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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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열세 살 즈음, 푸시킨의 시를 처음 접하고 그때 이후로 나는 그를 시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이 구절은 어릴 때부터 잘도 외우고는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인용하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이 구절은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와 다투거나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해서 마음 상한 친구의 마음을 다독여줄 때 특히 유용했다. 열대여섯 살 딱 그 정도 나이에서는 ‘삶이 그대를 속이’는 일들이 대부분 그런 일들이었다.

살아갈수록, 그리하여 이 나이에 이르러 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구절에 깃든 진실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임을 깨닫고 푸시킨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진실의 깊이를 어느 정도 헤아릴 즈음 나는, 푸시킨을 소설가로서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래 전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읽고 얼마나 푸시킨앓이를 했던가. 다만 그 책은, 너무나 오래전에 번역한 책이었는지, 푸시킨 작품이 지닌 명성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번역본이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읽는 내내 푸시킨은 시인인데, 이렇게 투박한 문장을 썼을 리가 없어! 자꾸만 의심했다. 그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인데, 독자 리뷰를 읽어 보면 나만 번역에 불만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태에서 이 《눈보라》의 등장은, 《벨킨 이야기》를 이미 읽었음에도 틀림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푸시킨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표제작인 <눈보라>부터 다시 읽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이 어긋난 사랑에 안타까워하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그 폭설을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다시 읽은 <눈보라>는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보다는 다른 어떤 것, 인생의 불가해함, 그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마음이 서늘해져온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 ‘마리야’는 가난한 장교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지고 부모의 반대에도 그와 사랑의 도피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의 도피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데, 축복을 위해 내리는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치는 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 거린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진다. 마리야와 블라디미르 두 사람의 발길을 붙잡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른다. 결국 둘은 함께 떠나지 못하고 삶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간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절망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하며 앓아눕기도 하지만,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이 그 아픔도 흐려지면서 살아나간다. 인생이 그러하므로. 그리고 마리야 앞에 새로운 사람인 ‘부르민’이 나타나고 삶이 그러하듯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마리야는 부르민과는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눈보라’로 잃어버린 블라디미르 대신, 이번에는 진짜 자기 사람을 맞이하게 될까?

살다 보면 ‘눈보라’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날 무렵에는 그 계획 가운데 뜻대로 이룬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한 해 한 해가 쌓여 인생을 이룬다. 그러기에 늘그막에 다다른 많은 이들이 체념의 정서를 안고 ‘삶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눈보라’가 없었다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을 이루었을까? 지금보다 어릴 때 나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보라’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들의 사랑은 어느 순간 폭설로 무너지는 집처럼 주저앉고 말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눈에 반하고 불장난하듯이 서로에게 빠지는 대부분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듯이, 마리야와 블라디미르의 사랑은 그다지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야와 블라디미르가 사랑의 도피에 성공해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언제고 그들 인생에서 또 다른 ‘눈보라’가 불어 닥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마리야가 다시 만난 부르민과도 마찬가지 이리라. 이처럼 푸시킨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눈보라’ 같은 사건을 통해 삶의 불가해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인생의 수많은 ‘눈보라’들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이 일으키는 것임을 통찰한다.

이런 푸시킨의 시선은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작품들, <한 발의 총성>,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한 발의 총성>에서는 ‘따귀 한 대’가 눈보라이다. 그전까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실비오’는 따귀 한 대를 맞고서 인생이 뒤틀린다. 평생 복수를 꿈꾸며 세월을 헛되이 쓰며 음울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 따귀 한 대는 그 자신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있던 실비오 앞에 나타난 부유한 명문 귀족. 그는 젊음, 총기, 잘생긴 얼굴, 유쾌함, 유명세, 돈 등등 모든 것을 갖춘 진정한 행운아였고, 그의 등장으로 실비오의 일등 자리는 흔들린다. 그 질투와 열등감이 결국 ‘따귀 한 대’를 불러오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니 실비오에게 그 따귀 한 대는 마리야와 블라디미르를 갈라놓은 눈보라와도 같다.

