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지만지 희곡선집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만지 책에는 좀 복잡한 감정이 든다. 어떤 면에서는 싫은데 어떤 면에서는 좋다고나 할까. 기본적으로는 크게 호감이 없는데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무시할 수는 더더욱 없는 그런 사람을 보는 느낌이 든다. 지만지의 책에 좋지 않은 감정이 드는 것은 알다시피 그 유명한, 축약본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축약본으로 책을 읽을 거라면 대체 왜 읽지? 싶은 나로서는 이 지만지 시리즈 초기에 많이 나왔던 세계고전 축약본에 좀 어이가 없었다. 가격은 또 왜 이리 비싼지. 보통 다른 책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작품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작품이 축약본이 아니라면, 독자로서는 군침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헨리크 입센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알라딘 검색창에 헨리크 입센을 한번 검색해 보라. 발견되는 작품은 거의 <인형의 집>이고, 아주 간혹 <민중의 적>, <유령>, <들오리> 정도가 보일 뿐이다. <인형의 집>을 제외하고는 그나마도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이 전부이다. 


그런데 지만지에서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비롯해 또 다른 입센의 희곡 <바다에서 온 여인>을 출간했으니 독자로서 어찌 완전히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선뜻 책을 사게 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책값이 너무 비싸서. 그럴 때 유용한 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 서비스다. 읽고 싶은 지만지 책은 이런 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해 읽으니, 나도 모르게 우리 동네 도서관에 지만지 전도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도 도서관에 신청해서 첫 번째로 읽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입센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썼다. 그래서 그럴까? 주인공인 늙은 조각가 ‘루베크’의 모습에서 입센 그 자신의 모습이 종종 엿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의 노라와 비슷한 여인이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이레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노라와 아주 닮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한 남성으로 말미암아 삶이 부서지고, 그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거침없이 떠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나 할까. <인형의 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입센의 이런 여성주의적 관점도 꽤나 존경스럽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작품들이지 않은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첫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작은 균열이 보인다.



마야 부인: 좀 들어보세요. 여긴 온통 침묵뿐이에요.

루베크 교수: (관대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게 들려?

마야 부인: 뭐가요?

루베크 교수: 침묵?

마야 부인: 네, 전 잘 들리는데요.

루베크 교수: 글쎄, 우리 아기,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분명 침묵은 들을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마야 부인: 그럼요, 혹시 또 알아요. 여기처럼 지긋지긋할 정도면….

루베크 교수: 여기라면, 온천장을 말하는 건가?

마야 부인: 사방천지의 여기를 얘기하는 거예요. 도시엔 소음과 활기가 넘쳤죠. 하지만 이건 도무지…. 내겐 그런 소음이나 활기 같은 건 죄다 죽어 없어져 버린 거 같아요.  (6~7쪽)


이 짧은 대화에서 독자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루베크와 그의 아내인 마야 사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권태와 불만이 가득하고 이미 작은 균열이 생겼지만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음을 ‘우리 아기’나 ‘침묵’, ‘지긋지긋’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부활의 날’이라는 작품으로 대성공을 이룬 늙은 조각가 루베크와 그의 젊은 부인 마야는 곳곳을 여행하면서 안온함을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둘의 성격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젊은 아내는 고상한 예술보다는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치는 파티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남편 루베크와 함께 하는 삶은 더는 살아 있음이 아닌, ‘죄다 죽어 없어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들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레네’- 알고 보니 그녀는 루베크가 ‘부활의 날’을 창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니, ‘부활의 날’이 세상에 존재 가능케 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난 루베크와 이레네의 대화는 자못 심각하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독자는 곧, 루베크가 그의 창작을 위해 모델이자, 뮤즈이자, 영감의 원천이며, 사랑했던 그녀, 이레네를 철저히 이용했음을 알게 된다. 


