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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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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시를 왜 읽는가? 그리고, 시를 왜 쓰는가? 시는 어째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가? 깨닫게 하는가? 느끼게 하는가? 짧은 시에 담긴 삶에 대한 통찰, 인간에 대한 사유, 관계에 대한 의문과 정립. 시가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답답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화가 나거나, 마음에 안정이 필요할 때. 가슴 속이 메말라 갈 때. 나는 시를 필사하곤 한다. 좋은 시를 찾아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며 한 글자 한 글자 베껴 나가다 보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곤 한다. 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주거나, 깨달음을 주곤 한다. 누구나 가슴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시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 

혹시라도 마음에 담아 둔 시 하나 없거나, 시를 조금 더 깊이 느끼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택해 보는 것도 좋다. 어려울 것 같은 철학이 쉽게 다가는 것도 좋지만, 시 한편에 담긴 뜻밖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명의 시인과 21명의 철학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세상을 읽어가는 힘이 더해질 수도 있다. 난 그렇게 자신하고 싶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게 확실해지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이 시를 들여다보며, 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잡아 끌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힘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한나 아렌트와 김남주, 알튀세르와 강은교, 바타이유와 박정대, 벤야민과 유하, 레비나스와 원재훈, 벤야민과 유하, 레비나스와 원재훈, 니체와 황동규, 푸코와 김수영, 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하이데거와 김춘수, 들뢰즈와 최두석, 샤르트르와 최영미, 아도르노와 최명란, 데리다와 오규원, 아감벤과 한하운, 메를로 퐁티와 정현종, 리오타르와 이상, 바디우와 황지우, 호네트와 박찬일, 박동환과 김준태 

작가의 기준대로 고른 시들은, 철학적으로 잘 맞아떨어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가장 좋은 점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작가가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궁금함을 여기 저기 뿌려 놓는다. 철학자에 대해 더 공부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할까? 그건 내가 철학에 무지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을 어렵게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동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김남주의 '어떤 관료'라는 시로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관하여 설명한다.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아이히만은 아이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차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74p

 
   

아렌트가 생각하는 사유는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것. 김남주의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관료'는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과 닮아 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전체주의'라는 괴물로 변하는 사람,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설득적이다. 도처에 널려 있는 사람이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조차도 그럴 수 있다. 내 편의와 내 이익만 생각하고 하는 어떤 행위는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아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하는 일 마찬가지다. 이것은 모든 삶과 통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사유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벅 시내버스는 /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 엄동 혹한일수록 / 선연히 피는 성에꽃 / 어제 이 버스를 탔던 / 처녀 총각 아이 어른 /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 입김과 숨결이 /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 성에꽃 한 잎 지우고 / 이마를 대고 본다 /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대화>>  

다중체는 '많다'라는 뜻의 '멀티multi'라는 글자와 '주름fold'을 의미하는 '플리pli'라는 글자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글자가 바로 '플리'입니다. 새로 산 옷을 자주 입으면 이 옷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형태의 주름들이 생기지요. 이 주름들은 옷을 입은나 자신 혹은 외부로부터 받은 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름이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243, 244p

 
   

 버스의 '성에꽃'은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라는 시구절. 여기서 작가는 들뢰즈의 철학을 끌어냅니다. 다양한 것들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생기는 흔적이나 주름을 이야기한 들뢰즈. 들뢰즈가 펼친 인간의 사유 '나무'와 '리좀'. 뿌리와 뿌리줄기, 뻗나가고 분리되고 연결하는.  
사실, 이 이야기만 듣고 들뢰즈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을 어렴풋이 느끼며, 시와 연결해 개념을 이해할 수는 있다. 더 나아가서는 들뢰즈에 관심이 생기고, 알고 싶어진다. 

이 외에도 펼쳐지는 시와 철학. 시를 본 철학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냐, 이런 의도가 숨겨있는 것은 아니냐. 과격하고, 직설적이지는 않다. 부드럽게 시를 배려한 풀이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철학 이론은 '마르크스'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며, 철학적 사고를 모두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자만이고 욕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21개의 시와 21명의 철학자가 펼쳐주는 이야기에서 원하는 하나 만이라도 진지하고 깊게 다가가길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 읽다 보면 충돌이 일어나는 철학도 있고, 비슷한 이론으로 묶이는 철학도 있다. 그것에 대한 의문은 독자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철학 공부를 잠시 접어 두었던 사람에게는 또 다른 시작을,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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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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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고 충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하고 싶은 이야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보다, 한 줄로 혹은 그림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다. 뱅크시(Banksy)는 이런 능력에 탁월하다. 간단한 그림으로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래피티'(Graffiti_낙서)는 무엇보다 하위 형식의 예술이 아니다. 비록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한방중에 숨죽인 채로 작업을 해내야 한다 할지라도 이는 실존하는 가장 정직한 형식의 예술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것은 엘리트 의식으로 인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현혹하기 위함도 아니다. 게다가 이것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가장 좋은 벽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누구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벽(Wall)'이야말로 당신의 작품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제까지 벽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왔다.

