도 쌍둥이 형제는 감히 나서서 센지를 위해 변호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솔직히 내보인 점, 그게 바로 이 책의 가치 아닐까. 어찌 어린 시절이 아름답기만 하며 어찌 시골이 순박하기만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사실을 아프게 인정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작가가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에게도 숨기면서, 문득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잘못을 솔직히 사죄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나는 아직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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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6-10-24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치를 간파(?)해부리시는데, 어찌 성숙하시지 않았다 말씀하실까요. 깨달음없는 저같은 중생 더 부끄러워질라 캅니다.

가랑비 2006-10-2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님, 무슨 송구스러운 말씀을. 제가 워낙 살면서 찔리는 짓을 많이 한지라. 흠흠.
 

(차마 제목에 쓰기 끔찍해서)

얼마 전에 어느 기자와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이야기하다가 그 기자가 저한테 언제부터 이 회사에서 일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올 1월부터라고 했더니 그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고 다시 묻기에,
2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웃으며, 왜 그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다시 얽혀들었냐고 하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
프리랜서로 일하면, 어쩐지 내 책 같지가 않더라고 대답했어요.
내가 만든 책은, 지은이의 책이기도 하고 출판사의 책이기도 하고,
또 편집자의 책이기도 한데,
지은이와 직접 교류하지 않고, 또 기획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주어진 일만 돈 받고 하다 보면 내 책 같지가 않더라고.
그러면서 제가 한 말이 “대리모가 된 기분이라 할까.”였어요.

말해놓고는 아차 싶었습니다.
편집자들은 종종 힘들게 책 만드는 과정을 ‘산통’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해산 경험도 없는 제가,
산통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그 일에
제가 하는 일을 비유하는 건, 주제넘은 짓 같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대리모’란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TV에서
한국인 여성들이 일본인 불임부부에게 대리모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자궁 식민지’가 될 우려가 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국인 여성들이 대리모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보다,
전 저 ‘자궁 식민지’라는 말이 더 끔찍했습니다.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이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저런 말을 했다는군요.

세상에.
‘대리모’는 여성의 가난, 여성의 몸, 불임부부의 선택, 세상에 자녀를 내보낸다는 것 등등에 대해
생각할 것이 아주 많은 주제입니다.
대리모가 된다는 것, 대리모를 고용한다는 것,
누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는가,
그것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가능한가...
그런데 단지, 일본인에게 고용되는 경우가 많은 사실 하나만을 두고,
‘자궁의 식민지’라고 표현하는군요.
그럼 한국인에게 대리모로 고용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요?
이야말로 여성의 몸을 민족(국가)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데서
나온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TV의 보도는 다행히 ‘자궁의 식민지’에 중점을 두지 않고,
대리모를 지원한 이들의 어려운 사정과
아들이 아닐 경우 낙태하는 조건이 담긴 계약
(대리모를 고용한 한국인 남성이 요구한 것이었음) 등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뉴스메이커 편집장인 유인경 씨가
일본이든 어디든 이건 여성의 몸과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해줘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분은 (제 생각에) 곧잘 뻘 소리를 해서^^
평소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굉장히 불쾌해서 MBC 게시판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제가 섣부르게 입을 놀려서 벌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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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0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6-10-2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정말 끔찍하네요. 저 동네에선 왜 저렇게 자극적인 말들을 하나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 생각이란걸 하긴 하는건지.

가랑비 2006-10-2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고맙습니다. 다른 님들 서재에선 곧잘 뵈었는데, 반가워요.
하이드님/그래도 다행이어요. 이 말에 인터넷이 들썩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조용한 듯해서...

진/우맘 2006-10-2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정말, 입에 담기도 끔찍하네요....

