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딸의 배를 불러오게 만든 놈팽이를 찾기 위해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남자의 딸 제시카는 뱃속의 아이 아빠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는다. 제시카에게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할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이복 오빠 칼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이 영화의 시놉시스만 보면 참으로 역겹고 추저분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그것이 이 영화를 50년 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잊혀지도록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1965년, 당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교수였던 Joseph L. Anderson은 자신의 수업을 듣던 학생들과 영화를 한 편 찍는다. 학생들 대부분은 영화 제작 경험이 없었다. 최소한의 제작비로 애팔래치아 산골 마을에서 찍은 이 영화는 서정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아서 1968년 뉴욕 영화제(New York Film Festival, NYFF)에 초청받는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 밀려서 영화제 상영이 취소된다. 그 경쟁작은 John Cassavetes의 'Faces(1968)'였다. 카사베츠가 'Faces'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고 성공하는 동안, 영화는 싸구려 영화 배급업자의 손에 넘어간다. 원래 영화에는 없었던 노출 장면이 추가되었고, 영화의 제목 또한 바뀌었다. 'Miss Jessica Is Pregnant'는 그렇게 교외 자동차 극장과 비디오 시장을 전전하면서 잊혀졌다.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학생 Nicolas Winding Refn은 세월이 흘러 그 영화와 다시 만난다. 그는 영화를 제대로 살려내기로 결심했고, 복원된 영화는 2018년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무려 50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출처 indiewire.com).

  앤더슨 감독은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찍으려 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의 자연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Spring Night, Summer Night(1967)'은 그런 감독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는 퇴락한 탄광촌 마을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다. 초반부에 보이는 동네 선술집의 떠들썩한 음주 가무 장면은 실제 동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친밀함 속에 삶의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황과 폐쇄적인 지리적 여건이 뿜어내는 쇠락의 기운은 영화 전체를 휘감는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이복 남매는 탈출을 꿈꾼다. 그런 가운데 예기치 못한 제시카의 임신은 가난에 찌든 대가족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복 남매의 금지된 사랑. 영화는 금기시 되는 소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은 없다. 칼과 제시카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만 아니라면, 그들은 마치 평범한 연인처럼 보인다.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오하이오의 광활하고 고요한 자연 풍광은 '근친상간'이란 소재의 충격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관객은 칼과 제시카가 올무처럼 자신들을 옥죄는 가난하고 희망없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기를 응원하게 된다. 이미 벌어진 일 보다, 그들의 미래를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용납받지 못할 행위를 옹호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두 주인공들을 억누르는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는 작은 균열들이 존재한다. 아버지 버질은 사별한 첫째 아내에게서는 칼을, 재혼한 아내에게서는 제시카를 얻었다. 그러나 제시카의 엄마 매(Mae)는 젊은 시절부터 단정한 품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급기야 칼은 매에게 제시카의 진짜 아빠가 누구냐고 따져 묻는다.

  앤더슨의 이 영화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Hamartia'라고 부르는 주인공을 비극으로 이끄는 결함, 그것은 성격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칼과 제시카가 안고 있는 심각한 도덕적 하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재현되는 hamartia와 일치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Spring Night, Summer Night'의 배경은 궁정이 아닌, 퇴락한 탄광촌을 품고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외딴 마을이라는 점이다. 또한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명백한 모자(母子) 사이이지만, 영화 속 이복 남매에게는 해소되지 않은 출생의 비밀이 존재한다. 그 점은 이 영화가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변용을 절묘하게 이루어냈다는 인상을 준다.

  5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이 영화를 만나는 것은 관객에게도 커다란 행운이다. 'Spring Night, Summer Night'은 헐리우드의 상업적 틀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예술적 궤적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 영화사의 특이점을 만들어낸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들이었다. 열정과 패기로 뭉친 이들이 만들어낸 화면에는 흘러넘치는 서정성과 놀라운 흡인력이 존재한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부는 봄 밤과 여름 밤의 아련한 풍경, 운명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이복 남매의 절망적 사랑, 광대한 오하이오의 자연, 앤더슨 감독은 그렇게 새로운 '애팔래치아 비극'을 완성해냈다.   