도시를 경영하며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치 기준이 당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 '돈'에 우선해 있다면 물론 이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를 부정하는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그래피티는 단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위험하다. 정치인들, 광고쟁이들 그리고 그래피티 작가들 말이다.

진정으로 우리 이웃들의 외관을 더럽히고 손상시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대한 슬로건들을 버스와 건물들 사이에 되는 대로 마구 휘갈겨 쓰고는 마치 우리가 자기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회사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대고 그들의 메시지를 소리쳐 대지만 정작 우리의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고 그 싸움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나의 무기는 바로 벽이엇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더 좋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 문화파괴자(Vandals)가 된다.



그는 어릴 때 부모 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음을 경험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의 잘못이 되었다. 그떄부터 그는 입을 닫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려서 트럭 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는 곧,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했다. 스텐실 기법은 그의 그림에 속도를 붙여주었다.

 


이런 풍자는, 그의 비판을 더욱 겸허하게 받아드리도록 한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도 폭력으로 행해져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처럼 우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의 그림으로 단호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뱅크시의 그러한 능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림으로 말하는 화두 중 가장 많은 것이 전쟁이다. 필요없는 싸움, 그것이 바로 전쟁이 아닐까? 평화를 지킨다는 말은 거짓이다.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지키고자 싸운다. 그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 이외의 모든 것들, 아이, 동물, 자연 등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할 뿐이다. 직접적이고 충격적이게, 우리가 저지르는 일 우리가 동조하고 동의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고다. 수많은 경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책 'Wall and Piece'는 'War and peace'가 연상된다. 그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이 끝나지 않는 화두는 서로를 먹고 먹으며, 다른 형태로 진화해온다. 결국, 평화라는 것은 없다. 무기와 죽음, 이익, 고통만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실 깨닫고 있으면서도 외면할 뿐이다. 

 




물질주의, 소비주의, 신자유주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뱅크시는 언제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대변한다. 다수가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 소비주의, 신자유주의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허세와 과시, 그리고 욕망 그것이 고유한 문화들을 망가뜨리며 획일화 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경주는 공평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경쟁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운동화와 깨끗한 먹을 물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 116p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문명들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물질에 물들지 않는 이들의 문화를 파괴시켰다. 뱅크시의 간단한 그림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과 경쟁이 어떤 것들을 파괴시키고, 앗아갔는지 말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유명한 미술관에 자기의 그림을 걸어 놓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유명 화가의 그림에 그래피티적 요소를 첨가했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 자연사 박물관 등 그는 혼자만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큐레이터들을 바보로 만들었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예술이고 아닌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유명하고 저명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관람객들, 심지어 박물관 관련자들을 비웃었다. 그의 행동은 예술의 진정성을 묻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그는 아직도 그리고 있다. 눈치 챌 수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뿌리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의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지워지지 않고, 심지어 그림이 그려진 벽이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만큼 중요한 것들이 되었다. 

그를 만나며, 그래피티를 더 깊게 더 잘 알 수 있었다. 단순하게 벽에 낙서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도 철저하게 깨주었다. 그의 작품을 보며, 한가지 바람이 생겼다면 우리의 그래피티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의 그래피티를 보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좋아하게 된만큼 그의 행보가 지금처럼 굳건하고 확실하게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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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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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비판 마저도 힘 빠지는 일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우리 정부의 모습이다. 곁다리로 걸쳐 힘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우습기만 한 야당도 똑같다. MB가 정권을 잡고부터 매시간, 하루하루 사건 사고 없었던 날이 있었던가. 사건이 터지면, 지저분한 스캔들을 대서특필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덮어버리기 위해 애를 써왔던 게 바로 정부 아닌가.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까지 달려야할 시간들은 아직도 멀고 험한 듯 보인다. 이미 다 지나간 일 같지만, 지나간 일들은 없다. 표면적으로 기억에서 조금씩 물러났을 뿐.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에는 방금 일어난 일처럼 처절한 사건들이 많았다. 

