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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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손에 잡으면 다음 장이 궁금해서 도무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솔직히 처음에는 단순한 스릴러려니 하고는 읽고 나서 팔아버려야지 했는데... 다 읽고 나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 마음이 먹먹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이게 처음인데, 앞으로 계속 읽을 것 같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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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솔루트노 공장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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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아이디어에 문명과 사회 비판적인 시각, 거기에 언제나 빠짐없는 휴머니티까지 겸비한 훌륭한 작품- 우리말로 옮긴 문장이 좀 더 매끄러웠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별 한 개 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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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카렐 차페크는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 내게 올해 초 날아온 차페크 신간 알림 메일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철학 3부작 소설 가운데 하나인, 내가 기다리던 <평범한 인생>인가? 싶었는데 뜻밖의 작품이었다. <압솔루트노 공장>-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은 왠지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나 <도롱뇽과의 전쟁> 계열 작품, 그러니까 SF 작품이구나 싶었다.

서둘러 책을 주문하고 일단 펼쳐보았다. 예상대로 사이언스 픽션이다. 그때 마침 <차페크 평전>을 읽고 있던 터라 <압솔루트노 공장>은 나중에 읽기로 했다. 몇 개월이 지나, 최근 읽기를 마친 책 <압솔루트노 공장>은 <로봇>이나 <도롱뇽과의 전쟁>처럼 기발한 아이디어에, 문명과 사회 비판적인 시각, 거기에 언제나 빠짐없는 휴머니티까지 겸비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책을 덮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차페크의 또 다른 작품이 서둘러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 작품이 <평범한 인생>이면 좋겠다.


<압솔루트노 공장>은 원자 핵 분해로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압솔루트노’라는 기계에 얽힌 이야기다. <도롱뇽과의 전쟁>이 1936년 작인데, 그보다 앞선 1922년에 출간되었으니, SF계열로는 차페크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1920년에 발표된 <로봇>이 있기는 한데, 그 작품은 희곡인지라, SF계열 장편소설로는 <압솔루트노 공장>이 처음인 셈이다.

100여 년 전에 <로봇>을 창조해낸 작가답게 차페크는 <압솔루트노 공장>에서 또 한 번 기발한 생각을 보여준다. 상상의 원자력 모터 카뷰레터는 물질을 완전히 연소해서 순수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그 에너지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이 기계가 무슨 역할을 하느냐고? 친구가 발명해낸 이 기계의 위력을 실감한 자본가 ‘본디’는 이를 인수해서 대량생산하여 전 세계에 보급한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기계가 에너지를 방출할 때 부산물로 나오는 ‘압솔루트노’는 모든 물질에 침투하는 영적인 본질로, 이 물질은 그것을 쐰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종교적 열정은 더 나아가 민족주의적 광풍으로 번지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불러온다. 이런 설정은 <도롱뇽과의 전쟁>과도 비슷하다. 도구와 언어를 쓰는 도롱뇽의 존재가 우연히 발견되고, 그 존재를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심과 기술이 덧칠해지면서 그 폐해로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차페크의 SF계 작품은 이렇게 이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존재나 기계의 발견(압솔루트노, 로봇, 언어를 쓰는 도롱뇽 등)과 그 뒤에 폭주하는 자본주의,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빚어내는 온갖 광기를 다룬다. 이런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다고 해서 차페크의 작품이 어둡고 음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의 작품은 따뜻하다. 인간 세계를 비판하지만, 연민 어린 시선이 녹아 있다. 사람들에게 계속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그들이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훈계조는 아니다. 재치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그 따뜻함, 유쾌함, 밝음이 차페크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차페크의 SF 계열 작품도 좋아하지만 철학 3부작 소설이라는 <호르두발>, <별똥별>  같은 작품을 더 좋아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왼쪽 주머니 / 오른쪽 주머니> 이야기도 여기에 넣을 수 있겠다. <곤충극장>에 실린 희곡들 중 「마크로풀로스의 비밀」도 여기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들은 거의 모두 미스터리 구조를 갖는다. 그 미스터리를 쫓아가다 보면 미스터리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즉 인간이 보인다.


“이 세상에 미스터리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모든 집, 모든 가정이 다 미스터리입니다. 여기 오는 도중에도 저기 있는 작은 집에서 어떤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 정말로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무지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분명히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법과 질서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정의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경찰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은 미스터리입니다. 잡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발자국」,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차페크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 냉정함이 아닌 연민, 즉 안타까움이다. ‘유라이 호르두발의 심장은 어딘가에서 분실되었고, 영원히 매장되지 않았다.’는 <호르두발>의 그 마지막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직 나오지 않은, 하지만 꼭 나올 것이라고 믿는 <평범한 인생> 또한 이 분류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더 간절히 기다려진다.