*사진 출처: blueprintreview.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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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러닝화를 세탁하고 보니 옆부분이 밑창과 분리되어 있었다. 좀 이상했다. 이 러닝화는 겨우 3개월 신었을 뿐이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떨어지다니...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 러닝화는 그러니까 7년 전인가 8년 전 쯤에 브랜드가 철수하기 전, 막판 정리 세일할 때 사놓은 것이다. 좋은 러닝화라서 아낀다고 한 것이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그 러닝화를 올해 봄이 되서야 신었다. 그동안 신고 버린 러닝화가 여러 켤레인데도, 이건 어쨌든 신는 것이 아까웠다.

  러닝화는 마치 맞춤 신발처럼 그 어떤 물집도 잡히지 않았고, 발도 아프지도 않았다. 정말 좋은 거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신은지 3개월 만에 그 러닝화 옆구리가 다 터지고 갈라지고 있었다. 그랬다. 이 러닝화는 땅 위에서 보내야할 시간 동안 신발장에서 삭고 있었다. 순간접착제를 손가락에 묻혀가며 겨우 붙여놓기는 했다. 그러나 접착된 부분이 얼마나 붙어있을지도 모르고, 이미 러닝화는 내구연한을 지나버린 상태였다. 올해까지는 신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등산 관련 글에서 보게 되는 일화가 있다. 비싼 등산화를 사놓고 아끼다가 오랜만에 산에 신고 갔는데, 갑자기 밑창이 벌어지는 바람에 곤욕을 치루었다는 경험담. 신발의 접착제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나면 경화되어서 갑피와 창이 분리될 수 있다. 남이 겪은 곤란에 대한 글은 무심히 읽다가,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갑자기 뜨거운 물에 손을 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일개 공산품인 러닝화의 수명에 대해 대단한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신발은 살아 숨쉬는 생물이 아니므로 썩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이 러닝화는 신발장에서 비가역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아동학 강의를 떠올렸다. 할머니 교수의 1학기 강의를 요약하면 이랬다.

  - 유전 대 환경(Nature vs. Nurture)의 논의는 이제 무의미하다. 유전이 거의 모든 것(99.9999.....%)을 결정한다.
  - Time is everything! 영유아의 발달에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의 존재는 시간의 중요성을 입증한다. 그 시기를 놓치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동의 발달에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순간접착제가 들러붙은 손가락으로 러닝화 접착 부분을 꾹꾹 눌러주면서,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했다. 조각이 나서 떨어지고 있는 러닝화 로고가 눈에 띄어서 그것도 함께 붙여 주었다. 그렇게 러닝화 자가 수선을 끝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발장에는 그렇게 사놓은 러닝화가 두 켤레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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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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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Chorus)의 역할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때론 춤과 노래로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3세대 감독 시에진(谢晋)의 '무대 위의 두 자매(Two Stage Sisters, 1964)'에서 영화에 배경으로 깔리는 합창단의 노래는 바로 그 코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중요한 대목마다 상황을 요약하고 주인공의 정서를 잘 묘사해서 들려준다. 예를 들면 주인공인 두 의자매가 극적으로 대면하는 법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재판정에 많은 참새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까마귀가 섞여 있구나' 여기에서 까마귀는 의자매를 갈라놓으려는 불의하고 사악한 이들을 뜻한다.