<장의사>의 ‘아드리얀’도 자신의 가벼운, 그러나 악의가 잔뜩 담긴 심술궂은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 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현실화되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아드리얀’은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농담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역참지기>에서는 귀족 장교 민스키의 등장과 함께 ‘눈보라’가 일어난다. 역참지기는 예배 보러 가는 딸 두냐에게 “겁낼 게 뭐가 있니? 나리님이 늑대도 아니고 널 잡아먹기야 하겠니, 예배당까지 타고 가거라” 말하며 민스키와 딸이 함께 가도록 종용한다. 불안한 듯 망설이던 두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집을 나선다. 그런데 역참지기는 자신의 이 짧은 생각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는 예상치 못한다. 결국 일은 벌어지고, 이 가엾은 역참지기는 ‘자기가 어쩌자고 두냐를 경기병과 함께 타고 가게 했는지, 어쩌다 눈이 멀어 사람도 제대로 못 알아봤는지’ 한탄하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물론 삶에 일어나는 온갖 ‘눈보라’가 늘 불행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유쾌한 로맨스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눈보라’와 같은 사건은 ‘겁 많은 꼬리 잘린 암말’, 정확히는 사냥터에 갑자기 나타난 ‘토끼 한 마리’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반목하던 ‘이바노비치’와 ‘베레스토프’ 두 집안은 화해하게 되지 않는가.

‘삶이 그대를 속이는’,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해한, 뜻밖의 일들은 이렇게 인생 곳곳에서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그러나 그 면면을 잘 들여다보면 자연이 일으킨 재난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인간 그 자신에게서 ‘눈보라’가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비오’에게는 그 자신의 질투와 열등감이 눈보라를 일으킨 것이며, 역참지기는 손님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딸 두냐를 앞세워(정확히는 딸의 미모와 여성성을 이용해)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민스키 같은 사람 앞에 두냐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 것이다. 만일 손님들이 제아무리 불만을 터뜨리더라도 그때마다 두냐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앞서 말했듯이 <장의사>의 ‘아드리얀’은 그 자신의 심술궂음, 악의적인 농담으로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의 ‘눈보라’는 스스로 불러일으켰음이 더 뚜렷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눈보라’들은 처음에는 삶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지만 그 끝에는 어떤 의미로든 깨달음을 얻거나 긍정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불행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실비오는 도덕적인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그 자신의 깨달음으로 인해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며, 늘 죽음을 다루면서도 삶을 성찰할 줄 몰랐던 장의사 아드리얀은 이제 진정으로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역참지기의 딸 ‘두냐’의 인생도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눈보라>에는 하나 같이 크고 작은 뜻밖의 일로 인생이 그 전과 크게 달라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난한 이도, 부유한 이도 ‘삶의 눈보라’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대부분 그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또한 그에게 달려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은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도 유효하다. 푸시킨의 위대함은 이 짧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영롱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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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5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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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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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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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은 인물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추리와 환상을 뒤섞어 그리며 ‘자유’의 의미를 묻는다. 