쌍용차 사태를 비롯, 용산 참사, 두 대통령의 죽음, 미친소 촛불 시위 등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상상초월이었다. 그 사건 뒤의 발언, 대처들은 더 당황스럽고 울분을 토하게 했다. 인간을 인간처럼 대우하지 않았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정부를 보며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명의 사생활이나 인권은 존중은 무슨, 딱 알맞게 무시했다. 

그 고집과 아집 사이에서 국민들은 기겁을 했다. 논리적으로 다가가도 무식하게 처리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것이 과연 21세기의 모습인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포퓰리즘은 그렇다 치고 파시즘은 무엇인가? 자기가 대한민국의 히틀러라도 된 것처럼 더럽기 짝이 없는 웃음. 그 아래 파리처럼 들러붙어 살겠다고 손바닥을 비벼대는 하수인들. 이제 말만해도 입 아프다.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에 담긴 손호철 교수식 비판을 속을 다 후련하게 해준다. '민주당'을 향한 촌철살인이나, 대중을 향한 외침 또한 가슴에 콱콱 박힌다. 국민들이 움츠리고 있다고 하여, 그들은 당연히 내뜻이 국민들의 뜻이라고 말한다. 스물스물 내부에서 울리는 진동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손호철 교수는 경고한다. 사실 반복되는 이야기도 많고, 한 이야기를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복이 전혀 과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눈치나 살살보며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민주당의 투쟁은 어디 쓸 데도 없다. 뭐 말 뒤집기야 정치 하는 인간들이 최고겠지만, 자신들이 뿌려놓은 잘못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비판과 비난을 일삼는다고 국민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믿었지만, 믿음을 배신당했기에 등을 돌려 만들어낸 결과가 더 끔찍하다는 걸 국민들이 더 잘 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떠들지 않아도 가장 잘 아는 건 국민들이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정부고, 국회의원들이다. 해도해도 너무들 하는 것이다. 개딜정책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강 정비 한답시고 빈곤층과 복지비를 하루아침에 깎아드시고, 그 마누라님께서는 한식의 세계화를 한답시고 급식비를 왕창 삭감하시고.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흘러 오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들에게 표를 던져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응원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책을 읽으며, 지난간 혹시 때늦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우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가득이다. 그가 말하는 2년 여가 넘는 시간동안 일어난 이야기들 중, 제대로 해결된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게 더 가슴 아프다. 그게 더 뼈저리다. 우리는 좀 더 좋은 사회를 위해서 달렸고, 노력했지만 결국 더 나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제 웃기는 굿판은 그만 보고 싶다. 좀 더 신명나는 굿판, 모두가 즐거운 굿판이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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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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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갈팡질팡 깨닫지 못했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텍스트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다. 그의 텍스트는 한줄기를 따르며 흐르고 있었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반성과 성찰은 우리가 겪어낸 역사를 망각하고 외면하고, 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이진경이 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이진경이 하고 싶었던 말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꾸역꾸역 먹은 밥을 소화하려면 고통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것처럼, 나도 그 과정을 건너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보람되고 즐거웠다. 

   
 

 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 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5p

 
   

 그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우리 사회. 그들의 노동력으로 자본 생존의 리듬을 갖는 우리. 하지만, 착취의 초과는 또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으로 얽힌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묶여 있다. 하지만, 그 '민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배타성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뭉쳐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착취 받아도 좋은 타자'였다. 그 때문에 우리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착취당했다. 그 착취로 인해 우리는 고통 받았고, 그 역사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악순환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 '외부인'들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역사'는 '민족'과 '국민' 외에 타자를 참여시켜주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쌓아오는 이 시간에 그들의 존재란 없다.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자본을 축적하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간에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며 살고 있다. 

   
 

개체란 항상-이미 집합체인 것이다. 이 집합체를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시간이란 복수의 요소를 하나의 개체로서 공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이 리듬이 어떤 비평형적 항상성을 갖게 되었을 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복수의 요소들의 이러한 시간적 종합에 의해, 신체적 공조에 의해 탄생한다.  

요컨대 세상에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복수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나와 다른 리듬을 갖는 사람이나 생물들의 신체, 나와 다른 리듬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시간을 갖고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동시에 의식하지 못한 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신체들의 집한 역시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은 신체들의 상호적인 동조에 따르지만,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동조 또한 그에 못지않게하나의 시간을 구성한다. 가령 기계의 움직임은 노동자의 신체의 리듬과 아주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가 기계의 움직임에 따르는 한 양자는 함께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관통하며 하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산업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르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이후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중략).... 