  영화는 1930년대, 시골 마을을 찾은 월극(越剧) 극단의 공연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앳된 외모의 젊은 여자가 관객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여자를 뒤쫓는 이들은 밧줄을 들고 있다. 여자는 극단의 소품 상자에 몸을 숨긴다. '춘화'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매매혼으로 팔려온 시집에서 도망을 쳤다. 단장은 반대하지만, 딱한 처지의 그를 연기 사부 싱이 받아들인다. 춘화는 싱의 지도하에 그의 딸인 여홍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가난한 떠돌이 극단이지만, 춘화와 여홍은 의자매로 서로 힘이 되어주며 배우의 길을 걷는다. 사부가 세상을 뜬 후, 교활한 단장 아신은 두 자매를 상하이의 인기 극단에 팔아넘긴다. 대도시 상하이에서 춘화와 여홍은 인기 배우가 되지만, 단장 탕은 막대한 수익을 가로챌 뿐만 아니라 여홍에게 접근한다. 여홍은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점점 변해가고, 춘화는 그런 여홍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결국 무대 위의 두 자매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무대 위의 두 자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이다. 봉건제의 굴레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춘화는 여홍의 부친인 싱 사부의 도움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같이 무대에 서게 된 두 여성은 곧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 의자매는 당시 사회적인 약자로 천대받는 여배우들의 현실과 마주한다. 돈만 밝히는 극단 단장 아신은 지방 세도가에게 성 접대를 하라고 여홍을 겁박한다. 거부하는 여홍에게 아신은 '배우라면 그런 걸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무대 바깥의 세상이 이 여배우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적 착취의 위협과 더불어 출연료의 강탈도 춘화와 여홍을 힘들게 만든다. 아신을 비롯해 상해 극단의 탕 단장은 의자매를 노예처럼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쓴다. 그런 가운데 굳건했던 춘화의 여홍의 사이는 흔들리고,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다.

  돈의 힘에 굴복해 탕의 아내가 된 여홍. 춘화에게 있어 여홍의 자리는 곧 좌파 여기자 장보로 메꿔진다. 장보는 춘화를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게 한다. 이미 극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와 부패를 목도한 춘화는 사상적 교사라고 할 수 있는 장보와 새로운 유대를 쌓는다. 그것은 춘화를 그저 뛰어난 월극 배우에서 혁명에 기여하는 예술가로 거듭나게 만든다. 이 여성들의 연대적 공동체는 급기야 춘화가 탕의 극단에서 벗어나 독립 극단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경극(京剧)과는 달리 절강성에서 유래한 중국 남부 지방의 월극은 주요한 배역을 여성들이 맡는 여성 중심의 극이다. 춘화는 여배우를 착취하는 기존의 극단과 그 세계의 수구적 인물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아신과 탕은 청산해야할 봉건적 잔재,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처럼 묘사된다.

  영화의 이러한 설정들은 소련 예술 작품의 창작 원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 일맥상통한다. 장보는 춘화에게 탕과 같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결국 미국이라는 악이 존재한다며 일러준다. 시에진 감독은 중국 공산당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여기에 헐리우드 멜로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융합시킨다. 부도덕한 탕과 결혼한 여홍은 탕의 학대를 받으며 피폐해져 간다. 탕에게서 버림받은 극단의 여배우는 모멸감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강인한 사회주의 예술 전사로 변모하는 춘화,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이야기의 축에 그런 여성들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멜로 드라마의 결합, 거기에 '월극'으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극의 공연 형식까지 더해진 이 독특한 영화는 시에진 감독이 이뤄낸 성취이다.

  훗날, 이 영화의 멜로 드라마적 요소는 극렬한 논쟁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부르주아적 감성을 옹호했다며 문화 혁명 시기에 영화는 매도당했고, 시에진 감독은 반동으로 몰렸다(문혁 시기 시에진 감독의 개인적 경험과 성찰은 그의 대표작 부용진(芙蓉镇, 1986)에서 잘 드러난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 원로 여배우 또한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비극적 선택을 했다.


