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레이스, 그녀는 정말 잔혹한 살인자일까? 아니면 순진무구한 희생자일까? 600쪽 내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여성에게서 보고 싶은 면(악녀 아니면 순진한 희생자)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을 19세기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집요하게 추적한다. 애트우드는 진정,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만 알고 싶지만, 나만 알기에는 매우 아까운 작품이 있다. 숨겨진 명작이라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이 땅에서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명작일지도 모르겠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이 그렇다. 나는 이 두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전율했다. 이런 작품이 있다니! 그런데도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다니! 최근에 다시 읽었다. 좋은 작품은 여러 번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읽을 때마다 그 의미를, 깊이를 곱씹게 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그 날 것 같은 느낌, 과장된 몸짓 때문에 나는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희곡이 훨씬 좋다. 내가 무한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연극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극 연출가라면 이 두 작품은 꼭 무대에 올리고 싶을 것 같다. 상연하기에도 꽤 적절하다. 단,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야 한다. 섣부른 연기자들에게 맡겼다가는 원작이 지닌 예리함도 강렬함도 모두 빛이 바랄 것이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어둠’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의 무대는 어느 맹인 학교이다. 이곳 학생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졌다면 우울할 법도 한데, 그들은 하나 같이 밝고 명랑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면면을 보니 이른바 부잣집 자식들-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데다가, 주변에는 자기처럼 모두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 뿐이니, 장님 나라의 장님이라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외면한다.


그런데 이 학교에 이그나시오라는 ‘어둠’의 자식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문제가 일어난다. 이그나시오 또한 부잣집 도련님인데, 이 녀석은 어딘가 삐딱하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걸핏하면 찬물을 끼얹고, 툭하면 비아냥거린다. 그는 학교의 다른 아이들이 ‘밝음’과 ‘즐거움’에 오염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 모두가 ‘허황한 즐거움의 왕국’에서 자신의 실명 사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너의 낙관주의와 너의 눈 먼 것은 똑같다’(40쪽) 말한다.


이그나시오: 너희들은 살 자격이 없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고뇌하려 들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비극을 직면하려 하지 않으니까. 정상인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잊으려 하고. 더군다나 슬픔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즐거움을 강요하며. (....) 너희들은 모범생들이지. 학교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절망감과 맞서는 선생님들에게 충심으로 협조하는. 장님들! 장님들 말이야!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고, 이 멍청이들아!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39쪽)


이그나시오는 장님 나라에서 자신이 장님임을 인정하는, 눈 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고통과 비애를 느낄 줄 안다. 그런데 바로 ‘어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밝음’의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 나머지 학생들은 이그나시오가 내뿜는 어두운 분위기에 당혹해 하며 그를 교화하고자 애쓴다. 그가 그토록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연인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고는 애인을 만들라고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이그나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그나시오: 나는 애인도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 것은 온몸으로 말하는 ‘너를 사랑해’야. ‘너의 슬픔과 고뇌까지 포함해서 너를 사랑해. 허황한 즐거움의 왕국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와 함께 괴로움을 같이 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여자는 없어. (38쪽)


이렇듯 그는 자신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 또한 그 괴로움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슬픔과 고뇌까지 포함해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 ‘장님 세계의 장님’을 온전히 이해할 사람 말이다. 고통을 알고 느끼고, 응시할 때 비로소 삶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럼으로써 진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물리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눈을 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묵직한 진실이 이그나시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그나시오는 앞을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눈 먼 사실을 외면하고 그 상태로 밝음 속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앞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포기한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혼자서라도 그 길을 나아가고자 한다. 때문에 그는 길에서 동냥하는 맹인들이 이 학교의 밝고 유쾌한 아이들보다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맹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짓’(48쪽)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이그나시오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지팡이를 끝내 버리지 않는데, 이 또한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의미로 볼 수 있다.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이렇듯 자신의 실명을 인지하고 그 ‘어둠’을 회피하지 않는, 눈은 멀었지만 제대로 볼 줄 아는 한 인간과 그와 달리 진실을 외면하고 그저 아름답고 밝은 현실 속에 안주하는 인물들을 대립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모두는 장님들과 같은 어둠 속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어둠의 장님들이다.”라는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말은 이 작품과 더불어 본다는 것의 의미, 눈 먼 상태의 의미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한다. 눈을 뜬 자여, 그대는 볼 수 있지만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가?