그런데 주인공 뎀바가 너무 찌질하고 짜증나는 캐릭터(스토커기질 다분함)라 동정과 연민조차 들지 않는다. 여성 ‘조냐’를 묘사하는 시선도 매우 낡았음. 카프카에 비교하기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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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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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쇼팽의 <각성>에서 다루는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결혼한 상류층 28세의 젊은 여성 ‘에드나’가 여름휴가로 머문 그랜드 아일의 한 별장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눈 뜬다는 설정만으로는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등 이미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고 있다. 사랑 없는,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하던 유부녀 주인공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와 정신적으로 만족하는 사랑을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 자기의 욕망에 깨달음 같은 것을 얻지만 결국 파멸로 치닫는 그런 이야기. 이른바 여성의 ‘부도덕한 일탈’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하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해도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플로베르나 톨스토이와 달리 케이트 쇼팽은 여성이기에 <보바리 부인>의 ‘엠마’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도 전혀 다른 인물인 ‘에드나’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에드나와 그녀가 사랑하는 ‘로베르’와의 관계도 ‘안나-브론스키’, ‘엠마-로돌프’ 또는 ‘엠마-레옹’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아도 사뭇 다르다. 에드나는 여름 별장에서 만난 로베르에게 호감과 사랑을 느끼지만 그와의 사랑은 성적인 결합이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에드나는 로베르에게 사랑을 느낀 뒤 다른 남자와 섹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조차 ‘안나’ 또는 ‘엠마’처럼 자신과 섹스한 남자에게 끌려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쥐락펴락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흔히 말하는 ‘밀당’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각성’ 뒤 새롭게 태어나, 그 어떤 남자에게도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에드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흠모하는 ‘아로뱅’과의 밀회는 그녀에게 그저 하나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마저도 내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아로뱅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로베르처럼 마음으로 좋아하는 남자도 아니다. 그래서 에드나는 “오늘은 아로뱅,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되겠지. 내겐 아무 상관없어.”(241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에드나는 여느 여성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가정적이며 모성애가 넘치고 여성스러운 매력의 화신과도 같은 ‘아델 라티뇰’과 자주 만나지만 진실로 가까워질 수 없다. 라티뇰 부인에 비해 에드나는 가정적인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다. 특히 모성애가 그러해서, 에드나는 모성애가 강하지 않다. ‘진짜 현실이든 상상이든 자기네 귀한 자식이 행여 조금이라도 다칠라치면 커다란 모성애라는 날개를 퍼덕’이고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걸 신성한 특권으로’ 여기며 이런 역할에 만족해하는 여성들과 거리가 아주 멀다. 아들들을 사랑하나, ‘그 사랑에는 뭔가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구석’이 있어서 가끔 두 아들을 뜨겁게 품에 안지만, 때로는 아이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도 어쩌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그다지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부재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성애의 책임에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는 측면’(42쪽)도 있는 것이다.