  분명히 '무대 위의 두 자매'는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그것은 주인공 춘화의 예술적 변모로도 입증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춘화는 당 소속 선전 극단의 일원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닌다. 여홍이 은거하고 있는 시골 마을을 찾은 춘화가 공연하는 극은 '백모녀(白毛女)'이다. 민간설화에서 유래한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설파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신가극 백모녀의 줄거리는 이렇다. 봉건제 치하에서 고통받다 자살한 여자의 원혼이 백발의 귀신이 되고, 결국 혁명군의 도움으로 악질 지주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문혁 시기에 이 영화가 겪은 소란은 어떤 면에서 '무대 위의 두 자매'가 지닌 느슨하고 유연한 예술적 양식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에진 감독은 맹목적으로 혁명의 이상을 영화 속에 재현해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매매혼에서 탈출한 춘화가 보여주는 봉건제의 악습,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배우가 마주하는 부조리한 현실, 억압적 가부장제에서 고통받는 여홍, 그러한 영화적 설정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중국 전통극에 대한 애정을 가진 감독이 녹여낸 영화 속 공연 장면들은 '무대 위의 두 자매'를 반짝거리게 만든다. 관객은 193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의 격동기를 월극 여배우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다.      



*사진 출처: sinethetamagazine.tumblr.com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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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새는 글을 늦게 쓰는 습관이 들어서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새벽 두세 시가 되곤 했다. 글을 쓰고나서 바로 잠이 오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은 뭉그적거리다가 잠이 쏟아지면 그제서야 잘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늦은 시각에 그냥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의 지난 글들을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글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아는 이의 이름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전공 수업들 가운데 영화사 수업을 가장 좋아했었다. 영화사 수업을 듣는 일은 마치 집을 짓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영화'라는 집을 이루는 각각의 구조들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 벽돌을 쌓고 미장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혼자의 힘으로만 그 작업을 한다면 버거웠겠지만, 다행히 나는 좋은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사 수업은 대부분 강사 선생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 선생들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좋은 식견을 지닌 이들이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에 그런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미국 영화사'였다.

  그 수업은 매 강의마다 과제로 봐야할 영화들이 적게는 서너 편, 많게는 예닐곱  편이었다. 강의를 맡은 영화평론가 선생은 그 영화들을 직접 비디오 테이프로 다 떠서 수강생들에게 건넸고, 우리는 그걸 일주일 동안 돌려가면서 봤다. 그렇게 본 영화들이 그리피스(D.W. Griffith)의 'The Birth of a Nation(1915)', 'Intolerance(1916)',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의 'Greed(1924)' 같은 작품들이었다. 아마 지금의 나에게 그런 영화들을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마른 골판지를 씹는 듯한 그런 영화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그 영화들이 10시간 짜리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다 보았을 것이다.

  수업은 그날 보기로 한 영화와 수강생의 발제, 선생의 해설로 이루어지는 꽤 빡빡한 강의였다. 일주일 동안 미국 영화사 과제 영화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지만, 우리들 가운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수업에 대한 선생의 열정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속성 스파르타 강훈을 받듯 미국 영화사에 대한 대략의 지도가 한 학기 동안 그렇게 마음 속에 그려졌다. 선생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없는 성품의 사람으로 학생들에게도 가르치는 이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나와는 비슷한 또래여서, 나는 선생을 나 보다 먼저 영화를 공부한 선배처럼 생각했다.

  우리끼리는 그를 '홍 선생'으로 불렀다. 홍 선생은 늘 커다란 가방에 수업에 쓸 자료와 비디오 테이프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맡은 수업에 최선을 다했다. 매 수업 시간에 발표할 발제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서 주는 때도 있었다. 기말 보고서는 미국 영화들 가운데 한 편을 택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이 보고서로 쓰려는 영화들에 대해 미리 듣고, 도움이 될 만한 참고 자료들까지 건넸다. 그렇게 한 학기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영화'라는 집의 작은 한 부분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수업이 끝난 것을 모두들 아쉬워 했다.

