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소네치카>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대박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문학 작품을 읽고 오랜만에 전율했다. <나는 고백한다>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감동이 너무 커서 <소네치카> 뒤에 실린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은 읽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끝까지 읽기는 했다). 책을 덮고 불을 끄고 나서도 누워서 가만히 <소네치카>의 여운을 느껴보았다. 이 작품은 책으로, 문학으로 구원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라고 단 한 줄로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을 담은 이 문학으로 나는 또 늦은 밤 감동에 쌓인다.
소네치카는 책벌레이다. 이 작품은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모두가 빨려들어 갈 법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네치카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다.”(9쪽) 이윽고 책벌레였기 때문에 놀림받는 소네치카의 모습이 그려진다. 독설가인 소네치카의 오빠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끝도 없이 책만 읽는 소네치카, 의자 꼴 엉덩이에 코주부가 됐다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안타깝게도 오빠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고. 소네치카의 코는 서양 배 모양으로 부풀어 있었고, 넓은 어깨와 길고 가느다란 체격, 마른 다리와 납작한 엉덩이…. 유일한 자산이라고는 마른 몸에 왠지 어울리지 않게 일찍 성숙해버린, 큰 여인네 가슴이었다고.
그러나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한 또 다른 수많은 책벌레들은(‘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작품을 읽을 정도라면 책벌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 문장을 읽고 안다. 소네치카는 그런 것들-그러니까 자신의 못난 외모에 그다지 안타까워하지 않으리라는 걸, 개의치 않으리라는 걸, 신경 쓸 틈이 없으리라는 걸…. 그럴 시간이 있다면 책 한 권을, 책 한 권의 문장 속으로 침잠해가리라는 걸…. 실제로 소네치카는 일곱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꼬박 이십 년 가까이 쉼 없이 읽고 또 읽는다. ‘마치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책에 빠져 있다가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가 되어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한다. 독서의 관한한 누구보다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 일종의 천재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인쇄된 글자에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상상 속 주인공들이 현실 세계의 친구들 사이에 서 있기도 하고, 가벼운 정신병리적 기운마저 감도는 이 독서열은 꿈속에서도 소네치카를 내버려두지 않아 그녀는 마치 꿈조차도 읽는 듯하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책벌레들은 이런 묘사에서 더없이 공감하며 미소 지을 것이다.
이런 문장, 이런 묘사들은 또 어떤가. “매 순간 의심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불안한 심연 속으로 내려가거나 때로는 투르게네프의 그림자 드리운 가로수나 왠지 이류 작가 같은 레스코프의 무원칙적이고 관대한 사랑으로 따스해진 지방 대저택 가운데에 출연해보면서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공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쉬도록 했다.”(12쪽)는 이런 문장. 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책벌레들이라면 이 문장에서 공감하면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질 것이다. 나는 “왠지 이류 작가 같은 레스코프”라는 문장에서 빵 터졌다. 레스코프, 약간 그렇지 않은가...? 흠흠. 이렇게 이 작품은 책벌레인 한 여성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면서 이 책을 읽을 또 다른 책벌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이 유혹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책벌레 소네치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서 정보 전문학교를 마치고 오래된 도서관의 지하 보관실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 일은 그녀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종일 위층 열람실에서 내려오는 카탈로그며 흰색의 도서 청구서, 자신의 가느다란 팔로 떨어지는 무거운 책들로도 성이 차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서 먼지 쌓인 지하실을 단속하는 일까지 즐기는 사람이 된다. 독서광들이 대개 그렇듯이 소네치카는 글쓰는 일을 성스러운 행위로 여기게 되고 대부분의 작가들을 흠모한다. 수도사처럼 외따로 지내며 도서 보관실에서 몇 년간 근무한 뒤 소네치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서광이었던 상사의 권유로 대학교 러시아문학부에 입학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책에 미쳐 살던 나날들…. 그러다가 마침내 운명이 드디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로베르트 빅토로비치-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데다가 잿빛이라 만일 프랑스어로 된 도서목록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소냐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을 이 남자- 이 남자는 소네치카가 일하는 도서관에 찾아와 프랑스어 도서목록을 물어본다. 사실 이 도서관은 프랑스어로 된 책은 있었지만 목록은 벌써 오래전에 사라진 상태이다. 책벌레는 책벌레를 알아보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소네치카는 이 범상치 않은 독서가를 지하실 깊숙한 구석에 위치한 서유럽 서가로 안내한다. 남자는 허기지고 놀란 아이처럼 책장 앞에 오랫동안 서 있고 소네치카는 그의 등 뒤에서 그 흥분, 그 열기를 알아차리고는 얼어붙는다. 남자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문득 뒤 돌아서더니 갑자기 소네치카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럴 수가 굉장하잖아. 몽테뉴에 파스칼까지......”