라티뇰 부인과 거리감이 있다고 해서 독립적이고 당당하지만 어딘가 삐딱해 세상과 불화하는 피아니스트 ‘라이즈’ 양과도 완벽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에드나는 라이즈에게는 조금 마음을 여는데, 아마도 라이즈가 에드나의 독립적인 면을 비롯해 뭇 여성들과 다른 면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즈는 에드나에게 그녀의 날개가 얼마나 튼튼한지 보겠다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174쪽)

<각성>에서 에드나가 깨어나기 시작한 계기, 즉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기 시작한 계기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로베르와의 사랑으로 인해 에드나가 이런 각성의 계기를 얻었다고 보는데, 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해석이 조금 못마땅하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여자가 예전의 권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자아를 깨닫고, 자기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가 꼭 남자여야 할까? 그러고 보니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떠오른다. 이 작품들은 남자 작가가 썼기에, 남자를 만나 여성이 변화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설정에 익숙해진 많은 비평가들이 <각성>의 에드나 또한 로베르와의 사랑을 통해 새롭게 ‘각성’했다고 너무도 안일하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작품을 잘 살펴보면 에드나가 첫 번째로 ‘각성’하는 계기, 즉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힘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는 계기는 ‘바다 수영’임을 알 수 있다. 수영을 할 줄 몰랐던 그녀는 여름휴가 동안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방법을 익히고 처음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저 멀리까지 나아간다. 예전 에드나에게, 바다와 그 너머 세계는 금지된 장소였다. 그러나 홀로 헤엄쳐서 드디어 바다 멀리 나아간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힘을 깨닫는다. 이 일로 ‘희미하던 어떤 빛이 분명’해지고, ‘그 빛은 하나의 길을 보여’주게 된다. 수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 그 감격에 도취해 별장 밖에서 꿈꾸듯 행복감에 젖어 있던 에드나에게 남편 레옹스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제안하자 그녀는 사뭇 도전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말한다. “저는 여기 더 있을 거예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들어갈 생각도 없고요.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 말아요. 이제 더는 대답 안 할래요.”(69쪽). 전통적으로 문학에서 물은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에드나에게 바다 수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결말, 에드나가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그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이미 자아를 확고하게 깨달은 여성이 사회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꿈꾸며 끝없이 나아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나의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세상에 던지는 하나의 당찬 도전이 아닐까. 도덕적으로 파탄난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안나’와 ‘엠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에드나가 각성하는 두 번째 계기는 라이즈 양이 연주한 피아노 음악이다. 에드나가 <고독>이라고 이름 붙인 곡을 라이즈가 연주하자 그 음악을 듣고 에드나는 전율한다. 음악을 들은 뒤 감동에 빠진 에드나는 자신의 ‘존재가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느낀다. ‘파도가 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때리듯, 바로 열정 그 자체가 그녀의 영혼에서 깨어나 영혼을 압도하며 뒤흔든다’. 에드나는 전율하고, 숨도 쉴 수 없다. 라이즈가 에드나만이 음악을 제대로 들을 줄 안다고 말한 부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음악으로 영혼이 깨어남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에드나는 전에는 불가능했던 바다 수영을 해내고 ‘육체’의 해방을 맞이하며, 라이즈의 연주를 듣고 ‘정신’이 깨어난 것이다. 에드나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도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난 다음이다. 이 무렵에 모호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로베르에 대한 감정 또한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까 로베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각성한 게 아니라, 수영과 음악을 통해 자기의 영혼이 깨어남을 느끼고 로베르를 향한 욕망에도 눈을 뜨는 것이다. 평생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했고, 이를 입 밖에 낸 적이 결코 없었던 에드나는 이 두 가지 일을 계기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똑똑히 말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자신에게 속한, 자신만의 것’이라고 느끼며 ‘혼자서 이를 누릴 권리’가 있고,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녀나 그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새롭게 태어난 에드나 앞에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혼자서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즐겁게 찾아다닌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꿈을 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와 엄마로서 주어졌던 일,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기 존재가 더 강해지고 딛고 선 범위도 넓어’진다.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저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된다. ‘이제 자신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살 뿐, <세상의 평판을 의식하며> 사는 데 만족할 수’(197쪽) 없다. 그런 그녀가 집을 나와 소박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이 공간을 로베르나, 아로뱅과의 밀회 장소로 쓰기 위해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에드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에드나는 남편과 사는 집을 한 번도 자신의 집 같았던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집이나 그 집에 들어가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며, 엄마로부터 받은 유산과 직접 경마에서 딴 돈, 자신의 그림을 판매한 돈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다. 살림에 꼭 필요한 간단하고 자질구레한 생필품도 ‘자기 돈’으로 마련한다. 기존의 문학작품에서 집을 벗어나 다른 공간을 얻는 여인들은, 그 공간을 남편이 아닌 남자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마련하고, 그 마저도 자기 돈으로 마련하기보다는 남편 돈이나, 연인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여성들과 에드나는 확실히 다른 여자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에드나는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그녀는 이제 ‘세상 밖으로 나설 때 차려입던 옷처럼 자신을 포장하던 거짓 자아를 벗어던지’고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아버지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이지 바보 같은 남자군요. 퐁텔리에 씨가 나를 자유롭게 놔주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꿈꾸며 세월을 낭비하다니! 난 이제 퐁텔리에 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에요. 내 선택에 나 자신을 맡길 거예요. <로베르, 여기 있네. 이 여잘 데려가서 행복하게 살게나. 이제 그 여자는 자네 것일세!>라고 한다면, 당신네 둘 다 비웃을 거예요.” (226쪽)


