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빌려줄래?>를 읽었을 땐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조금 실망했는데, 얼마 전 페넬로페 님의 글을 보고는 아, 이 책을 이렇게 재미나게 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페넬로페 님의 '내 책장의 책들'포스팅 속 질문을 가져와서 나도 답해봤다. 우리 책 환자들은 또 이렇게 남들이 어떤 책 읽는지 보기 좋아하잖아요?
1.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던 책
무척 많아서 꼽기 힘들지만, 최근 책 위주로 답해보자면,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읽고 있는데 이거 무지 재밌다. 너무 생생하게 잘 써가지고 책장이 휘리릭.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페미니즘, 인종차별, 가부장제, 데이트폭력..... 뭐 다 들어있는데, 이걸 또 이렇게 재미나게 범벅을 하네? 현재 절반쯤 읽었는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보면 미드 ‘엘 워드(The L Word)’ 흑인버전 같기도 하다. 밤에 이 책 붙잡으면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러면서 계속 읽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책 대부분이 흥미진진하지만, <초조한 마음> 이 책은 정말 와... 너무 흥미진진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음. 이 책 읽어본 분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실 듯. <레베카>도 빼놓을 수 없다. 애트우드 여사 책도 무지 흥미로운데, 특히 이 <그레이스> 대박이다. 영화로 만들어도 아주 흥미진진할 거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넷플릭스에 드라마로 나온 게 있더라. 원작의 감흥을 망칠까봐 차마 드라마는 못 보고 있음.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도 꽤 인기 작가가 된 줄리안 반스. 그런데 말이죠. 여러분, 반스의 진짜 흥미진진한 작품은 이 책입니다. 반스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재미로만 따지면 톱 중의 톱. 이거 정말 재미나요. 근데 품절이네?
어린 시절 나의 명작. 성인이 되어 읽어도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 책에 그렇게 빠졌던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뭔가 현실 탈출해서 신분 상승(응?)하고 싶은 욕구를 채웠던 거 같기도.
2. 펴볼 엄두가 안 난 책
<성경>. 서양 문학 더 잘 이해하려고 읽어보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걸 하고 있는 다락방 님 존경합니다.
책은 하나씩 모으고 있어요. 그렇지만 과연 언제 읽을지? 이걸 읽으려고 감옥에 갈 수도 없고. 자매품으로 <율리시스>도 있습니다.
책은 정말 좋다. 좋아, 그런데 이 책 ㅋㅋㅋㅋㅋㅋ 크...크기가. 이 책 갖고 계신 분들은 알리라. 앉아서 들고 읽거나, 누워서 들고(????) 읽는 거 절대 불가능한 크기. 여러분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아, 그래서 고이 모셔만 두고 있는 책
내가 갖고 있는 벽돌책 중 하나. 호기롭게 샀으나, 서론과 1장 읽고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자꾸 다른 책에 밀려서 다시 펴볼 엄두가 안 나는 책. 조만간 완독하고 싶다.
이것도 호기롭게 사놓고 중간에 다른 책 읽고 싶어질 거 같아서 도저히 펴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3. 친구가 준 책
예전에는, 그러니까 대학 때쯤엔 책 선물을 종종 받았다. 선배나 후배 같은 먼~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책 취향이 까다롭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그 정도로 가까운 친구들은)은 섣불리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자기 책장을 정리하다가 버릴 책 중에 내게 혹시 관심 있는 책 물어봐서 넘기는 일은 가끔 있다. 그런 것들 중에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마르케스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가 기억에 남는다. 친구는 내가 중남미 환상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언젠가 읽을 것임을 알고 넘겨줌.
이건 정말 내가 받은 책 선물 중 가장 인상 깊다. 제주도 여행 전에 후배가 선물한 책인데, 국내 에세이 별로 안 좋아하는 내가 이 책 처음 받았을 때는 정말 시큰둥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줄줄 울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김영갑 갤러리 직접 가보고는 더 폭풍 오열. 김영갑 갤러리는 그 후로도 두 번인가 더 갔다. 그리고 급기야 이 책까지 삼.
4. 읽으려고 무진 애썼던 책
최근에는 이 책이 생각난다. 좋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나, 나는 너무 재미가 없어가지고 진짜 꾸역꾸역 읽음.
아 정말 마가 꼈는지.... <마의 산> 1권만 지금 몇 번째인지.... 다음에 읽을 땐 1권은 벌써 몇 번 읽었으니까 2권부터 읽겠음. 그런데 벌써 1권 기억 희미...
