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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간단하고 충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하고 싶은 이야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보다, 한 줄로 혹은 그림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다. 뱅크시(Banksy)는 이런 능력에 탁월하다. 간단한 그림으로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래피티'(Graffiti_낙서)는 무엇보다 하위 형식의 예술이 아니다. 비록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한방중에 숨죽인 채로 작업을 해내야 한다 할지라도 이는 실존하는 가장 정직한 형식의 예술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것은 엘리트 의식으로 인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현혹하기 위함도 아니다. 게다가 이것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가장 좋은 벽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누구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벽(Wall)'이야말로 당신의 작품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제까지 벽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왔다.
도시를 경영하며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치 기준이 당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 '돈'에 우선해 있다면 물론 이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를 부정하는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그래피티는 단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위험하다. 정치인들, 광고쟁이들 그리고 그래피티 작가들 말이다.
진정으로 우리 이웃들의 외관을 더럽히고 손상시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대한 슬로건들을 버스와 건물들 사이에 되는 대로 마구 휘갈겨 쓰고는 마치 우리가 자기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회사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대고 그들의 메시지를 소리쳐 대지만 정작 우리의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고 그 싸움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나의 무기는 바로 벽이엇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더 좋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 문화파괴자(Vandals)가 된다.
그는 어릴 때 부모 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음을 경험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의 잘못이 되었다. 그떄부터 그는 입을 닫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려서 트럭 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는 곧,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했다. 스텐실 기법은 그의 그림에 속도를 붙여주었다.
이런 풍자는, 그의 비판을 더욱 겸허하게 받아드리도록 한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도 폭력으로 행해져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처럼 우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의 그림으로 단호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뱅크시의 그러한 능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림으로 말하는 화두 중 가장 많은 것이 전쟁이다. 필요없는 싸움, 그것이 바로 전쟁이 아닐까? 평화를 지킨다는 말은 거짓이다.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지키고자 싸운다. 그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 이외의 모든 것들, 아이, 동물, 자연 등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할 뿐이다. 직접적이고 충격적이게, 우리가 저지르는 일 우리가 동조하고 동의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고다. 수많은 경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책 'Wall and Piece'는 'War and peace'가 연상된다. 그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이 끝나지 않는 화두는 서로를 먹고 먹으며, 다른 형태로 진화해온다. 결국, 평화라는 것은 없다. 무기와 죽음, 이익, 고통만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실 깨닫고 있으면서도 외면할 뿐이다.
물질주의, 소비주의, 신자유주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뱅크시는 언제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대변한다. 다수가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 소비주의, 신자유주의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허세와 과시, 그리고 욕망 그것이 고유한 문화들을 망가뜨리며 획일화 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경주는 공평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경쟁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운동화와 깨끗한 먹을 물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 116p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문명들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물질에 물들지 않는 이들의 문화를 파괴시켰다. 뱅크시의 간단한 그림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과 경쟁이 어떤 것들을 파괴시키고, 앗아갔는지 말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유명한 미술관에 자기의 그림을 걸어 놓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유명 화가의 그림에 그래피티적 요소를 첨가했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 자연사 박물관 등 그는 혼자만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큐레이터들을 바보로 만들었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예술이고 아닌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유명하고 저명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관람객들, 심지어 박물관 관련자들을 비웃었다. 그의 행동은 예술의 진정성을 묻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그는 아직도 그리고 있다. 눈치 챌 수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뿌리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의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지워지지 않고, 심지어 그림이 그려진 벽이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만큼 중요한 것들이 되었다.
그를 만나며, 그래피티를 더 깊게 더 잘 알 수 있었다. 단순하게 벽에 낙서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도 철저하게 깨주었다. 그의 작품을 보며, 한가지 바람이 생겼다면 우리의 그래피티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의 그래피티를 보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좋아하게 된만큼 그의 행보가 지금처럼 굳건하고 확실하게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