이렇게 새로 태어난 에드나를 포용하기에 로베르는 너무도 평범한 남자이다. 아로뱅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로베르의 그 진부한 선택에 에드나는 ‘바보 같은 남자’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남편 레옹스와 두 아들은 에드나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베르와 아로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에드나를 둘러싼 주위의 평범한 인물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각성한 그녀가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녀는 저 먼 바다로 다시 팔을 저어 나아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언젠가 에드나가 지어내어 들려줬던 이야기. ‘어느 날 밤 통나무배를 타고 연인과 함께 노를 저어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처럼 다시는 이 답답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이 하염없이 나아간다. 때문에 <각성>의 결말은 더 이상 아내, 엄마 등 누군가와 이어진 ‘여성’이 아니라, 오롯이 홀로선 인간, 진정한 자아를 찾은 한 사람의 완전한 해방을 보여준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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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 왠지...

케이트 쇼팽이라는 작가가
궁금해집니다.

잠자냥 2020-01-09 18:02   좋아요 0 | URL
네 아마 레삭매냐 님이 한번 읽게 되시면 케이트 쇼팽 전작 뽀개기를 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ㅎㅎ

2020-01-1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2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2-03 10:08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게요. ㅎㅎ
 

사놓고 미처 못 읽은 책이 많다. 그중에 이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와 <빛 혹은 그림자> 이 두 책도 있다. 이 두 책은 사실 공모전 때문에 여태 읽지 못했다. 문학동네에서는 이 책들이 나올 때마다 18번째 소설 공모전을 벌였는데, 나는 두 번 모두 도전했었다. 주어진 그림을 보고 작품을 쓰는 것도 재미있었고, 입상하면 전자책 출간을 해준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상금도 있었다.....만 상금은 참 미미하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쓴 작품을 읽고 나서 내가 단편을 쓰겠다고 끼적이면 좌절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것 같아서 공모전에 작품을 내기 전까지는 이 책들을 사두고 읽지 못했다. 이제 두 번의 공모전이 다 끝났고, 전자책도 나왔다. 모르고 있었는데,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18번째 소설 공모전 수상작품집>은 어제 나온 듯.


<빛 혹은 그림자>에 이어서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에도 내 작품이 실렸다. 두 번째에서는 대상을 노렸건만 ㅋㅋㅋㅋ 아, 입상에 그치고 말았네.


아무튼, 관심 있는 분들은 다운로드 해서 읽어보시길. 무료다.


첫 번째 공모전 창작을 위해 주어진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케이프코드의 아침>. 이 그림에서 착안해 단편을 써야 했다.




내 작품은 <빛 혹은 그림자 18번째 소설 공모전 수상작품집>에서는 <개가 물어온 것>이다.




두 번째 단편 창작을 위해 주어진 그림은 라피엘 소이어 <오피스 걸스>였다.



<주황은 고통, 파랑은 광기 18번째 소설 공모전 수상작품집>에서는 <완벽한 여인 T>이다.



나도 다운로드 받으러 가야겠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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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1-0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드립니다. ⚘

잠자냥 2020-01-07 14: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

단발머리 2020-01-0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잠자냥님! 단편 2개나 입상하셨다니!! 정말 멋지십니다!
다음에는 원하시는대로 꼭 대상 수상자 되시길 바래요!
저도 다운로드 받으러 가야겠어요^^

잠자냥 2020-01-07 21:31   좋아요 0 | URL
네네~ 감사합니당~~

초록별 2020-01-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저도 꼭 읽어볼께요..

잠자냥 2020-01-07 21:32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coolcat329 2020-01-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다운로드는 어디서 받나요? 찾다가 못찾고 다시 왔습니다...🤤

잠자냥 2020-01-07 22:07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이 페이퍼 맨 아래에 책 이미지 올려놓은 것 클릭해보세요~ 바로 그 책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다락방 2020-01-08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호퍼 그림의 저 책은 사두고 안읽었어요. 공모전 있다고 해서 나도 써볼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하다 말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잠자냥 님은 쓰셨고! 게다가 글이 실리셨군요! 와 대박이에요. 잠자냥 님 뭘 해도 하실 분이시네요. 앞으로 제가 읽게될 잠자냥 님의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후훗.