서지사항을 꿰고 있는 소네치카가 감격하여 이런저런 책 정보를 더 알려주자 로베르트의 눈, 그녀를 보는 그 눈은 열렬히 빛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그는 도서 대출 카드를 발급해 달라고 하는데, 아뿔싸 193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무슨 일인지 조국에서 무의미한 오 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지금은 보호관찰 하에 공장관리부에서 화가로 일하고 있어 일정한 주소가 없다. 신분증과 거주등록증상 외지인이라 도서 대출 불가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네치카는 선뜻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도서 대출 카드에 내역을 써넣고 여길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책을 반납하라고 하라고. 아니 어디서 이렇게 작업의 기술을 익혔을꼬? 문학에서!?
이 작업을 알아차린 로베르트- 이 남자 정말 웃기다. “조용하고 맑고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갑자기 덮친, 운명이 결정된 듯한 강력한 감정”(19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이 남자는 바로 이 만남을 통해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버린다. 책벌레가 책벌레한테 반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아니 이 사람들아, 이럴 일인가! 그런데 이 남자는 이틀 후에 다시 도서관을 찾는다. 소네치카를 만난 그는 입을 연다. “일전엔 제가....” 책벌레 소네치카도 정말 못 말린다. 오래전부터 구어에서 잘 쓰지 않는 “일전”이라는 근사한 단어에 미소를 머금는 그녀. ㅋㅋㅋㅋㅋㅋㅋㅋ 로베르트는 이어 말한다. “일전에 성함을 여쭙지 않았더군요.” 소네치카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자 말아 접은 꾸러미를 펼친다.
마침내 포장이 벗겨졌고, 소냐는 촘촘하지 못한 거친 종이 위에 부드러운 갈색과 세피아색 물감으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를 보았다. 초상화는 훌륭했고, 여인의 얼굴은 고상하고 섬세했으며, 이 시대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소네치카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살짝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바다 냄새가 났다.
“이건 제 결혼 선물입니다.” 로베르트 빅토로비치가 말했다.
“사실 당신에게 청혼하러 왔어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20쪽)
나는 여기서 누군가, 그러니까 책벌레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알라딘 서재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저 로베르트처럼 뽀뽀와 하트, 사랑해요를 날리며 여기저기 결혼 신청을 남발하고 다니는 한 어린 여성-주은오라는 이름의 그녀가 떠올라서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책벌레는 책벌레를 알아보고, 저 바깥세상에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아니 너무나 하찮게 여길 정보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홀딱 반해버려서 만난 지 이틀 만에 결혼 신청을 하게 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베르트와 소네치카의 나이 차이는 거의 스무 살은 되는데, 로베르트 은오에게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벌레를 이해할 사람은 또 다른 책벌레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벌레들은 결혼에 골인하느냐?! 그건 안 알랴줌. 확실한 것은 여기까지는 책의 아주 초반에 해당한다는 사실.
“세계문학의 상아탑”에서 지낸 소네치카. 소네치카의 젊은 시절. “판타지 소설”(47쪽)- 실제 삶은 문학만큼 사건사고가 다채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그 어떤 문학보다 더 극적일 수도 있다. 소네치카의 인생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는 내내 이렇게 책 속에서, 문학 속에서 안식을 얻으며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아 “책 속 이야기 대신에 상상할 수도 없는 빈곤의 짐, 가난, 추위, 번갈아가며 병”(33쪽) 등 매일 매일의 끝없는 걱정이 들어선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문학을 좋아하던 고상한 소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나날의 노동 속에 “시외버스와 덜컹거리는 전차를 타고 다니며 그녀는 빠르고 추하게 늙어”간다(40쪽).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 삶이 고통스러워질 때면 “어린 시절 몸을 맡겼던 문학이라는 마약에 또 한 번 순순히 자진해서 자신을 맡”(82쪽)기면서 하루하루 버텨온 인생. 책과 함께 지내온 소네치카의 삶은 책이 있었기에 남달랐다. 책이, 문학이 그녀를 그토록 단단하고 너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다 늙어버린 지금에도 “저녁이 되면 그녀는 배를 닮은 코에 가벼운 스위스제 안경을 걸치고 달콤한 심연, 어두운 가로숫길, 봄의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듯 뛰어든다.” 이반 부닌과 투르게네프 작품을 배경으로한 이 문장들로 끝맺음하는 마지막까지 <소네치카>는 실로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