무엇인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리듬을 장악하는 것이고, 자신의 시간 속에서 포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다른 시간, 다른 리듬의 신체를 포섭하여 하나의 시간 속에 통합하려는 힘과 권력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적대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가장 먼저 시간을 겨냥하여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시사적인 것이다. 계급투쟁은 주어진 주체의 이익을 다투는 투쟁이기 이전에, '주체성'을 구성하는 투쟁, 주체성을 생산하는 투쟁, 혹은 주체성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이 리듬을 장악한 자들의 잉여가치를 위한 것이었음은 이미 맑스가 명확히 밝혀놓은 바 있다.  - 51~53p

 
   

이러한 시간적인 장악은 노동을 넘어 역사 속 곳곳에서도 일어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대표적이며, 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과 리듬의 장악은 우리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문제고, 역사 속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진경은 우리의 역사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역사적인 증거와 그 증거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밝혀내는 이야기들을 잠시 지루해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재깍 깨닫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역사를 다시 되새김질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다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건너왔다. 그 '주체'라는 것도 완전하고 완벽한 '주체'인가 의문이 드는 나날도 있다. 누군가에게 휘둘려 역사가 써진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 '누군가'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침범하며 약자를 괄시하고 무시하며 이용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란 대개 주변 지역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통합하려는 고대적 제국이나, 신이 유일하기에 신이 지배하는 세계 또한 유일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혹은 실제로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지적인 영역들을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하고 지배하는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쓰인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욕망이 역사 안에 존재한다. 보편주의는 이러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 욕망은 실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다. 역사의 주체들이 역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가리고 은폐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보이지 않게 한다. 보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한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아는 대문자의 역사란 '국민'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확인하게 하고 그 자리에 걸맞는 것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하여 행동하게 하는 '치안(police)'의 장인 것이다.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고 대표할 수 없는 것을 대표하겠다는 이런 시도들을 통해 세계사적 '보편성'이나 국민적 '보편성'을 갖지 못한 소수자들의 역사는, 그리고 그들의 삶은 잊히고 지워진다. (...중략...) 

따라서 단수의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적인 역사들을 지우는 것이고, 단수의 보편적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자들의 삶을 망각의 어둠 속에 밀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역사를 쓸 수 있다. 

- 60~61p

 
   

역사의 무시무시함을 깨닫게 된다. 역사가 말하는 것들은 많은 소리가 묻히고, 많은 소수가 제외된 채 표면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우리는 그 표면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면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들여다 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표면만 중시하는 시간이 계속될 때, 우리의 역사는 뒤틀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다수'를 중시한 채 소수자들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묻히게 방치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권력과 자본은 많은 이의 입과 귀를 막고 손을 묶었다. 또한, 소수자들의 삶을 빼앗고, 그들의 역사마저 시간 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방치해 두고 있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두려운 게 현실이다. 권력과 자본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소수자들은 그들에게 '외부인'이며, '타자'이다.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본의 역사 속에서 유유히 살아가기도 한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이나,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지배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죽어갔고 그들의 역사는 강탈당했다. 기억은 점점 쇠해졌고, 다들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 속에 묻혔고,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지도 못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 그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본과 권력은 불편할 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에 신봉한 모든 나라와 국가, 개인들의 책임이다. 꼭 누구 때문이라고 한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도 한때는 약탈당했고, 국가라는 개념을 빼앗겼으며, 이름도 민족도 빼앗겼다. 우리는 소수자였고 빼앗은 사람의 노예처럼 역사를 가질 수 없었다. '존엄(dignity)'을 빼앗겼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간, 분노하며 싸웠고 누군가가 독립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우리는 소수자의 역사를 뼛속까지 느끼며 살아왔다. 그 응어리는 아직도 남아 '외교'라는 말로 포장되지도 않고, 중요한 사건이나 순간에 울분과 서러움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의미이다. 

   
 

진보란 기존에 획득한 것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탈의 벡터에 의해 정의되며, 기존의 것을 유지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하거나 변형시키는 벡터에 의해 정의된다. 빠를 때는 느림으로, 직선으로 나갈 때는 슬며시 비틀며 도는 각운동으로, 빙빙 도는 원운동에서는 접선을 그리며 곧게 빠져나가는 직선운동으로 탈주선을 그리는 클리나멘(clinamen)들, 그것이 미시적인 진보의 벡터를 정의한다. - 126p 

