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로 앓아누운 지난 주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누군가에게도 그러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적어도 책이 어떤 의미로든 치유의 역할을 한다. 몸이 아프니까 가벼운 읽기가 좋지 않을 싶기도 한데, 종일 멍하게 있던 터라 지나치게 가벼운 책을 읽으면 그것도 너무 허무하고, 그렇다고 머리를 심하게 써야하는 책도 부적절해 보였다. 그럴 때 <갈대 속의 영원>이 눈에 들어왔다. 책에 관한 책이라니 완벽하게, 아픈 몸을 잊게 해 줄 것만 같다. 게다가 적당히 깊이도 있고 흥미로워 보이는 이 책, 정말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스와 로마, 그 오래전의 책덕후들부터 오늘날의 책덕후들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 책을 이틀 동안 꼬박 읽었다. 아, 그래, 그렇다.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in angulo cum libro”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당연하게도 <갈대 속의 영원>에서는 에코의 이 책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 책을 독점하던 이들, 책을 지키려던 이들, 책으로 살인을 꾀한 이들……. 그런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나는 어쩌다 책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책을 덮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곰곰 생각에 잠겨본다.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내가 죽는 순간에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일이 있다면 단언컨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평생 책을 읽고 살았던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고양이와 함께 살았던 것이리라. 책을 좋아하다 못해 이제는 책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사는 인생. 나 또한 나름 책덕후이다. <갈대 속의 영원>을 쓴 이레네 바예호도 심한 책덕후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반해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그는 마침내 어느 도서관에서 이 아름다운 책을 쓴다.
저자가 처음 책덕후로 지목한 사람은 <일리아스>를 몹시 사랑했던 알렉산드로스이다.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후 가장 값비싼 보물 상자를 마주한 알렉산드로스- 그는 상자 안에 얼마나 값어치 있는 물건을 보관해야겠느냐며 주변에 묻는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은 조금 뻔하다. 돈이나 보석, 전리품 등을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알렉산드로스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을 상자에 보관하라고 명한다. 그것이 바로 <일리아스>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때부터 지독한 일리아스 덕후였다. 신화 속의 영웅을 닮고자 했고, 그런 영원한 명성을 갈구했다. 그는 온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그리스어, 유대어, 이집트어, 이란어, 인도어로 쓰인 책들을 모아 도서관을 채운다. 그에게 책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소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레네 바예호는 이제 눈길을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던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 이건 책에 관한 책이 쓰는 너무 흔한 방식이잖아 싶어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바예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시공을 초월하고 장르도 넘나든다. 고대에서 현대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책에서 영화로 역사에서 예술로 종횡무진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를 하다가 로렌스 더럴의 명작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로 넘어가기도 하고 야만적이던 마케도니아인들이 아테네와 그리스의 문화를 그리워하고 모방하고자 했던 심리를 설명하다가 문득 조르조 바사니의 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를 동경하던 마케도니아인들의 열망을 마치 페라라의 부유한 유대인의 저택에 있는 정원과 테니스 코트, 높은 성벽에 비유한다.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은 저택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불안한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는 곳이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그곳에 계속 머물지는 못하는 그런 심정에.
그렇게 저자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장점을 충분히 살려 그리스-로마의 책과 박물관, 도서관, 글쓰기와 언어, 인간의 지식에 대한 열망의 역사를 유려하게 탐구해 나간다. 잘 알다시피 한때 문자와 책은 소수의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평범한 이들이 글자를 아는 것, 책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책과 지식을 자신들만 소유하고자 했다. 때문에 책과 글쓰기 등의 행위는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갈대 속의 영원>은 이 또한 놓치지 않고 각박한 환경에서도 책을 만들어내고 읽고 탐하고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도 담는다. 세계의 책들을 손에 넣기 위해 절대 권력을 휘두른 고대 이집트의 왕들, 비밀문서를 뒤통수에 문신으로 새겨 운반한 고대의 전령, 서점 장사를 통해 혁명 자금을 댄 마오쩌둥, 수용소에서도 독서 클럽을 이어간 이들….
