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들이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사랑이 크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안된다고. 그래, 그런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서로 처지가 비슷할 때의 얘기지 아무리 사랑이 커도 처음부터 곁에 설 수 있는 나무가 있고 곁에 설 수 없는 나무가 있는 거야. 그걸 가지고 사람 탓하고 사랑 탓할 일도 아니고.
그러다 어느새 내 마음 안으로 스며드는 그 물기 속에 이제까지 몰랐던 참으로 오래된 사랑 하나 그 안으로 함께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어린 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사랑 하나 그 자리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나이가 가르쳐주는 것.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삶이란 가끔 시작과는 다른 물줄기로도 흐를 수 있는 것이어서 어린 시절 그 물줄기가 그 모습 그대로 바다에 가닿지 않는다.
먼저 자현이에 대한 얘기도 했지만, 은봉이야말로 마음 속에 그보다 더 깊은 사랑 하나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30년이란 세월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 세월의 바람 속에 이렇게 휘날리고 저렇게 휘날리다 어느 구석에 다시 모인 두 장의 가랑잎처럼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렇지만 예전에 서로 알던 사람들끼리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동안 아무리 변했다 해도 은봉씨에 대해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걸 지우기가 힘들다는 거지요. 서로 모르는 입장에서 만나면 장점일 수 있는 일이 잘 아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단점일 수도 있고요. 자존심까지 연결시키면 더 그렇지요.
첫사랑의 느낌은 나이를 먹지 않아도 그 첫사랑은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마흔두 살이듯 자현이도 이제 마흔두 살인 것이었다.
우리 마음 안의 첫사랑을 이길 장사는 없거든.
'나, 이제 옛날에 느들이 생각하던 자현이보다 씩씩해졌으니까.'그 말이 내겐 좋았다. 그리고 늦은밤, 바다에서 시내로 돌아올 때 다시 처음으로 편해진 자현이가 '정말이야. 언제 은봉이를 보면 내가 꼭 한 번 안아줘야겠어.'하고 말하던 것도 내게 다시 좋았다.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질투가 나지 않는 내 첫사랑이, 자동차를 타면 늘 아내가 앉던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자현이에게 언제까지고 늘 그렇게 씩씩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타이타닉'의 그 여자처럼...... 이제, 그 여자만큼이나 씩씩한 자현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