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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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낳을 생각이 없다. 인간을 낳아 이 지구에 피해 주지 않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나만큼은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가끔 부모로서 자식한테 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자기 신념이나 사상을 강요하는 일. 그것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신념이 종교라면 더더욱 그렇다. 부모의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가톨릭이기 때문에, 불교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행위가 하나의 폭력으로 느껴진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종교인이 되든지, 비종교인으로 살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부모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식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도 꼭 그런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제 겨우 열다섯 소녀인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 이 두 남매의 아버지인 ‘유진’은 ‘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뜻의 ‘오멜로라’라는 칭호를 얻었을 만큼 큰 부자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떨치는 인물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칭호는 세습되거나 지역 사회에 기여한 자에게만 주어진다. 아버지 유진은 그 칭호를 그저 돈으로 산 것이 아니다.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돌봐주며, 모든 언론이 부패해도 단 하나 진실의 목소리를 낸다는 신문사 <스탠더드>를 운영한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캄빌리의 아버지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는 자기가 본 최고의 거물이자 자기가 일해 본 최고의 고용주라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 아이들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겐 일자리를 찾아준다. 모두가 캄빌리와 자자를 부러워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캄빌리와 자자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아니 웃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아버지 ‘유진’은 어릴 때 나이지리아에 온 가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얻은 뒤 자수성가했다. 그때부터 가톨릭과 하느님은 그에게 운명이자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당연히 그의 자식들은 가톨릭을 믿어야 하며, 교양인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영어’를 써야 한다. 남들 앞에서 ‘이보어’를 써서는 안 된다. 토착 종교를 믿는 유진의 아버지, 그러니까 캄빌리와 자자의 할아버지는 이단이기 때문에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이페오바’ 고모는 말한다. ‘너희 아버지야말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라고. 유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괴물이 되었는지 이해는 하는 눈치다. 그래, 아내와 자식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고, 이단인 할아버지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언제나 1등만을 강요하는 행위는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나 이 남자는 하물며 인권상을 받은 인물인데, 지역 사회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선하고 바른 인물인데 캄빌리와 자자,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는 독버섯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들 집에는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자신이 엄격하게 짜놓은 계율(일과표이든, 종교적 행위이든)을 어기면 가혹한 폭력이 시작된다. 십대인 딸과 아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 방법은 너무 잔인해서 보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껴안고는 그 모두가 하느님을 위한 행위라고, 너희를 사랑해서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역겹기 짝이 없다. 딸과 아들에게 행하는 물리적 폭력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비해 아내에게 행하는 폭력은 아이들 눈을 피해 은밀히 교묘하게 자행된다. 그러나 얼마나 빈번한지, 아이들은 곧 폭력이 일어날 분위기를 감지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럼에도 그 공포의 소리는 막을 수 없다. 캄빌리와 자자, 아이들의 엄마는 일상화된 폭력 속에 방치된 채 자신들을 지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만큼 아버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자기가 이 집안에서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아들 자자가 아버지에게 반항 하면서 파열음을 내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웃을 줄 모르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 두 남매가 어떻게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되는 것일까? 그 모든 일은 아버지와 한 핏줄이지만 전혀 다른 인물인 고모 ‘이페오마’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고모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오빠 ‘유진’의 문제점도, 그 유진의 영향으로 아이들과 시누이가 망가져 가고 있음을 눈치 채고 이들을 구원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은수카로 며칠 동안 캄빌리와 자자를 데리고 와 머물게 하는데, 그동안 캄빌리와 자자는 자신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자유’를 위한 ‘저항’을 은밀히 꿈꾸게 된다.

고모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늘 그치지 않는다. 고모의 집에서는 대개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못하는 말들이 사촌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캄빌리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자신의 집에서는, 특히 자기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 있는 말만 했어야 하는데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다. 그저 아무 때나 누구한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식탁, 자기가 원하는 만큼 숨 쉴 수 있는 식탁을 목격하고 캄빌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아무 때나 웃고 아무 때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자기 생각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웃음을 잃어버린 캄빌리와 자자에게 이 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캄빌리보다는 나이가 많은 탓일까? 자자는 좀 더 적극적이다.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라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되뇌던 자자는 서서히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시도를 한다.

이렇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유진으로 상징되는 폭력적인 가부장제와 함께 나이지리아 사회의 부정부패를 다루며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의 삶을 그린다. 유진의 폭력에 숨죽인 채 살아가는 캄빌리와 자자, 그리고 엄마는 어찌 보면 나이지리아 정권 아래 입 다물고 귀 막고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힘없는 이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고 배움이 없는 이들만이 약자가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신분이지만, 고모의 삶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뿐더러 정치가 불안정해 자유롭게 말하고 가르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기형적인 인물인 유진도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그조차도 희생자이다. 물론 이 괴물의 손아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와 자자 캄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많지 않다. 그 괴물에 맞서 저항하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온통 빨간색 히비스커스 천지 속에서 조금씩 꽃을 피우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꿈꾸는 일은 이런 폭압적인 상황에서도 조용히 이루어진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런데 나는 캄빌리나 자자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는 ‘그 방식’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 형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아버지를 완전히 떠나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캄빌리가 ‘아마디’ 신부를 보며 느끼는 이성적인 감정이나 호기심, 또는 사랑을 느끼는 부분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십대 소녀라서 자연스러운 감정일지 모르겠지만 글쎄……. 꼭 소녀가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껴야만 어떤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가난한 이들을 돕기는 하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껴안기보다는 미개하고 야만인처럼 취급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대비되는 종교인 아마디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꼭 그것이 사랑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오빠 ‘자자’에 비해서 수동적이고 결연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는 캄빌리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겠지. 캄빌리는 조금씩 변하고 자라는 중이니까.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 소녀는 아마 자라서, 나이지리아를 떠나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는 고모 ‘이페오마’ 같은 여성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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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의 책을 완전히 거꾸로 순서에 의하여 읽는군요. ㅋㅋㅋ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잠자냥 2020-01-06 14:11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작가 소설은 이게 처음이었어요. 부럽죠? ㅋㅋㅋ
이 작가가 낸 페미니즘 관련 서적만 읽었는데, 이 작품으로 소설가로서 그의 이름을 더 각인해 봅니다.
이제 쭉 순서대로 읽어보려고요. ㅎㅎ

다락방 2020-01-0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으려고 토요일에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아아... 잠자냥 님보다 뭐라도 한 권 더 빨리 읽을 수 있는게 없네요. 이것도 잠자냥 님이 먼저 읽어버리시고 저는 이렇게 좋은 리뷰로 먼저 감상합니다.....

잠자냥 2020-01-06 15:21   좋아요 0 | URL
트위터에서 도서관에서 빌리신 거 보고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라고 달려고 하다가 참았어요. ㅎㅎ 저는 금요일인가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재미도 있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하루 만에 읽었습니당.

yujulovesake 2020-01-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어보고싶었는데..ㅎㅎ 리뷰 보니 반가워요!!ㅎㅎ

잠자냥 2020-01-06 15:22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재미있어서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