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이었다. 내가 처음 전철을 혼자 탄 그때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문득, “너 나 잡는 척 해봐”하고는 학교 정문 쪽으로 냅다 달렸다. 내가 그대로 정문을 나가버리자 뒤쫓던 친구는 놀라 당황해서 소리쳤다. “야, 너 선생님한테 혼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길로 지하철역으로 가 전철에 몸을 실었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세 정거장… 도시 외곽에서 도심으로 갈수록 내 심장도 더 빠르게 뛰었다. 내 생애 최초의 탈선이자 비행은 그렇게 서울의 도심으로 향하는 전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뉴욕의 비비언 고닉도 열네 살에 처음 지하철을 탔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쭉 이 도시에 살고 있는 나처럼 그녀 또한 늘 뉴욕에서 살았으면서도 마치 큰 도시에 가보는 게 소원인 소도시의 주민처럼 꽤 긴 시간 동안 뉴욕을 그리워한다. 고닉에게 그녀가 자란 브롱크스는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살던 그 동네도 그랬다. 사춘기에 접어든 고닉이 그 무렵부터 세상엔 중심이라는 것이 있고, 자신은 그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듯이, 그 중심지는 지하철 한 번 타면 갈 수 있는 맨해튼 시내라는 것도 알았듯이 나도 그즈음에 그랬던 것 같다.
고닉은 열네 살 그때 단 한 번의 출발로 맨해튼에 도착했을까? 나는 그렇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났고 학교가 끝나기 전에는 가방을 챙기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전철이 시내 중심지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되돌아왔다.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이라면 중구 또는 종로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 마침내 나 홀로 또는 친구와 함께 발을 디딘 것은 열여섯, 열일곱 그 무렵이다. 호암아트홀에서 보던 전시를 비롯해 그 중심지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서점과 책이 있었고 수많은 영화관과 동네에선 보기 어려운 다양한 영화가 있었다. “나는 그 도시를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늘 안락함과 안도감, 단조로움과 게으름을 맛볼 수 있는 집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언젠가 만날 절호의 기회를 호시탐탐”(15쪽) 노렸다. 고닉과 나는 뉴욕과 서울,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무척이나 다른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또 흡사한 그 대도시에서 그렇게 자란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이렇게 여기 너머 어딘가에 더 중심이라고 부르는 곳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호기심을 싹 틔웠던 열네 살의 추억을 일깨운다.
서울, 이 도시는 나의 이력이다. 태어난 곳, 학교와 직장을 따라 옮겨 다니고 집을 여기저기로 이사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또 누군가와 함께 있었느냐에 따라 이 도시의 기억도, 동네, 동네에 얽힌 기억도 달라진다. 그러나 서울은 늘 나와 함께였다. 이 빌딩숲, 이 많은 인파, 이 혼잡함과 화려함이, 소란스러움이 문득문득 피곤해 잠시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지만 산이나 바다, 강, 호수, 자연이 우거진 곳에 가서도 나는 어느 순간 도시의 편안함을 찾는다. 낯선 나라에 가서도 이 도시에서 익숙해진 장소들- 예컨대 스타벅스 같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균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고닉이 한때 연애했던 극작가, 알코올의존증 전력이 있고, 도시를 떠나는 데 공포증이 있었다는 그 남자처럼 나 또한 도시를 떠나는 것에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의 연애사를 언급한 고닉 또한 그의 도시를 향한 집착을 누구보다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도시에는 우정이 있다. 고닉의 레너드처럼 나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든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8쪽) 염세를 주고받으며 자주 만나기보다는 가끔 만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고 그 대화의 내용도 대부분은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8쪽) 있는 그런 몇몇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나의 우정은 고닉과 레너드의 그것처럼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기보다는 다른 하나가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기보다는 ‘일정 중에 빈자릴 찾는다’(43쪽). 이런 느슨한 관계가 문제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고닉은 말한다. 그것은 모두 기질 문제라고. 그리고 이 기질적으로 맞는 우리, 나와 내 친구들은 이 도시에서 느슨한 우정으로 얽혀서 저마다의 시간을, 하루를 보낸다.
이 우정은 서울, 이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나처럼 애초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도 있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러다 보니 우정을 나누게 된 친구도 있다. 그리하여 이 도시는 또 다른 우정의 가능성도 늘 열어둔다.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 우정, 그 느슨한 관계들 속에서는 벌써 몇 번쯤인가는 서로 같은 장소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같은 강연을 들으면서 스치듯 지나쳤을 인연도 있으리라. 때로는 도시가 주는 익명의 안온함 속에 숨어서 오늘은 그저 수줍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만 언제나 다른 날에는 문득 그 앞에 서서 “안녕!”하며 알은체를 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59쪽)들처럼 말이다. 뉴욕이든 서울이든 도시는 그런 느슨하고 유연한 관계를 가능케 한다.
물론 사랑도 있다. 우연히 만난 사이와 헐겁지만 다정한 우정을 나눌 수도 있고, 또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그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뜨거운 애정을 나눌 수도 있는 곳, 도시. 걷는다, 본다, 느낀다, 생각한다, 쓴다, 만난다, 이야기한다. 웃는다, 사랑한다. 헤어진다, 걷는다. 산다…. 도시에는 비록 외로울지언정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 혼자 거리를 거닐 수 있는 자유, 그러다가 문득 우연히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자유. 곁에 누군가가 없어도, 그러니까 짝이 없는 여자가 혼자 이 거리 저 거리 거닐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곳은 이런 대도시뿐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독과 자유에서는 시선이 탄생한다. 고닉은 바로 그 지점에서 뉴욕 곳곳을 발견하고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
번잡한 도시는 인간관계에 단절을 불러일으킨다고,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하고 외롭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 외로움과 고독 속에 엄청난 자유가 있음을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안다. 때문에 비록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105쪽) 기꺼이…. 고닉의 친구 레너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그녀는 영영 엄마의 딸일 거라고-레너드의 이 말에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친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담겨 있다. 엄마를 향한 ‘사나운 애착’의 시기를 지나 뉴욕 거리 곳곳을 거닐고 거기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고 그 안에서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혼자 있는 법, 외로움 속에 자기 존재를 발견한 비비언 고닉, 자신과의 대화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그녀는 결국 이런 빛나는 글들로 전 세계의 독자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나 말을 건넬 수 있지만 또 누구나 금방 무심히 돌아설 수 있는 도시. 느슨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자유라는 기질을 갖춘 도시- 전 세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빚어낸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층층이 쌓아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풍성한 에너지가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나도 그리고 또 도시의 삶을 사랑하는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