이레네: 난 내 살아 있는 젊은 영혼을 당신에게 줬어요. 그러곤 속이 텅 빈 채로 거기에 남겨졌죠. 영혼도 없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고정된다.) 내가 죽게 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아르놀. (52쪽)


이레네는 자신이 루베크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차 없이 그를 떠났다. 마치 노라가 집을 나섰듯이.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그리 순탄치는 않은 듯하다. 루베크 이후 만난 남자들과의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않았으며, 정신병원을 오간 전력도 있다. 이런 모습에서는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레네는 카미유처럼 조각에 재능이 있다거나 직접 작품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모델로서,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철저히 대상으로서만 이용당한 채 사랑은 거부당하고만, 비운의 여인이다. 만일 이레네가 루베크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 그에게 줄곧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았다면 무척 답답했을 텐데, 이레네는 어느 순간 루베크의 이중성을 깨닫고 스스로 그를 떠난다. 그들이 재회한 뒤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이레네는 루베크가 듣기 거북한 말들을 쏟아낸다. 


루베크와 이레네, 그리고 마야.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 이야기인가 싶을 때 지주 울프헤임이 나타난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루베크와는 상반되는 인물이다. 정신적이기보다는 육체적이고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다. 매우 남성적이고 어찌 보면 야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에게 마야는 곧 호감을 느끼고 둘은 루베크 앞에서 거리낌 없이 서로를 향한 욕망을 표현한다. 이렇듯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루베크와 울프헤임 두 남자, 이레네와 마야 두 여자, 남과 여의 대비뿐만 아니라 루베크와 이레네로 상징되는 예술과 정신적인 삶, 울프헤임과 마야로 상징할 수 있는 육체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삶, 산 정상과 산 아래의 삶 등의 대비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문제(대상으로서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여인들의 삶), 예술과 세속적 삶,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역시 이레나와 마야 두 여인이 루베크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 둘은 결국 루베크와 함께 하면서 어떤 의미로든 균열을 발견하고, 그 기만된 삶을 깨닫고는 그의 곁을 스스로 떠난다. 버림받는 것도 아닌, 자기 발로 루베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꽤 통쾌하다. 입센을 이르러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아마도 이런 시대를 앞선 사상도 한몫 했으리라.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루베크를 산 정상으로 이끄는 이레네. 그곳에 예술이 있는 삶이, 정신이 되살아나는 삶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 있으리라 믿고 이레네와 함께 산 정상으로 가는 루베크…. 그러나 정말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까? 어쩐지 그 모든 것은 이레네가 루베크에게 받았던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자 했던, 그녀의 의도된 복수극은 아니었을까.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란 그래서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기에 곱씹을수록 흥미롭다. 이 짧은 희곡만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번역이나 책 만듦새가 믿음이 가는 그런 출판사에서 입센의 희곡 선집을 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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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yeongx 2018-06-2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초반에 마야부인이 루베크교수가 부활의날을 완성한 이후로 작업의욕을상실했다고했는데 입센은 실제로는 우리죽은자들이깨어날때 쓴후에 또글쓰려하다가 병때문에 못쓴거래요

잠자냥 2018-06-30 01:19   좋아요 0 | URL
넵. 이 작품의 루베크 교수에게서 종종 입센의 모습이 엿보이기는 합니다만, 루베크가 입센 그 자신은 아니겠지요.

singyeongx 2018-06-3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는사람이 있다는게신기하네요...

잠자냥 2018-06-30 17:30   좋아요 0 | URL
모쪼록 입센의 다른
희곡도 많이 번역되면 좋겠습니다...!

2018-12-17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 명단편선 4 - 동물과 교감하다 일본 명단편선 4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김용안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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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교감이라기 보다는 동물을 소재로 한 단편들이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미 번역되어 나온 작품들이 많아서 크게 신선하지는 않았으나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히구치 이치요 등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것으로 만족.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은 동화스러우면서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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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방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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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이 지만지 시리즈로 다시 나왔구나! 주변에 진짜 강력 추천하고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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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명단편선 3 - 근대를 살다 일본 명단편선 3
모리 오가이 외 지음, 유진우 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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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작품은 단편 소설이라기 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이 시리즈 1편에 실린 작품들에 비해서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느낌. 그런 가운데도 아리시마 다케오의 <한 송이 포도>, 하야시 후미코 <다마강>은 단연 기억에 남는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비밀>은 또 읽어도 여전히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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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지만지 희곡선집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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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의 짧지만 강력한 희곡. 성공한 조각가 루베크와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그러나 버림받은) 이레네의 이야기는 읽다 보면 로댕과 카미유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레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인형의 집>의 노라의 말과 닮았다. 삶과 죽음, 예술과 평범한 삶의 극명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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