잠자냥 2020-01-08 09:39   좋아요 0 | URL
써보시지 그랬어요! 궁금한데 ㅎㅎ 응원과 칭찬 모두 감사합니다. ㅎㅎ

유부만두 2020-01-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어쩐지!

잠자냥 2020-01-08 09: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_ _)

2020-01-08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9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5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20-01-30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작품 다 읽고 축하인사 남기려고 축하 인사가 좀 늦었어요~ 잠자냥님 글 읽으면서 ‘행크‘라는 화폐단위 쓰는 나라가 어디일까 찾아봤지 뭡니까 ㅋㅋ 넘 멋져요! 앞으로도 쭉 응원합니다.

잠자냥 2020-01-30 12:31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 화폐단위는 그냥 제 머리속에서 나온 가상의... 쿨럭. ㅎㅎㅎ
아주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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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낳을 생각이 없다. 인간을 낳아 이 지구에 피해 주지 않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나만큼은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가끔 부모로서 자식한테 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자기 신념이나 사상을 강요하는 일. 그것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신념이 종교라면 더더욱 그렇다. 부모의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가톨릭이기 때문에, 불교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행위가 하나의 폭력으로 느껴진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종교인이 되든지, 비종교인으로 살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부모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식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도 꼭 그런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제 겨우 열다섯 소녀인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 이 두 남매의 아버지인 ‘유진’은 ‘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뜻의 ‘오멜로라’라는 칭호를 얻었을 만큼 큰 부자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떨치는 인물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칭호는 세습되거나 지역 사회에 기여한 자에게만 주어진다. 아버지 유진은 그 칭호를 그저 돈으로 산 것이 아니다.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돌봐주며, 모든 언론이 부패해도 단 하나 진실의 목소리를 낸다는 신문사 <스탠더드>를 운영한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캄빌리의 아버지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는 자기가 본 최고의 거물이자 자기가 일해 본 최고의 고용주라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 아이들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겐 일자리를 찾아준다. 모두가 캄빌리와 자자를 부러워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캄빌리와 자자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아니 웃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아버지 ‘유진’은 어릴 때 나이지리아에 온 가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얻은 뒤 자수성가했다. 그때부터 가톨릭과 하느님은 그에게 운명이자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당연히 그의 자식들은 가톨릭을 믿어야 하며, 교양인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영어’를 써야 한다. 남들 앞에서 ‘이보어’를 써서는 안 된다. 토착 종교를 믿는 유진의 아버지, 그러니까 캄빌리와 자자의 할아버지는 이단이기 때문에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이페오바’ 고모는 말한다. ‘너희 아버지야말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라고. 유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괴물이 되었는지 이해는 하는 눈치다. 그래, 아내와 자식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고, 이단인 할아버지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언제나 1등만을 강요하는 행위는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나 이 남자는 하물며 인권상을 받은 인물인데, 지역 사회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선하고 바른 인물인데 캄빌리와 자자,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는 독버섯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들 집에는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자신이 엄격하게 짜놓은 계율(일과표이든, 종교적 행위이든)을 어기면 가혹한 폭력이 시작된다. 십대인 딸과 아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 방법은 너무 잔인해서 보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껴안고는 그 모두가 하느님을 위한 행위라고, 너희를 사랑해서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역겹기 짝이 없다. 딸과 아들에게 행하는 물리적 폭력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비해 아내에게 행하는 폭력은 아이들 눈을 피해 은밀히 교묘하게 자행된다. 그러나 얼마나 빈번한지, 아이들은 곧 폭력이 일어날 분위기를 감지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럼에도 그 공포의 소리는 막을 수 없다. 캄빌리와 자자, 아이들의 엄마는 일상화된 폭력 속에 방치된 채 자신들을 지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만큼 아버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자기가 이 집안에서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아들 자자가 아버지에게 반항 하면서 파열음을 내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웃을 줄 모르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 두 남매가 어떻게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되는 것일까? 그 모든 일은 아버지와 한 핏줄이지만 전혀 다른 인물인 고모 ‘이페오마’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고모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오빠 ‘유진’의 문제점도, 그 유진의 영향으로 아이들과 시누이가 망가져 가고 있음을 눈치 채고 이들을 구원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은수카로 며칠 동안 캄빌리와 자자를 데리고 와 머물게 하는데, 그동안 캄빌리와 자자는 자신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자유’를 위한 ‘저항’을 은밀히 꿈꾸게 된다.