어느 계단의 이야기 또한 삶의 비애랄까,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그린다. 한 동네에서, 그것도 똑같은 집에서 평생을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독립과 함께 어린 시절 살던 곳을 떠났는데, 때때로 본가에 가게 되면 맞닥뜨리는 풍경이 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여전히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습을 언뜻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들…. 늙어가고 있음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증후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진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이 그렇다. 이 작품의 배경은 어느 도시의 허름한 연립주택 계단이다. 모든 사건이 이 계단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곳에서 이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고 사랑에 빠지고 때로는 증오하기도 하면서 온갖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이 허름한 주택의 낡은 계단을 떠나 성공으로 가길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등바등 살아보지만 10년 뒤에도 그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르바노: 나는 내가 크게 되지는 못할 걸 알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출세하면 우리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만 더 확실한 건 10년이 지난 후라도 우리는 이 계단을 오르내릴 것이고 이 작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거라는 거지.

 

페르난도: 나는 시간이 두려워. 그것이 나를 가장 괴롭히고 있어.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1년이 가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너와 내가 우리의 첫 담배를 숨어서 피우기 위해 이곳에 찾아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잖아! 우리는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이웃 사이에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수군거리며, 모르는 사이에 다 커버렸지. 집세, 전기세, 감자 값을 치르기 위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수단도 부려가며. (사이) 그러다가 내일, 아니면 요즘처럼, 하루 같이 지나갈 수 있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 이렇게 계속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아무 곳으로 향하지 않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수금원을 속이고, 일을 증오하며…. 하루하루를 허송세월로 보내며…. (어느 계단의 이야기115~116쪽)


젊었을 때의 거창한 꿈과 계획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그들의 대부분은 더 나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못한다. 거의 모두가 그 계단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생각대로 펼쳐나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하층민의 삶을 한 계단을 중심으로 30년 동안 보여줌으로써 그 시절 스페인의 어두운 현실을 폭로한다. 사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19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이 있었다.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어찌 그 암울한 현실을 은유적으로라도 담아내지 않았겠는가.


3세대에 속하는 아들 페르난도와 딸 카르미나는 30년 전에 그들의 부모가 그랬듯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을 똑같이 나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안다. 그들의 미래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그들이 꿈꾸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그들 또한 10년 뒤에 여전히 그 계단에 얽매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데 이들의 인생이 단지 문학 작품 속 또는 무대 위에서만 그려지는, 그런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우리의 비루한 삶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하지만 삶이 주어진 이상,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장님들과 같은 어둠 속에 있더라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8-04-0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그죠, 진짜 멋있는 희곡이지요?
저도 이거 읽고 뻑~ 갔답니다. ^^

잠자냥 2018-04-06 12:0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정말 놀라운 작품입니다. 근데 이 사람 다른 작품이 더 소개된 게 없어서 무척 아쉬워요. ㅠ_ㅠ
암튼 이래서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독서괭 2023-05-03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읽고,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역시나 멋진 리뷰가 똭!!^^ 계단 이야기 부분은 마저 읽고 다시 와야겠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3-05-03 18:26   좋아요 0 | URL
아아 그 멋진 작품! 괭 님의 리뷰도 기다릴게요!

독서괭 2023-05-03 18:33   좋아요 0 | URL
정답지 본 느낌이라 뭐라 더 쓸 수 있을지.. 암튼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잠자냥님이 당장 사라고 하신 덕에 덜컥 사서 읽게 됐네요 ㅋㅋ