폴스타프 님이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재미있는 책 소개해주고 있는데, 재미없는 책으로 꼽으면 아마 이 책이 1위가 아닐지. 지겨워서 책 찢고 싶은 심정이 든다. 하지만 완독한 나 정말 장해.
5. 어째서인지 두 권이 있는 책(본 책에는 세 권)
<전망 좋은 방>, <타인의 고통>, <하워드 진, 역사의 힘>- 이 책들은 우리 집에 2권씩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8년 전 현재 애인하고 본격 연애 시작할까말까 할 그즈음에 내가 이 책 세 권을 선물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다. 그날 같이 술을 마시다가 내가 이 책을 꺼내서 선물했더니 눈이 커지면서 깜짝 놀라던 그 사람. 나중에 이야기했는데, 이런 책 선물하는 사람이라서 나한테 완전 더 반했다더라고. 아 진짜 쑥스럽구만. 그날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거 같다. 암튼 그리하여 현재 동거인이 된 바람에 이 책은 집에 2권이 되었다는. 살림 합칠 때 겹치는 책들은 팔거나 미련 없이 버렸는데, 이 세 권은 우리의 역사라서 도저히 버리거나 팔 수 없었다. 미련 없이 버린 대표적인 책이 사르트르의 <구토>. “이 책 보기만 해도 토 나온다”하면서 알라딘에 팔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모든 책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좋아해서 빠짐없이 다 읽었다(소설만이 아니라 산문집도 포함). 여러 출판사 판으로 각각 갖고 있다. 그런데 몇 해 전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안 사. 그래서 다 구매. 그러다 보니 소세키 책은 우리 집에 2권, 심지어 3권인 책도 있다.
전자책으로 구매해놓고, 책꽂이나 책상에서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안 산) 책인 줄 알고 종이책으로 또 샀다. 종이책을 기쁘게 책꽂이에 꽂아놓고는, 어느 날 전자책 리더기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경악이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둘 다 아직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란...! 나만 그런 거 아니죠?
6. 내 생명을 구해준 책
6.25 전쟁 참전 시 적의 총알이 내 가슴을 뚫고 가려했으나 가슴팍에 있던 <성경> 때문에 내가 살았....... 이런 책을 뜻한다면 사실 그런 책은 없다. 더 넒은 의미로 나를 살린 책 뭐 이런 걸 생각해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가 있다(지금 애인 말고 그 전 사람). 진짜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 보니 사랑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되더라. 이 책의 원제는 <All About Love> 내가 읽은 책은 절판되었고, 새로운 판 <올 어바웃 러브>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것. 아무튼 그때 그 사람하고는 헤어졌지만, 잘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벨 훅스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가 있는 책.
지금 애인하고 초창기에 무지막지 싸웠다. 내 안의 괴물이 마구 튀어나오던 시기. 내가 말을 참 못되게 한다고 하더라. 사실 맞다. 지금 애인은 진짜 선한 사람이라 상처 주는 말을 잘 못한다. 그럼에도 싸우다 싸우다 거의 관계가 파탄 날 즈음, 나한테 뭐가 문제가 있는 걸까? 고민하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사 읽었다. 책을 읽은 후 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말투는 좀 깨달았다고나 할까. 애인은 이런 책을 찾아 읽는 나를 보고는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 감동했다고 한다.
아주 우울하던 시기가 있었다. <길 위의 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가장 자전적 작품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틀림없는 인물 ‘겐조’, 그의 인생은 정말 절망적이기 짝이 없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중 제일 어둡고 비참한 작품이 아닐까.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묘하게도 위로받았다. 그에게도 이런 삶이 있었는데도, 꿋꿋하게 살아가지 않았는가 싶었다. 요즘도 가끔 지나치게 삶이 버거워질 때면 이 책을 들춰본다. 이 책은 요즘 <한눈팔기>라는 책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다.
7. 친구에게 빌려준 책
빌려주고 못 받은 책은 거의 없다. 내 친구들은 내가 책에 대해 엄청 까탈스럽게 군다는 것을 알아서 빌려 가는 일도 드물지만 빌려도 재깍재깍 돌려준다. 그런데....! 내 애인의 친구였던 그 인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친구‘였던’에 있다. 애인도 관계를 끊을까 고민했던 인간이기에 꽤 오래 전에 절연했다. 근데 그 인간이 우리 집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 책을 빌려가서는 안 가져왔다. 애인도 기억 못하는 걸 난 기억한다. 한다고!!!! 우리 집에 이 책이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버전으로 있으니 용서한다. 근데 그 인간은 이 책 읽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8. 매일 밤 읽다가 잠드는 책
특별히 밤마다 들춰보는 책은 없고, 매일 밤 책을 읽다가 잠들기는 한다. 책을 들고 읽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서 책을 떨어뜨리는 일 비일비재. 요즘은 앞서 말한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읽다가 잔다. 단,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책 읽다가 잠들어서 떨어뜨린 적 없음.