고모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늘 그치지 않는다. 고모의 집에서는 대개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못하는 말들이 사촌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캄빌리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자신의 집에서는, 특히 자기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 있는 말만 했어야 하는데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다. 그저 아무 때나 누구한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식탁, 자기가 원하는 만큼 숨 쉴 수 있는 식탁을 목격하고 캄빌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아무 때나 웃고 아무 때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자기 생각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웃음을 잃어버린 캄빌리와 자자에게 이 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캄빌리보다는 나이가 많은 탓일까? 자자는 좀 더 적극적이다.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라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되뇌던 자자는 서서히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시도를 한다.

이렇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유진으로 상징되는 폭력적인 가부장제와 함께 나이지리아 사회의 부정부패를 다루며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삶을 그린다. 유진의 폭력에 숨죽인 채 살아가는 캄빌리와 자자, 그리고 엄마는 어찌 보면 나이지리아 정권 아래 입 다물고 귀 막고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힘없는 이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고 배움이 없는 이들만이 약자가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신분이지만, 고모의 삶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뿐더러 정치가 불안정해 자유롭게 말하고 가르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기형적인 인물인 유진도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그조차도 희생자이다. 물론 이 괴물의 손아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와 자자 캄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많지 않다. 그 괴물에 맞서 저항하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온통 빨간색 히비스커스 천지 속에서 조금씩 꽃을 피우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꿈꾸는 일은 이런 폭압적인 상황에서도 조용히 이루어진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런데 나는 캄빌리나 자자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는 ‘그 방식’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 형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아버지를 완전히 떠나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캄빌리가 ‘아마디’ 신부를 보며 느끼는 이성적인 감정이나 호기심, 또는 사랑을 느끼는 부분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십대 소녀라서 자연스러운 감정일지 모르겠지만 글쎄……. 꼭 소녀가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껴야만 어떤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가난한 이들을 돕기는 하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껴안기보다는 미개하고 야만인처럼 취급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대비되는 종교인 아마디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꼭 그것이 사랑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오빠 ‘자자’에 비해서 수동적이고 결연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는 캄빌리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겠지. 캄빌리는 조금씩 변하고 자라는 중이니까.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 소녀는 아마 자라서, 나이지리아를 떠나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는 고모 ‘이페오마’ 같은 여성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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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의 책을 완전히 거꾸로 순서에 의하여 읽는군요. ㅋㅋㅋ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잠자냥 2020-01-06 14:11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작가 소설은 이게 처음이었어요. 부럽죠? ㅋㅋㅋ
이 작가가 낸 페미니즘 관련 서적만 읽었는데, 이 작품으로 소설가로서 그의 이름을 더 각인해 봅니다.
이제 쭉 순서대로 읽어보려고요. ㅎㅎ

다락방 2020-01-0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으려고 토요일에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아아... 잠자냥 님보다 뭐라도 한 권 더 빨리 읽을 수 있는게 없네요. 이것도 잠자냥 님이 먼저 읽어버리시고 저는 이렇게 좋은 리뷰로 먼저 감상합니다.....

잠자냥 2020-01-06 15:21   좋아요 0 | URL
트위터에서 도서관에서 빌리신 거 보고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라고 달려고 하다가 참았어요. ㅎㅎ 저는 금요일인가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재미도 있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하루 만에 읽었습니당.

yujulovesake 2020-01-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어보고싶었는데..ㅎㅎ 리뷰 보니 반가워요!!ㅎㅎ

잠자냥 2020-01-06 15:22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재미있어서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