가랑비 2006-10-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그렇지요. 저놈의 국회의원이 한 방 터뜨릴 욕심으로 저런 자극적인 말을 만들어냈나 봐요.
행복나침반님, 일본이 전후 책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한국인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감정적이고 유치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분명 사실이지요. 저는 대리모보다, 대리모를 써서라도 자기(혹은 자기 남편)의 정자로 아이를 낳고 말겠다는 불임부부들의 선택이 더 연구, 논의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대리모 고용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대리모라는 게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왜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사는 걸까요. ^^
회사에서 멀지도 않은 난지도 하늘공원,
동료 덕분에 알게 되어
어제 저녁 오랜만에 나무 냄새 들이마시며 걷고,
노랑 빨강 파랑 조명이 물결 치는 억새밭을 헤매다닐 수 있었어요.
사진기를 깜박 가져가지 않아 
같이 간 언니가 찍은 사진 좀 빌리려 했더니
잭을 집에 두고 왔다고. -.-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  http://worldcuppark.seoul.go.kr/park/p_eularia20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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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2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느낌만 간직하면 그걸로도 족하리^^

urblue 2006-10-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서 가까운 하늘공원, 억새밭 한 번 걸어볼랬는데, 이래저래 못 가고 있어요. ㅠ.ㅜ

가랑비 2006-10-2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 언니/^^
블루님/오늘 밤에 가보세요! 밤 9시까지만 가면 돼요. 돌아보는 데 1시간 반이면 넉넉합니다. 게다가 입장 시간 제한은 있는데 퇴장 시간 제한은 없더라구요. 앤님이랑 꼭 손잡고 가시길. ^^

2006-10-20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6-10-2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좋은 곳이라니.
가깝다니 부럽습니다. 억새를 본게 언젯적인지 참.

가랑비 2006-10-2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계신 곳 근처에 더 좋은 곳이 많잖아요 뭐. ^^

세실 2006-10-2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기 다녀오신 거군요~~~ 여행가고 싶은 요즘, 억새밭도 걸어보고 싶어요~~~

가랑비 2006-10-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실님께서 사진 찾아주셨군요~ ^^ 야경은 야경대로 예뻤답니다.
 

오랜만에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를 펴든다.
오늘 읽은 부분은 ‘술 취한’ 말들이다.
마음에 든다. ㅎㅎ

술에 취하는 첫 단계는 ‘우럭우럭하다’라고 한다.
술기운이 ‘차츰’ 얼굴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리킨다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우럭-우럭
「부」「1」불기운이 세차게 일어나는 모양. ¶모닥불이 우럭우럭 피어오르다. §「2」술기운이 얼굴에 나타나는 모양. ¶워낙 술을 못하는지라 그는 술이 한 잔만 들어가도 술기운이 얼굴에 우럭우럭 나타난다. §「3」병세가 점점 더하여 가는 모양. ¶방치하는 사이에 그녀의 병세가 우럭우럭 더해졌다. §「4」심술이나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르는 모양. ¶정신없이 뛰어왔던 일을 생각하니 트릿한 마음이 우럭우럭 뻗질러 올라, 무섭게 박 서방을 노려보았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차츰’보다는 좀더 세찬 표현 같지 않은가?
아무튼 술기운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거슴츠레 눈시울이 처진 모습은 ‘간잔지런하다’란다.

간잔지런-하다
「형」「1」매우 가지런하다. ¶산 밑으로 기와집들이 간잔지런하게 늘어서 있다./하관이 빠른 갸름한 얼굴에 콧날이 준수한 그는 간잔지런하게 기른 코밑수염이 이미 반백이었다.≪김원일, 불의 제전≫§「2」졸리거나 술에 취하여 위아래 두 눈시울이 서로 맞닿을 듯하다. ¶졸음이 밀려오는지 그는 눈이 점점 간잔지런해지기 시작했다. §

마태우스님 술 마신 사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간잔지런한 표정이라 하겠다. 호호.

술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하는 상태는 ‘거나하다
거나하게 취하여 정신이 흐릿한 것은 ‘건드레하다’ ‘얼근하다
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이 어렴풋한 것은 ‘얼큰하다’(‘얼근하다’보다 큰 말)
술이나 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못 가누는 것은 ‘곤드레만드레하다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자는 것은 ‘곤드라지다
(그러니까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곤드라지는 것!)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의 지은이는 술 취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술에 얼근하게 취하여 거나하다는 뜻인
해닥사그리하다’라고 했는데, 나도 참 마음에 든다.
‘술에 취해 한창 기분이 좋은 술꾼의 모습이 눈앞에 보는 것처럼 그려지는 말’이라나.
웬일인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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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6-10-1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마태님은 간잔지런한 표정의 대가시죠....^^
(맨 정신에도 가능하다는 설이....^^;;)

물만두 2006-10-1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럭먹고싶다=3=3=3

가랑비 2006-10-19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ㅎㅎㅎ 그 설이 맞을 것 같아요.
만두 언니, 오옷, 저도요. 꼴깍.