9. 내가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책
수잔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을 읽고 그처럼 에세이를. 글을, 쓰고 싶다고 간절히 열망하던 시기가 있다. 지금도 뭐 그렇기는 하다.
카포티, 체호프, 제임스 설터 이들처럼 단편을 쓰고 싶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ㅏㅏㅏㅎ하하하하하하 ㅠㅠ
10. 내 인생을 바꾼 모든 책
강준만, <김대중 죽이기>
대학교 1학년 때 사귀던 애가 자기 숙제를 내게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책도 많이 읽고 리포트도 잘 쓰니까 제발 이 책 한 번만 읽고 대신 리포트 써주면 안 되겠느냐고. 지금 같으면 안 해 줄 텐데, 그땐 나도 뇌가 덜 자라서 빻았던 시기라 그런 부탁을 받고도 흔쾌히 해준 것 같다. 그렇게 처음 만난 강준만. 사실 우리 부모님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나이대 보수당 지지자들이고, 김대중과 더불어 전라도를 괜히 싫어하는 그런 집안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러려니 자란 나에게 이 책은 센세이션이었다. 그 후로 강준만 책을 많이 찾아 읽은 것 같다. 이와 비슷한 계보의 강준만 책으로 <노무현 죽이기>, <이문열과 김용옥>, <문학권력> 등이 있다. 참, 그때 그 애 말로 리포트는 A+ 받았단다.
<강준만 죽이기>에 이어서 이 책들도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다. 지금까지 내가 받아온 교육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해준 책. 이 책을 시작으로 기존의 관점과 좀 다르게 쓴 책들을 스스로 많이 찾아보게 된 것 같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 책은 내가 내 성향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꼽고 싶다.
이 책은 왜 절판이 되었을까. 요즘 다시 읽고 싶기는 하다. 요즘 대학교에서는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총여학생회. 대학 1, 2학년 때 총여학생회 회장이었던 우리 과 선배한테 반해가지고 총여학생회실을 제 안방처럼 삼아(실제로 술 먹고 잠도 많이 잠... -_-)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 선배가 권해줬던 이 책. 언제나 추억에 잠기게 해주는 책이면서, 내게 페미니즘 관점을 심어준 첫 번째 책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무튼 알라딘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 응원합니다. 제가 비록 강제로(?) 스케줄 따라 책 읽는 것을 싫어해서 그 모임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뜨겁게 응원하고 있어요.
내가 읽은 책은 2쇄 째 찍은 판본. 정희진 쌤 강연을 처음 들으러 가서 그 자리에서 샀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는 말. 어찌 잊을 수 있을까. 15주년 기념판 사고 싶으다.....
10대 때 이 책을 읽고 소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느꼈던 것 같다. 황순원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가슴이 시리게 아름답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11.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가장 야한 책

이건 제가 덧붙여봤습니다. 우리가 또 이런 거 좀 좋아하지 않습니까? 쿨럭; 저도 야한 책 꽤 좋아하는데, 아, 사드 <소돔 120일>만 한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은 내가 10대 시절, 서점에서 처음 판매되었는데(1992년 초판이 새터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바로 판금됨), 미성년자는 살 수 없었다. 에, 그런데 어떻게 읽었느냐면 훔쳐서..... 아 진짜 그때는 단짝 친구랑 서점에 자주 갔는데, 내 단짝 친구가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알아가지고 책을 종종 훔쳐 줬다. 아 미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날도 둘이서 함께 서점을 갔는데, 내가 이 책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이 녀석이 언제 캐치했는지 ㅋㅋㅋㅋㅋㅋㅋㅋ아 그날 서점을 나왔더니 이 녀석이 자, 하면서 내게 이 책을 건네준 게 아닌가. 그날 집에 와서 엄마 몰래 이 책을 방에서 열심히 읽었는데, 와.... 신세계..... 난 인간이 이렇게 드러운 동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너무너무 충격적이고 야해서 읽다가 속이 미식미식... 그래서 결국 토했다. -_- 훔쳐 준 친구의 성의를 생각해서(응??) 다 읽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내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해서 며칠 뒤에 갖다 버렸다. 휴.... 암튼 이 책 최고..... <소돔 120일>은 2000년에 고도출판사에서 다시 나왔고 가장 최근에는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된 듯하지만.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누가 훔쳐줘도 안 읽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