잠자냥 2023-05-03 18:48   좋아요 1 | URL
정답은 개뿔이요~ ㅋㅋㅋㅋ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참신한 설정과 줄곧 낄낄&키득거리면서 볼 수 있는 커트 보니컷의 뼈 있는 농담들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분량을 단행본으로 내야만 했을지 의문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중요한 것 대산세계문학총서 111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은 극장이요, 삶은 연극‘이라는 명제가 이 희곡집 작품들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예브레이노프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한바탕 연극을 하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00년 전 작품이지만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 아니, 오히려 더 혁명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 책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손이 가지 않는 책, 베스트셀러라서 왠지 의심이 가는 책,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거의 짐작 가서 딱히 읽어보고 싶은 흥미가 일지 않는 책. 내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채운 그런 책이었다. 단편이나 마찬가지인 무척 짧은 분량인데도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여태껏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게 가장 크다. 그렇지 않은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니. 제목이 모든 내용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역시, 짐작이 맞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일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이 딱히 가지 않았던 책. 그러다 보니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마치 이 책의 화자이자 장 지오노 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나’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그저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평범한 양치기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내가 아닌 여러 사람을 위해, 묵묵히 나무를 심고 그래서 숲에, 마을에 변화를 불러온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장 지오노가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글을 썼다”고 밝혔듯이,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정말 ‘공동 선(善)을 위해 나무 심은 사람의 훌륭한 이야기로군- 제목이 다 로군’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떤 구절 하나가 뇌리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45쪽) 바로 이 구절. 며칠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숭고한 감동이 밀려왔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지켜보노라니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감동한 까닭은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작품은 작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 한 인간의 숭고함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정말 엘제아르 부피에가 처음부터 모두를 위해 나무를 심었을까? 이 땅과 지구를 바꾸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달라지게 하려고, 그토록 큰 명분을 갖고서 도토리 100개를 고르고 심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나 혼자, 묵묵히 반복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커다란 명분은 오히려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곧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누군가의 응답을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에 마땅한 응답이나 기대한 반응이 따르지 않으면 곧 지치고 만다.


그런데 나무 심는 행위 자체가 ‘엘제아르 부피’에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가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행한 일이라면? 자신이 심은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맞는 일이 그저 자기에게 더없이 큰 행복이었다면? 그래서 그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묵묵히 날마다 수 십 년을 빠짐없이 그 일을 행해왔다면?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도토리를 고르고 나무 심는 행위를 글 쓰는 행위에 대입해서 읽고 있었다. 도토리는 단어이며, 나무는 문장이고, 그 나무들이 자라서 일군 숲은 하나의 글이었다. 그 글은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일 수도 있으며, 한 편의 시이기도 하다. 더 많은 여러 종류의 글일 수도 있다.


글 쓰는 행위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 모두 고독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그 사람은 말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고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16쪽) 그러나 고독하되 정갈해야 한다. 실제로 ‘엘제아르 부피에’는 고독을 벗 삼아 살고 있지만 제대로 지어진 집에서 살림살이도 정갈하게 갖추고 살아간다. 혼자이면서도 산뜻하게 면도를 했으며 소박하지만 옷차림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기르는 개조차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살살대지 않으면서도 상냥하게’ 군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딱히 할 일이 없기에 죽어 가는 땅의 상태를 바꾸어 보기 위해 시작한 나무 심기. 그 나무 심기가 자기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파괴가 아닌, 창조의 기쁨을 날마다 자기 안에 심은 사람. 나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그렇게 본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작은 원룸에서 일어나 침대 겸 소파를 정돈하는 모습이다. 혼자 살면 침대를 접지 않고 그냥 둬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침대를 접어서 소파로 만들어 놓는다. 집안을 말끔하게 정돈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는 그런 생활을 평생토록 이어 온 것이다. 혼자 있지만 언제나 정갈한 주변, 날마다 노트에 기록하는 음표 하나하나, 그리고 그 음들이 만들어 내는 피아노 소리. 그 음표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도토리 한 알 한 알이기도 하고 그 음표와 도토리는 내게 단어 하나하나로 다가온다.


나무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도,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도 내게는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더 없이 행복하게, 제대로 잘 살다 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어떤 응답을 바라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묵묵히 걸어간 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이기에 가능한 마음의 평화.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은 파괴가 아닌, 창조의 아름다움을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도토리가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듯, 나 또한 단어 하나하나를 심는다. 그 단어가 문장이 되고 숲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같은 글이 될 때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