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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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쇼팽의 <각성>에서 다루는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결혼한 상류층 28세의 젊은 여성 ‘에드나’가 여름휴가로 머문 그랜드 아일의 한 별장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눈 뜬다는 설정만으로는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등 이미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고 있다. 사랑 없는,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하던 유부녀 주인공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와 정신적으로 만족하는 사랑을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 자기의 욕망에 깨달음 같은 것을 얻지만 결국 파멸로 치닫는 그런 이야기. 이른바 여성의 ‘부도덕한 일탈’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하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해도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플로베르나 톨스토이와 달리 케이트 쇼팽은 여성이기에 <보바리 부인>의 ‘엠마’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도 전혀 다른 인물인 ‘에드나’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에드나와 그녀가 사랑하는 ‘로베르’와의 관계도 ‘안나-브론스키’, ‘엠마-로돌프’ 또는 ‘엠마-레옹’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아도 사뭇 다르다. 에드나는 여름 별장에서 만난 로베르에게 호감과 사랑을 느끼지만 그와의 사랑은 성적인 결합이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에드나는 로베르에게 사랑을 느낀 뒤 다른 남자와 섹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조차 ‘안나’ 또는 ‘엠마’처럼 자신과 섹스한 남자에게 끌려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쥐락펴락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흔히 말하는 ‘밀당’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각성’ 뒤 새롭게 태어나, 그 어떤 남자에게도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에드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흠모하는 ‘아로뱅’과의 밀회는 그녀에게 그저 하나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마저도 내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아로뱅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로베르처럼 마음으로 좋아하는 남자도 아니다. 그래서 에드나는 “오늘은 아로뱅,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되겠지. 내겐 아무 상관없어.”(241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에드나는 여느 여성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가정적이며 모성애가 넘치고 여성스러운 매력의 화신과도 같은 ‘아델 라티뇰’과 자주 만나지만 진실로 가까워질 수 없다. 라티뇰 부인에 비해 에드나는 가정적인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다. 특히 모성애가 그러해서, 에드나는 모성애가 강하지 않다. ‘진짜 현실이든 상상이든 자기네 귀한 자식이 행여 조금이라도 다칠라치면 커다란 모성애라는 날개를 퍼덕’이고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걸 신성한 특권으로’ 여기며 이런 역할에 만족해하는 여성들과 거리가 아주 멀다. 아들들을 사랑하나, ‘그 사랑에는 뭔가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구석’이 있어서 가끔 두 아들을 뜨겁게 품에 안지만, 때로는 아이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도 어쩌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그다지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부재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성애의 책임에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는 측면’(42쪽)도 있는 것이다.

라티뇰 부인과 거리감이 있다고 해서 독립적이고 당당하지만 어딘가 삐딱해 세상과 불화하는 피아니스트 ‘라이즈’ 양과도 완벽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에드나는 라이즈에게는 조금 마음을 여는데, 아마도 라이즈가 에드나의 독립적인 면을 비롯해 뭇 여성들과 다른 면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즈는 에드나에게 그녀의 날개가 얼마나 튼튼한지 보겠다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174쪽)