<카렐 차페크 평전>을 읽다 보니(평전이라고 하기에는 인간 차페에 대한 이야기는 빈약하고, 차페크 작품론과도 같아서 조금 실망스러웠던 책) 그는 사람 자체가 밝고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사회를 보는 눈은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좋은 작품을 남겼을까, 몹시 안타깝기만 하다. 차페크는 자신의 창작을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가장 위대하고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이다. 나는 내가 창작을 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해하는 것은 나의 한 마니아고,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마니아다.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을 표현하는 것, 나는 많은 것들을 간단하게 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성공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희곡들에서 결코 문어체가 아니라, 진정한 일상의 대화체를 찾는 데 성공적이었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작가의 비즈니스이고 그 대가로 그는 돈을 받는다. 그러나 생생한 대화체를 만든다는 것은, 말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말에 풍부한 가치를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민족적인 사회적인 미션이다. 거기에서 작가는 숨겨진 신비한 수학을 거둘 수 있다.  (『카렐 차페크 평전』, 24쪽>


이해하기 위해 창작한다는 차페크. 그의 창작의 결과물만 본다면 그는 날카롭고도 열정적으로 삶을 이해하고 살다간 사람일 것이다. <압솔루트노 공장>에서도 한 번 더 그런 차페크를 만났다. 올해 나온 신간 중에 가장 반가운 책 중의 하나였다.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다면 차페크 전집이 멋지게, 제대로 출간되면 좋겠다. 그러기 전에 <평범한 인생> 출간부터 기다리는 게 순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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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0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번에 찾아보니 차페크 작품이 꽤 많이 출간되어 있던데, 전집으로 멋지게 나와주면 좋겠네요! 잠자냥님은 오래전부터 차페크의 열렬한 독자이셨군요. 역시…

잠자냥 2023-09-09 12:1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출간 기획서 쓰다 빼앗긴 ㅋㅋㅋㅋㅋ
 
알라딘 블렌드 봄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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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살 때 항상 알라딘 원두를 함께 구매한다. 계절마다 나오는 특별한 블렌딩의 커피는 늘 기대되는 품목 중 하나. 이번에 나온 ‘봄‘은 말 그대로 ‘봄‘의 맛이다. 산뜻하고, 가볍고, 깔끔하다. 단 나는 만델링처럼 묵직한 커피를 좋아하는 터라, ‘봄‘은 좀 너무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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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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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애트우드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19세기 캐나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다. 때문에 사건의 진행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애트우드는 전개가 뻔히 예상되는 이야기를,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 동안 지루할 틈 없이, 숨 가쁘게 스토리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런 능력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하인과 하녀가 공모해 집주인과 그의 정부였던 가정부를 살해한 실제 사건이 무척 자극적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사건을 바탕으로 실존 인물 위에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 캐릭터들이 종이 위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모두 작가의 능력 덕분이다. 실제 기록들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하다니, 그 또한 놀라울 뿐이다. 더욱이, 어찌 보면 그저 잔혹한 범죄에 지나지 않았을 사건을 소설화하면서 페미니즘적 시선을 덧붙인 점 또한 감탄스럽다. 그런 관점으로 당대의, 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성차별 문제를 건드리는 영리함까지 놓치지 않았으니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레이스>를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만든 것은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 자신, 아니 애트우드가 다시 새롭게 창조한 이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인물 때문이다. 작품을 읽고 나니, 이 책의 표지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커버 판 표지에는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책을 다 읽은 뒤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다. 그중 단연 으뜸은 표지 한가운데에 놓인, 보닛을 쓴 얼굴이 없는 여인의 모습이다.

보닛을 쓴 이 여인은 아마도 그레이스일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없다. 왜일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공감할 테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도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에 대해 섣불리 판단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 22쪽에는 살인죄로 법정에 섰을 무렵의 그레이스 마크스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생겼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초상이 정말 그녀의 본 모습일까 의아해진다. 표지 속 얼굴이 없는 여인처럼 도무지 뭐라고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 그녀가 바로 그레이스 마크스, 또는 메리 휘트니이다.