아영엄마 2006-10-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남편은 술 취하면 곤드라져서 다음 날 낮에 출근하곤 합니다. -.-;;

가랑비 2006-10-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뜩금. =3=3=3

2006-10-20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고모리 요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니 ‘군대를 포기한다’는 일본 헌법 9조는 대단한 법이다. 어떤 나라가 군대를 포기한단 말인가? 전쟁 범죄를 저지른 국가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같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어째서 군대가 있을까? 뭐, 사실 자위대를 군대가 아니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적어도 일본 헌법 9조에는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단 말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말에 함정이 있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전쟁 · 군대 포기 조항은 바로 천황을 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항복 선언 뒤 연합국의 정부들은 당연히 천황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물으려 했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서 법정에 서야 하고 천황제는 폐지될 참이었다.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려면 뭔가 획기적인 것을 대신 제안해야 했고, 그래서 일본 최고위 정치인들과 맥아더 군정은 군대와 천황을 맞바꾼 것이다.

그러면 전쟁 책임은 누가 지는가? 아니, 누가 누구에게 지는가? 항복 직후 일본 정부는 ‘일억 총참회론’을 내세웠다. “우리나라가 패전한 원인은 전력의 급속한 괴멸에 있었다. …… 원자폭탄의 출현과 소련의 진출…… 너무나도 많은 규칙과 법률이 남발되었고, ……또 국민 도덕의 저하도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 지금 군관민,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94-95쪽) 그러니까 히로히토와 정부 · 군부의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일본 국민과 식민지 민중 앞에서 전쟁을 결정하고 강행한 데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는 게 아니라, 군관민, 곧 일본 국민 전체가 천황 앞에서 전쟁에 져서 죄송하다고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국 정부들에 대한 책임은 군부 지도자들이 전범 법정에서 졌고, 히로히토는 다만 제사장으로서 이세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영령’들을 위로했다.

신(臣)으로서의 병사가 군(君)으로서의 천황에게 바친 충성에 기초하는 전사(戰死)는 국가를 위한 죽음이 되고, 그 전사자의 영혼은 제사 대권을 가진 현인신인 천황의 참배를 받음으로써 ‘국가의 신령(神靈)’이 된다. 이러한 ‘야스쿠니’의 논리는 청일전쟁 때 전국화되었고, 러일전쟁 때 발생한 방대한 전사자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전사자의 영혼에 ‘영령’이라는 말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영령’은 ‘천자’에게 ‘위령(慰靈)’되어 비로소 ‘호국의 신’이 되는 것이다.(144쪽)

이것이 바로 그토록 야스쿠니가 중요한 까닭이구나. 요즘도 현충일이면 들려오는 ‘호국 영령’이란 표현이 새삼 소름 끼친다. 전쟁에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찬미하는 순간, 국가주의의 폭력은 은폐되고 숭고한 희생만 남는다. 이들의 죽음은 숭고하니, 너도 ‘국가를 위해’ 숭고하게 죽으라는 선동.

일본인 중에, 일본이란 나라가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이 가해자 국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떤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책임에 부응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인 지은이는 ‘문학자인 내가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서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이른바 ‘옥음 방송’―해방기를 다룬 한국 드라마에서도 곧잘 나오곤 하는, 라디오로 방송된 항복 선언―의 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히 읽고, 또 패전 직전부터 이른바 ‘전후 체제’ 형성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미군정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히로히토가 어떻게 전쟁 책임을 피해갔으며 현대 일본인의 ‘전후’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고자 했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해석한 듯한 부분도 가끔 있지만...
우리 앞에는, 응답해야 할 어떤 역사적인 책임이 없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서 종전 처리가 진행되었던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에 읽은 [도쿄대재판](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033371)이 꽤 도움이 되었다.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지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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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10-1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선물해주신 마태우스님 고맙습니다~!

산사춘 2006-10-18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국망령들이 여직 힘을 뻗치고 댕긴다는게 부끄러운 일입지라. 묵과하고 넘어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해자가 된다는 걸 다시 명심해 봅니다.

가랑비 2006-10-1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님, 가만히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가 된다... 아, 정말 무서운 일이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