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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고모리 요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니 ‘군대를 포기한다’는 일본 헌법 9조는 대단한 법이다. 어떤 나라가 군대를 포기한단 말인가? 전쟁 범죄를 저지른 국가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같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어째서 군대가 있을까? 뭐, 사실 자위대를 군대가 아니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적어도 일본 헌법 9조에는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단 말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말에 함정이 있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전쟁 · 군대 포기 조항은 바로 천황을 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항복 선언 뒤 연합국의 정부들은 당연히 천황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물으려 했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서 법정에 서야 하고 천황제는 폐지될 참이었다.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려면 뭔가 획기적인 것을 대신 제안해야 했고, 그래서 일본 최고위 정치인들과 맥아더 군정은 군대와 천황을 맞바꾼 것이다.
그러면 전쟁 책임은 누가 지는가? 아니, 누가 누구에게 지는가? 항복 직후 일본 정부는 ‘일억 총참회론’을 내세웠다. “우리나라가 패전한 원인은 전력의 급속한 괴멸에 있었다. …… 원자폭탄의 출현과 소련의 진출…… 너무나도 많은 규칙과 법률이 남발되었고, ……또 국민 도덕의 저하도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 지금 군관민,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94-95쪽) 그러니까 히로히토와 정부 · 군부의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일본 국민과 식민지 민중 앞에서 전쟁을 결정하고 강행한 데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는 게 아니라, 군관민, 곧 일본 국민 전체가 천황 앞에서 전쟁에 져서 죄송하다고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국 정부들에 대한 책임은 군부 지도자들이 전범 법정에서 졌고, 히로히토는 다만 제사장으로서 이세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영령’들을 위로했다.
신(臣)으로서의 병사가 군(君)으로서의 천황에게 바친 충성에 기초하는 전사(戰死)는 국가를 위한 죽음이 되고, 그 전사자의 영혼은 제사 대권을 가진 현인신인 천황의 참배를 받음으로써 ‘국가의 신령(神靈)’이 된다. 이러한 ‘야스쿠니’의 논리는 청일전쟁 때 전국화되었고, 러일전쟁 때 발생한 방대한 전사자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전사자의 영혼에 ‘영령’이라는 말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영령’은 ‘천자’에게 ‘위령(慰靈)’되어 비로소 ‘호국의 신’이 되는 것이다.(144쪽)
이것이 바로 그토록 야스쿠니가 중요한 까닭이구나. 요즘도 현충일이면 들려오는 ‘호국 영령’이란 표현이 새삼 소름 끼친다. 전쟁에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찬미하는 순간, 국가주의의 폭력은 은폐되고 숭고한 희생만 남는다. 이들의 죽음은 숭고하니, 너도 ‘국가를 위해’ 숭고하게 죽으라는 선동.
일본인 중에, 일본이란 나라가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이 가해자 국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떤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책임에 부응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인 지은이는 ‘문학자인 내가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서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이른바 ‘옥음 방송’―해방기를 다룬 한국 드라마에서도 곧잘 나오곤 하는, 라디오로 방송된 항복 선언―의 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히 읽고, 또 패전 직전부터 이른바 ‘전후 체제’ 형성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미군정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히로히토가 어떻게 전쟁 책임을 피해갔으며 현대 일본인의 ‘전후’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고자 했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해석한 듯한 부분도 가끔 있지만...
우리 앞에는, 응답해야 할 어떤 역사적인 책임이 없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서 종전 처리가 진행되었던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에 읽은 [도쿄대재판](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033371)이 꽤 도움이 되었다.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지음(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