그녀를 그레이스 또는 메리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또 깊은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의미심장한 어느 한 구절처럼, 그레이스는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 그대로 변형되는 존재는 아닐까? 그게 때로는 순진무구하고 가련한 희생자 그레이스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잔혹한 악녀 메리 휘트니이기도 한 게 아닐까.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궁금한 사람이라면 바로 이 책을 읽어보시라.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556쪽)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여자들은 보통 성녀 아니면 악녀로 그려진다. 착한 여자 아니면 나쁜 여자, 잔인하고 냉혹한 가해자 또는 순진한 피해자. 마녀 아니면 성녀. 이런 관점은 세상이 여자에게 부여한 시선이다. 이브를 보라, 이브는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피조물에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는, 그래서 이 세상에 죄를 가져오는 원흉이 된다. 그레이스 마크스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맥더모트를 사주해 두 사람의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간 끔찍한 살인자, 악녀- 그게 아니면, 정신병을 앓는 가엾은 희생자 둘 중 하나다. 그레이스를 변호하는 쪽이나 그렇지 않은 쪽이나 또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나 모두 둘 중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

하지만 정말 그레이스는 그렇게 단순한 여자일까? 정신과 의사 사이먼과 대화를 나누는 그레이스 마크스를 보라. 사이먼이 종종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는 똑똑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알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언어유희까지 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사이먼은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나오니 대놓고 맨스플레인(mansplain)을 하려고 한다. 페미니즘적 시선은 이렇게 그레이스 또는 메리의 입을 통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교사 분위기로 돌입한다. 나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는 게 보인다. 남자들은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키니어 나리도 그랬다. 그가 묻는다. 판도라가 누군지 알아요, 그레이스? (218쪽)

정신병원에 있던 여자들이 대부분 여왕 폐하 못지않게 정신이 멀쩡했던 것을 보면 그들은 진짜 정신병자를 보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 그중에는 죽도록 때리는 남편을 피해 입원한 여자도 있었는데, 미친 쪽은 그 남편이건만 그를 잡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1쪽)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245쪽)

그와 처지가 비슷한 남자들은 자기가 어지럽힌 것을 치우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지럽힌 것뿐 아니라 그들이 어지럽힌 것까지 치워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다. (316쪽)


더욱이 메리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이야기 할 때의 그레이스를 보면 성격 또한 무척 다정다감하다.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지혜롭다. 게다가 메리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 그러니까 그레이스의 다른 자아라고 가정한다면, 그레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 정신 또한 무시할 수준이 못된다. 심지어 자신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언론을 비판하는 혜안까지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레이스를 지켜보면서 그녀가 매우 다채로운 여자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선생님이 침대를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침대가 휴식과 편안함과 단잠의 상징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침대에서 위험한 일들이 아주 많이 벌어지거든요. 침대는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니 우리가 인생 최초의 위기감을 맛보는 곳이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곳이니 종종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남녀 간의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죠. 선생님도 무얼 말하는지 아시겠지만,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하고, 누구는 절망이라 하고, 또 누구는 참아야 할 모욕일 뿐이라고 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는 우리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대개는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에요. (240쪽)

신문에서는 그가 무뚝뚝하니 고집이 세고 앞뒤 신경 안 쓰는 거만한 분위기였다고 했는데, 신문은 늘 그런 식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침 식탁에 앉아 있을 때하고 다를 게 전혀 없었거든요. (521쪽)


그러나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그레이스의 이런 명민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한다. 혹 알더라도 그 똑똑함을 잔학한 영리함이라고 폄하하며 그레이스의 악녀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덧씌울 뿐이다. 그렇게 단정 지어야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레이스를 변호하는 목사나 사이먼 같은 사람들, 또는 그 반대로 그레이스를 악녀라고 부르는 사람들만 그녀를 그렇게 보는 걸까? 세상 자체가 그레이스라는, 여성 자체를 그렇게 이분법적 시선으로 본다. 과부를 보는 단 두 개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는 과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과부들 특유의 우울증, 걸음걸이, 성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 헌금 때문에 하녀들도 자기 월급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하라고 늘 다그침을 당했죠. 젊고 돈이 많은 과부가 화제로 등장하면 남자들이 어떤 식으로 윙크하며 고개를 끄덕이는지…. 과부가 나이가 많고 가난하면 존경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대접을 받는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요. (243쪽)

그레이스의 저 말처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독자는 그레이스를 악녀 또는 순진한 희생자로 보는 그 두 가지 시선이 여자를 향한 보통 이 세상의 시선임을 자연스레 깨달아가게 된다. 페미니즘 사고가 짙게 베인 구절이 종종 나온다고 해서 여성주의적 작품인 게 아니라, <그레이스> 자체가 여성주의 작품인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레이스의 진실을 쫓는 일보다는 이 세계가 여자를 바라보는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그레이스의 진실이 무엇인지 독자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며 책을 덮지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은 남는다.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그 시선은 과연 온당했는가. 어쩌면 나 또한 그 두 시선의 틀 안에 갇혔던 것은 아닌가. 그레이스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녀를 향했던 시선이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레이스, 그녀를 소환해서 진실을 알고 싶은 욕구는 간절하게 남는다. 사이먼의 고백처럼 ‘물고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둘 다인, 아름답지만 노래를 부르는 위험한 인어’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 모두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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