나는 무엇보다 책을 지키기 위해, 언어와 문자의 힘을 알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쓴 이들의 노력과 절망을 인상 깊게 보았다. 바예호가 말하듯이 “도서관, 학교, 박물관은 폭력적 환경에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취약한 기관”(293쪽)이다. 그것의 근간이 되는 책은 또 어떤가. 불이나 물에 쉽게 손상된다.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책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몇몇 독재자는 권력을 휘둘러 책을 불태우기도 한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도서관 바닥에서 폐허를 응시하며 절규하던 어느 종군 기자의 말에는 절로 눈물이 난다. "책이 타버리면, 책이 부서지면, 책이 죽으면, 우리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훼손된다. 책이 불타면, 모든 생명,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생명과 그 책이 장차 모든 생명에게 줄 수 있었던 따스함, 지식, 지성, 기쁨, 희망도 죽는다. 책을 파괴하는 짓은 그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299쪽)
전쟁에서 패전한 국가의 책과 박물관, 도서관, 언어를 말살하려는 행위-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이 도서관을 파괴하거나 책을 불태우거나 그에 상응하는 행위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옮겨보자면 글쓰기는 사람들을 더욱 “현명하게”할 것이며 “이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152쪽)이다. 독재자들은 억압의 대상들이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지기를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로마는 세계를 재패했지만 그리스 문화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노예인 그리스인들이 복사, 쓰기, 문서화 작업에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십분 활용한다. 책을 낭독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로마의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노예가 글을 아는 것은 금기였다. 글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망겔은 <독서의 역사>에 이렇게 쓴다. “미국 남부 전역의 대농장 소유주들은 철자를 아는 노예를 교수형에 처했다. 노예의 주인들(독재자, 절대 군주, 기타 불법적인 권력의 소유자)은 문자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읽기가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문장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다. 글을 모르는 군중은 지배하기 쉽다. 읽는 기술은 한번 습득하면 버릴 수 없기에,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독서는 금지되어야 했다.”(348쪽)
책과 문자로 이루어진 도서관의 힘을 아는 독재자들, 현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통제와 억압, 집행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 히틀러나 마오쩌둥처럼 책을 가장 효율적으로 검열한 사람들이 문화연구자이거나 작가이거나 훌륭한 독자였다(390쪽)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그렇게 억압하고 검열하고 싶어 했듯이 “책은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선례를 물려주었다. 인간의 평등, 지도자 선택의 가능성, 아이들에게 노동보다 교육이 낫다는 직감,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이 모든 발명은 고대의 발견, 즉 불확실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을 통해 가능했다.” (507쪽). 그리고 당연히 “책이 없었다면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507쪽) 알렉산드리아는 ‘이질적인 전통과 언어가 중요성을 획득한 곳’이었고 ‘지식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공유된 곳’이었다. 바예호는 그곳에서 우리는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유럽의 위대한 꿈의 선례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글쓰기와 책, 그리고 도서관은 그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한 기술’이었다고(318쪽) 말한다.
<갈대 속의 영원>의 수많은 인상 깊은 이야기들 중 크리스토퍼 몰리(Christopher Morley)의 <파르나소스 이동서점>의 한 구절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책으로 가득한 수레를 끌고 다니던 미플린은 어느 농부의 집에 도착하여 한 여인에게 다가가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책을 파는 건 12온스 무게의 종이와 잉크와 풀을 파는 게 아니에요. 완전히 새로운 삶을 파는 거지요. 사랑과 우정과 유머와 밤을 항해하는 선박들. 책에는 모든 게 있어요. 정말 좋은 책엔 천상과 지상이 있지요. 세상에나! 내가 책이 아니라 빵이나 고기나 빗자루를 파는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몰려나와 내 물건을 사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난 영원한 구원을 가지고 여기 있는 겁니다. 나는 그대들의 여리고 슬픈 영혼을 구원하러 온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181쪽)
그리고 책은 수용소나 아우슈비츠처럼 인간이 살면서 겪는 거대한 역사적 재앙이나 비극에서도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준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증언한다. 자기 안에 책이라는 피난처를 만듦으로써 끔찍한 환경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할 수 있었다고. 책에서 구원을 경험했던 존 치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최상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문학은 저주받은 자들의 구원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도해줬으며 절망을 이겨냈으니,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308쪽)라고. 한편 보르헤스는 책이 “인간이 창안한 다양한 도구 중 가장 뛰어난 것”(155쪽)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나머지는 단지 ‘인간의 몸이 확장된 것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며,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 쟁기와 검은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사뭇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155쪽)이다.
<갈대 속의 영원>을 덮을 때쯤 기분 탓인지 어쩐지 감기가 물러간 느낌이었다. 책의 치유 능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 그 안에 깊이 빠졌던 탓에 아픔을 잊은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책을 사랑하는 이, 이레네 바예호가 열정이든 광기이든 집착이든 자기만의 소유물로든 제 나름으로 책을 사랑했던 또 다른 이들의 흔적을 찾아 기록한 이 아름다운 책은 여기 이 먼 나라의 책덕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이 책이 이제 또 다른 책덕후를 사로잡고자 멀고 영원한 여행을 떠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