요컨대 진보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활동과 사유의 벡터가 언제나 외부를 향해 있음을 뜻한다. 지배적인 것의 외부, 익숙한 것의 외부, 모두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의 외부,상식 내지 양식이란 이름의 통념들 외부, 의당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의 외부, 주류적인 것의 외부, 정규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외부, 한 사회의 성원으로 쉽게 인정되는 영역의 외부, 자본주의와 가치법칙에서 벗어난 자본주의의 외부, 근대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근대의 외부. 그리하여 그 외부를 자신이 익숙하게 사는 지배적 삶의 방식 내부로, 지배적인 세계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 자체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 안에 자리 잡고 내부가 된다면, 내부가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그 외부를 보고 다시 그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변환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의 이념을 갖는 자들이 쉽사리 변혁으로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주어진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  131p

 
   

 진보는 '타자'를 향한 고민이다. 또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들,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 '외부'로 비껴진 사람들을 내부로 안기 위한 고민이다. 권력과 자본을 중심에 두지 않고, 그 외부에서 힘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이다. 그 고민 속에서 우리는 진일보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진보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만족할 만큼 되기란 쉽지 않다. 진보는 '거부'를 동반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가 1부에서 펼쳐놓는 많은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질 2부를 향한 설득이며, 설명이고, 암시였다. 2부는 꽤 구체적이며, 사실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증적으로 다가온다. 시간적인 세계와 비시간적인 세계, <독립신문>을 분석하여 본 '선험적인 시간', 영토의 개념이 탄생하며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역사'라는 개념이 시작된 시점, 그 개념이 포함하는 것들에 대해 집요하게 찾아내고 분석하고 있다. '민족'과 '국민'의 개념, '역사'의 개념이 점차 정립되면서 우리의 영역은 변화하고 사회적인 약속이나 생각도 그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한다. 근대 초기 침략에 맞선 고민과 진보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3부에서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의 식민지적 역사, 그 역사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형태나 모습. 가족주의를 변화시켰던 가족계획의 정치적인 전략, 외부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우리, 저무는 제국의 역사를 부여잡고 있는 우리의 현 모습, '경제대통령'이라는 사슬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권리를 찾기 위한 비폭력 투쟁, 그리고 한쪽에 펼쳐지는 소수자들의 개 같은 시간들. 

우리는 언제나 권력과 자본에 목소리를 내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씩 진보하여, 다른 형태로 바뀌어 왔다. 비폭력투쟁으로, 혹은 외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직접 만나는 시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지배의 역사를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는지도 잘 안다. 역사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당해왔던 것처럼 '소수자'를 몰아세우고, 우리를 고통의 역사로 몰았던 '제국'을 신봉한다. '경제력'을 이유 삼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경제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진보는 멈춰있다. 아니,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라는 말로 뻔뻔하게 자행되는 많은 것들 사이에 감춰진 것들,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더 진보한 '역사'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진경은 집요하게 분석했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역사'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또 '역사'에 이끌려 다니고 있다. 망각의 시간, 그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시간의 리듬 속에 소수자와 타자를 함께 포함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그 주춤하는 시간을 파고드는 세력들은 기운이 세고, 뻔뻔하다. 그 세력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눈 감으려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존재자'만 될 뿐이다.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의 참사가, 미국 어디에선가 '한국인 보호소'의 참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건너왔고, 많은 고통을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반성하고 제대로 된 '진보'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 반성 뒤에 '진보의 역사'를 염원하며 쓰여진 이 책이, 그래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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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보 지음, 박여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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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서이다. 글쓰기에 가닥을 잡았거나, 글쓰는 일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를 망설이고 있거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 책을 읽으며 도움을 구해도 좋다. 

이 책은 어떻게 글을 써야 잘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방법론적인 것에 치중해 있다. 노트를 사는 것부터, 글을 쓰는 시간, 장소, 도구 등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과 함께 글을 쓰면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배우자와 함께 글을 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처음부터 많이 쓰려고 하지 않아도 되며, 삼행시를 짓거나 몇 줄로 자기의 기분을 포기하는 것도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것이나, 생각의 고리를 이어가며 소재를 찾는 것, 새로운 시도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기만의 글쓰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글쓰기는 중요하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짤게, 길게, 간결하게, 장황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모이면 인생의 시간들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 또한, 글쓰기를 통해 일상의 나를 들여다 볼 수도 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 순간적인 감정, 나도 느끼지 못했던 나의 내면 세계까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언젠가는 나에게 알맞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며, 그 훈련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채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저자의 생각이 전해진다. 

차근차근 방법론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을 벗어던진 자만이 한 문장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낡은 노트를 마련하고, 펜을 들자. 무엇이라도 좋으니 써보자. 쓰기 전에 깊이 생각하느라 주저하지 말고, 쓰고 나서 수정하고 다듬자. 어떤 글 속에도 문득 튀어나온 생각들이 정제되지 않고 숨어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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