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악마 창비세계문학 27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조혜경 옮김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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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보물이 나온다. 물론 보물을 건지는 일은 전적으로 탐험가의 손에 달렸다. 탐험가가 보물이 파묻힌 곳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보물을 건질 확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서 보물이 있을 만한 지역을 골라본다면 러시아는 절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널리 알려진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이 지금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러시아 작가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당신 또한 적지 않은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표도르 솔로구프. 이번에는 이 이름을 그 바다에서 건졌다.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가장 큰 소감은 ‘러시아라는 바다, 문학의 보물창고’ 와도 같은 그곳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 있었다니! 아니, 숨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테니까. 이 새로운 작가를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뒤표지에 쓰인 문구 때문이었다. ‘인간 내면의 비열한 악마성과 추악한 현실 속, 악의 형상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잇는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


책장을 펼치자마자 의미심장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난 사악한 여자 마법사를 불에 태우고 싶었다.’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착한 소설, 감동으로 독자를 감화할 작품은 아니라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1장부터 <허접한 악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고약한 소설’이다. 시작부터 인간의 온갖 비열하고 추접한 근성이 여과 없이 폭로된다. 아니, 폭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떤 장소에 이런 인간들만 모여 있다면 정말 단 한 시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런 속성을 지니지 않았던가? 단지 그러지 않은 척, 잘 포장하고 있을 뿐.


그런데 <허접한 악마>의 인물들은 그런 포장을 모른다. 악하고 못된 모습 비열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온갖 모습을 ‘그냥’ 드러낸다. 주인공인 중학교 교사 ‘뻬레도노프’는 그중 단연 독보적이다. 이 인간은 장학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꿈이다. ‘그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들을 싫어했으며 자신의 이익 및 만족과 연관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19~20쪽)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책이 보이도록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떠한 견해도 없었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88쪽)은 그런 인간이다. 다음과 같은구절을 읽노라면 그의 인간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뻬레도노프는 천상에서 전해지는 이런 낯선 풍경 가운데 더럽고 무기력한 지상의 거리들과 집들이 풍기는 나른함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지쳐갔다. 그는 숭고함도 지상에서의 어떤 위로도 찾지 못했다. 지상의 고독 가운데에서 두려움과 애수에 지친 악마처럼 죽은 자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은 무뎌졌고 그의 인식은 타락과 파멸의 수단이 되었다. 그가 인식하기 이전에 그에게 도달하는 모든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 그는 깨끗하고 곧은 기둥 옆을 지나갈 때면 그것을 구부리고 더럽히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 기둥을 뭔가로 더럽힌 것을 발견할 때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깨끗하게 씻은 중학생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괴롭히고 싶어 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더 잘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물건도 없었다. (143쪽)


뻬레도노프는 자기 능력으로 장학사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비열한 인간은 생긴 건 또 반반한지 여자들이 줄을 선다.  늙고 못생긴 ‘바르바라’ 또한 그런 여자 중 하나이다. 바르바라는 뻬레도노프의 장학사 자리를 꿰차고 싶어 하는 그 속물근성을 훤히 꿰고 있다. 공작부인과의 확인되지 않은 친분을 이용해 ‘공작부인이 자신과 결혼하면 당신에게 장학사 자리를 약속’하셨다고 뻬레도노프를 흘린다. 뻬레도노프는 그 이야기에 물론 솔깃하고, 바르바라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이런 그들 사이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보통 다음과 같다.



“주근깨 아가씨요? 개구리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입이 큰 아가씨죠.”
바르바라는 점점 악의에 가득 차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너보다 아름답지. 그 여자를 택해서 결혼할 수도 있어.”
뻬레도노프가 말했다.
“그 여자와 결혼한다면 그년의 눈깔에 염산을 확 뿌려버릴 거야!”
바르바라는 분노에 가득 차서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면서 말했다.
“네게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데.”
뻬레도노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뱉지 마!”
바르바라가 소리쳤다.
“뱉을 건데.” (33쪽)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연인(?)의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작품 속에서 내내 거의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결혼 상대자로서 1순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뻬레도노프는 장학사 자리를 노리는 게 가장 크고, 바르바라는 늙고 못생긴 외모로 누구 하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처지에 뻬레도노프 정도의 남자를 ‘장학사’ 카드로 낚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쉽사리 그를 포기하지 못한.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는 과연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뻬레도노프라는 인물 그 자체에 있다. 이 인간은 교사라는 직분을 그저 중학생들을 괴롭히는데 쏟는다. 가정 방문까지 하면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부모 앞에서 해당 학생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그 학생이 부모에게 혼나는 광경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즐긴다! 게다가 바르바라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있는 고양이도 곧잘 학대한다. 이렇게 혐오스러운 캐릭터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면서도 이 인간은 바르바라가 자신을 독살할지 모른다는 망상, 동료가 자신의 지위를 노려 자기의 치부를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날마다 시달린다. 가학과 피학 성향은 물론 비루한 속물근성에 병적일 정도의 피해의식까지! 정말 인간의 온갖 나쁜 습속은 그 안에 모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모습을 두루 갖춘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 속에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허접한 악마>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온갖 악랄함을 사랑하는 뻬레도노프 그 자신이 바로 ‘허접한 악마’일 텐데,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이 인물에 크게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편 <허접한 악마>는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로 대변되는 온갖 저열한 세계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뻬레도노프의 제자인 중학생 소년 싸샤와 자유분방한 아가씨 류드밀라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류드밀라는 한때 뻬레도노프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는데, 청순한 미소년 싸샤를 보고는 반해버려 그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 싸샤는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타락한 인간 뻬레도노프와 반대되는 인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도 시간이 갈수록 류드밀라와의 유희 속에서 점차 그 순수함을 잃어간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엇갈리듯 교차하다가 막판에 가면무도회라는 ‘난장판’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서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허망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각자 전개해나가다가 하나로 모아서 폭발시키는 작가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허접한 악마’인 뻬레도노프를 그저 미워할 수많은 없는, 독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인물이 곁에 있다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싫을 것 같은데, 작품으로 그의 행동을 엿보고 있노라면, 이 가련하고 허접한, ‘악마’조차 되지 못하는 비루한 인간에게 묘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노라면 한두 번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생각했을 수밖에 없는 속물적인 보통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랴, 누구에게 혀를 끌끌 차랴….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병적인 인물들과 함께,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의 침대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오블로모프’- 그리고 표도르 솔로구프의 허접한 악마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이 창조한 가장 잊기 힘든 주인공일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런 인물들이 엮어나가는 온갖 사건 속에서 생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운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러시아 문학을 읽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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