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가장 최신작이면서도 트레버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구나 놀라게 하면서도, 또 말할 수 없이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읽은 작품. 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의 거장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장편, 단편 가리지 않고 거장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트레버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다. 작품의 제목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 에서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주인공은 온갖 고난 끝에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펠리시아도 자의반 타의반 집을 떠났고 여러 고난을 맞닥뜨린다. 펠리시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펠리시아 앞에 놓인 그 길들이 너무 험난하고 위험하며 안타까워 보여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트레버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 말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여행길에 오른 펠리시아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돕는 선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인가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줄거리는 독자의 예상과 달리 뜻밖으로 진행되면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트레버의 작품에서 공포의 감정을 느끼다니, 조금 생소하고 낯선데, 그 공포의 감정마저도 트레버는 어쩜 이렇게 서정적으로 그리는지 놀랍기 짝이 없다. 이 작품에서 펠리시아를 도우려는 손길은 여럿 등장한다.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선함이 과연 펠리시아에게도 선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 이 작품 속에 선함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선을 마주하기까지 너무나 지난한 악을 만나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이 거장은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삶에 존재하는 선은 지극히 드물지만, 반드시 존재하고 바로 그렇기에 삶을 살아갈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그 시절의 연인들>
단편집은 보통 한꺼번에 몰아 읽으면 나중에 어떤 작품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가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다.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이 그렇다. ‘그 시절의 연인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이 작품은 어느 면에서는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떠오른다. 불륜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불륜임에도 왠지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는 간절함까지 닮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앞으로도 또 어떤 의미일지 짐작할 수 있기에 작품을 다 읽은 뒤에도 그 사랑을 그들이 온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라게 된다. ‘산 피에트로의 안개 나무’도 꽤 인상 깊다. 그렇게 슬프거나 사람을 울리는 내용이 아님에도 작품 분위기가 눈시울을 젖게 만든다. 이 두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삶에서는 뜻하지 않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 두 작품에서는 주로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이 조금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어떤 사람’과의 인생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또한 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의지를 부릴 수도 있지만 그 또는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이 절대로 그런 행복을 허락하지 않기도 하고, 스스로 나약해서 포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어떤 한 사람’을 만나서 삶이 변하는 그 순간에는 진정으로 행복했고, 즐거웠으며 그로 인해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비록 그 뒤에는 ‘그 어떤 이’와 함께 하는 삶이 쭉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던 순간이 있었음으로 남은 삶을 또 그럭저럭 살아간다. 인생에서 뜻대로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잠시나마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두 작품은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루시 골트 이야기>
삶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이 작품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의 그릇된 판단,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 결과는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부모는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게다가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스스로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또한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한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그의 옛 연인>
원제는 <Cheating at Canasta>이다. 이 책에도 「속임수 커내스터」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속임수가 있는 카드놀이. 어쩌면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부부나 연인처럼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수치감을 잊고, 아니 잊어야만 하는 남자는 스스로 양심을 속인 채 남을 협박하여 살아가며(「아일랜드의 남자들」), 십대 소녀 ‘애슬링’은 또래 소년이 맞아 죽는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 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객기」), 엄마를 잃은 딸의 빈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워주어야지만 가족이 다시 화목할 것이라는 아빠의 믿음(「아이들」)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딸은 엄마를 잊을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느라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어느 노부인(「올리브힐에서」)은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남은 생이 평화롭지는 않다. 이렇듯 윌리엄 트레버의 <그의 옛 연인>에는 크든 작든 양심을 속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트레버의 시선은 그들을 단죄하는 재판관의 눈길이기보다는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삶과의 카드게임에서 이 정도 속임수는 쓰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임수조차 쉽게 잊어버리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나 트레버가 빚어낸 인물들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 죄책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고, 대부분 스스로 유폐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쓸쓸한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여름의 끝>
처음엔 그저 흔한 사랑이야기려니 했다. 그런데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고 문장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젖어들다 보면 어느 순간 먹먹해져온다. 그러다 ‘아, 아름답다!’ 하고 감탄하게 된다. 우리 모두에겐 인생의 ‘여름’이 있었고 그 여름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여름의 뜨거움과 여름이 사라진 뒤의 서늘함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인생의 여름이라면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춘 시절의 뜨거운 사랑, 아니 꼭 청춘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사랑을 떠올리리라. <여름의 끝> 또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피어난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 그런데 이 사랑은 끝이 너무 뻔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랑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듯이. 1950년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한 장례식에서 엘리는 옆 마을에서 온 청년 플로리언을 처음 만나고 곧 그를 사랑하게 된다. 첫사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다. 게다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자상한 남편은 끔찍한 실수로 전처와 아이를 죽게 하고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이다. 엘리는 자신과 결혼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하는 남편과 그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첫사랑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마을의 어떤 인물들은 뜻밖의 형태로 엘리의 사랑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끝이 보이는 사랑은 하나같이 슬프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별로 가는 와중에도 감정에 파묻히지 않고 담담히, 아련하게 걸어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추억은 인생의 한 부분으로 남을 것임을, 엘리도, 독자들도 알 것이다. 잊힐지언정 그 찬란한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트레버가 81세에 발표한 이 장편은 노년의 작가가 썼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눈부신 사랑의 기억을 아련하게 담아내고 있다.
<비 온 뒤>
언젠가는 잊히고 흩어져버릴 것들에 대한 따스하면서도 애잔한 시선이 일품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깊은 가을인 11월쯤 읽으면 한결 더 다가올 듯하다. 트레버가 67세에 펴낸 소설집으로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수많은 곤란한 상황과 그때 그들 행위의 옳고 그름을 작가 자신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독자에게 넘긴다. 거기에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시험받는 두 친구의 우정이 있으며(「우정」), 저마다 불륜을 저지르고 결합한 재혼부부의 두 아이들의 성장이 그려지기도 한다(「아이의 놀이」). 또 맹인 조율사의 사별한 아내를 질투하는 현재 아내의 고통이 그려지기도 하며(「조율사의 아내들」), 하나뿐인 아들이 혹시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아닐까 의심하는 어머니의 고통이(「길버트의 어머니」) 그려지기도 한다.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그저 누군가의 불행으로만 생각했던 사건을 직접 겪게 되는 부부의 고통도(「데이미언과 결혼하기」) 있고, 게이 아들의 생일을 맞은 부부의 이야기가(「티머시의 생일」) 담담히 그려지기도 한다. 비가 내리고 나면 서늘해지거나 공기가 맑아지거나 어쨌든 날씨는 비가 오기 전과는 조금 변한다. 이 책은 사람들의 그런 삶을 담담히,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만 국내 출간된 트레버 작품들 가운데 이 책은 번역 문장이 많이 이상해서 읽다 보면 여러 번 걸리적 거린다. 나는 웬만하면 번역 지적 잘 안하는데, 이 책은 그런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도 그렇게 많이 말하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정영목 번역이라고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트레버의 단편집을 읽겠다면 이 책보다는 현대문학 단편선과 <그의 옛 여인>을 추천한다.
아무튼
단편집은 <그 시절의 연인들>- <그의 옛 여인>- <비 온 뒤> 순으로 좋았고,
장편은 <펠리시아의 여정>- <루시골트 이야기>- <여름의 끝> 순으로 좋았다.
재미는 일단 단연코 <펠리시아의 여정>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증거사진- <여름의 끝>은 현재 동생집에 출타 중..... 찬조 출연, 로제 그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사실 평소 이렇게 꽂아두진 않는다. 트레버 현대문학 단편선은 현대문학 단편선 코너에, <펠리시아의 여정>은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코너에 꽂아두는데 촬영을 위해 모여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