<각성>에서 에드나가 깨어나기 시작한 계기, 즉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기 시작한 계기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로베르와의 사랑으로 인해 에드나가 이런 각성의 계기를 얻었다고 보는데, 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해석이 조금 못마땅하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여자가 예전의 권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자아를 깨닫고, 자기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가 꼭 남자여야 할까? 그러고 보니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떠오른다. 이 작품들은 남자 작가가 썼기에, 남자를 만나 여성이 변화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설정에 익숙해진 많은 비평가들이 <각성>의 에드나 또한 로베르와의 사랑을 통해 새롭게 ‘각성’했다고 너무도 안일하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작품을 잘 살펴보면 에드나가 첫 번째로 ‘각성’하는 계기, 즉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힘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는 계기는 ‘바다 수영’임을 알 수 있다. 수영을 할 줄 몰랐던 그녀는 여름휴가 동안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방법을 익히고 처음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저 멀리까지 나아간다. 예전 에드나에게, 바다와 그 너머 세계는 금지된 장소였다. 그러나 홀로 헤엄쳐서 드디어 바다 멀리 나아간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힘을 깨닫는다. 이 일로 ‘희미하던 어떤 빛이 분명’해지고, ‘그 빛은 하나의 길을 보여’주게 된다. 수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 그 감격에 도취해 별장 밖에서 꿈꾸듯 행복감에 젖어 있던 에드나에게 남편 레옹스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제안하자 그녀는 사뭇 도전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말한다. “저는 여기 더 있을 거예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들어갈 생각도 없고요.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 말아요. 이제 더는 대답 안 할래요.”(69쪽). 전통적으로 문학에서 물은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에드나에게 바다 수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결말, 에드나가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그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이미 자아를 확고하게 깨달은 여성이 사회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꿈꾸며 끝없이 나아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나의 선택은 비극이 아니라 세상에 던지는 하나의 당찬 도전이 아닐까. 도덕적으로 파탄난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안나’와 ‘엠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에드나가 각성하는 두 번째 계기는 라이즈 양이 연주한 피아노 음악이다. 에드나가 <고독>이라고 이름 붙인 곡을 라이즈가 연주하자 그 음악을 듣고 에드나는 전율한다. 음악을 들은 뒤 감동에 빠진 에드나는 자신의 ‘존재가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느낀다. ‘파도가 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때리듯, 바로 열정 그 자체가 그녀의 영혼에서 깨어나 영혼을 압도하며 뒤흔든다’. 에드나는 전율하고, 숨도 쉴 수 없다. 라이즈가 에드나만이 음악을 제대로 들을 줄 안다고 말한 부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음악으로 영혼이 깨어남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에드나는 전에는 불가능했던 바다 수영을 해내고 ‘육체’의 해방을 맞이하며, 라이즈의 연주를 듣고 ‘정신’이 깨어난 것이다. 에드나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도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난 다음이다. 이 무렵에 모호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로베르에 대한 감정 또한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까 로베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각성한 게 아니라, 수영과 음악을 통해 자기의 영혼이 깨어남을 느끼고 로베르를 향한 욕망에도 눈을 뜨는 것이다. 평생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했고, 이를 입 밖에 낸 적이 결코 없었던 에드나는 이 두 가지 일을 계기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똑똑히 말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은 ‘자신에게 속한, 자신만의 것’이라고 느끼며 ‘혼자서 이를 누릴 권리’가 있고,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녀나 그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새롭게 태어난 에드나 앞에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혼자서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즐겁게 찾아다닌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꿈을 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와 엄마로서 주어졌던 일,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기 존재가 더 강해지고 딛고 선 범위도 넓어’진다.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저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된다. ‘이제 자신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살 뿐, <세상의 평판을 의식하며> 사는 데 만족할 수’(197쪽) 없다. 그런 그녀가 집을 나와 소박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이 공간을 로베르나, 아로뱅과의 밀회 장소로 쓰기 위해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에드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에드나는 남편과 사는 집을 한 번도 자신의 집 같았던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집이나 그 집에 들어가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며, 엄마로부터 받은 유산과 직접 경마에서 딴 돈, 자신의 그림을 판매한 돈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얻는다. 살림에 꼭 필요한 간단하고 자질구레한 생필품도 ‘자기 돈’으로 마련한다. 기존의 문학작품에서 집을 벗어나 다른 공간을 얻는 여인들은, 그 공간을 남편이 아닌 남자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마련하고, 그 마저도 자기 돈으로 마련하기보다는 남편 돈이나, 연인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여성들과 에드나는 확실히 다른 여자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에드나는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그녀는 이제 ‘세상 밖으로 나설 때 차려입던 옷처럼 자신을 포장하던 거짓 자아를 벗어던지’고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아버지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이지 바보 같은 남자군요. 퐁텔리에 씨가 나를 자유롭게 놔주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꿈꾸며 세월을 낭비하다니! 난 이제 퐁텔리에 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에요. 내 선택에 나 자신을 맡길 거예요. <로베르, 여기 있네. 이 여잘 데려가서 행복하게 살게나. 이제 그 여자는 자네 것일세!>라고 한다면, 당신네 둘 다 비웃을 거예요.” (226쪽)


이렇게 새로 태어난 에드나를 포용하기에 로베르는 너무도 평범한 남자이다. 아로뱅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로베르의 그 진부한 선택에 에드나는 ‘바보 같은 남자’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남편 레옹스와 두 아들은 에드나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베르와 아로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에드나를 둘러싼 주위의 평범한 인물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각성한 그녀가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녀는 저 먼 바다로 다시 팔을 저어 나아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언젠가 에드나가 지어내어 들려줬던 이야기. ‘어느 날 밤 통나무배를 타고 연인과 함께 노를 저어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처럼 다시는 이 답답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이 하염없이 나아간다. 때문에 <각성>의 결말은 더 이상 아내, 엄마 등 누군가와 이어진 ‘여성’이 아니라, 오롯이 홀로선 인간, 진정한 자아를 찾은 한 사람의 완전한 해방을 보여준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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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 왠지...

케이트 쇼팽이라는 작가가
궁금해집니다.

잠자냥 2020-01-09 18:02   좋아요 0 | URL
네 아마 레삭매냐 님이 한번 읽게 되시면 케이트 쇼팽 전작 뽀개기를 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ㅎㅎ

2020-01-1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2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0-02-03 10:08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