  가끔씩 우리는 미국 영화사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참 좋은 수업이었고, 선생의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학과 강의와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는지 선생의 강의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생은 잡지에 계속 글을 써내어서, 그렇게 글로나마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단아했다. 비문(非文)과 자의식 과잉, 현학적 문체로 범벅이 된 여느 평론과는 결이 달랐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편한 문체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쓰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글을 좋아했었다.

  '부고, 홍성남 영화평론가 별세'

  글을 클릭하자, 부고 기사 페이지로 연결되었다. 작년 10월의 기사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영화와 담을 쌓고 지냈으므로 선생의 소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있었다. 가끔씩 보게 되는 신작 영화평이나 영화 잡지 기사에서 선생의 이름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평론이 아닌 영화계의 다른 일을 하는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을 뜨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선생이 꽤 긴 시간 투병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기사를 읽고 황망한 마음이 들어 한참동안 거실을 서성였다. 선생의 미국 영화사 수업과 나의 젊은 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사랑했었고,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났다. 그가 이 세상에서 영화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바스락, 추억의 한 귀퉁이가 접히면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부디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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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검은 태양'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재즈를 좋아하지도 않고, 트럼펫도 불지 못하고, 노래도 할 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한 흑인이 아니지. 노예라구!"

  고철이나 훔쳐서 겨우 먹고 살아가는 애송이 양아치 메이(Mei)는 재즈광이다. 식료품 구입하기도 빠듯한 처지에 재즈 음반들을 열심히 사서 듣는다. 동료와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탈영한 미군 병사 길(Gill)은 메이가 살고 있는 곳에 몸을 숨긴다. 곧 철거를 앞둔 오래된 교회 꼭대기가 메이의 집이다. 흑인 재즈 연주자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메이는 흑인 병사 길을 환대한다. 그러나 다리에 총상을 입고 쫓기는 처지의 길은 오로지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메이가 틀어놓는 재즈를 견디질 못한다. 급기야 메이가 아끼는 개 몽크를 죽게 만들고, 격분한 메이는 길에게 검둥이 노예라고 모욕을 준다. 기관총을 든 탈영병과 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좀도둑,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쿠라하라 코레요시(蔵原惟繕) 감독의 1964년작 '검은 태양(Black Sun)'은 여러모로 이색적인 영화다. 우선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요소는 재즈 음악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메이는 음반 가게에서 Max Roach의 음반을 산다. 비밥(bebop)의 선구자라고 할 수 Max Roach, 그의 강렬한 비밥 재즈가 영화를 휘감는다. 주인공 메이는 재즈에 반쯤 미쳐있다.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개의 이름은 재즈 연주자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에서 따왔다. 이 재즈 신도의 흑인에 대한 환상은 미군 흑인 병사 길에게 그대로 투사되지만, 도주 중인 탈영병은 메이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인종차별주의적인 관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길의 총을 빼앗아 제압한 메이는 자신의 단골 재즈 클럽에 데려가기 위해 길의 얼굴에 흰색 분칠로 분장을 시킨다. 거리에는 수색 중인 미군들이 깔려있다. 정작 검문을 당한 것은 검은칠로 분장을 한 메이이다. 메이는 클럽 손님들에게 길을 자신의 노예라고 소개하고, 그들은 길을 서커스단의 원숭이처럼 억지로 춤을 추게 만든다. 그들이 흠모하는 재즈 연주자들은 사진과 음반 속에서 존재할 뿐이며, 현실의 흑인은 그저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된다. 영화의 이런 장면은 일견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배제된, 인종에 대한 노골적 편견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클럽의 젊은 일본인들의 길에 대한 태도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모습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도시의 최하층 부랑자 메이와 흑인 병사 길을 하나로 묶는다. 영화 초반부에 강에서 건져지는 병사의 시신이 흑인인지 백인인지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쿠라하라 감독은 영화 중간에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시위 장면을 몽타주로 제시한다. 조국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흑인을 대표하는 존재인 길은 낯선 이국 땅인 일본에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흰색 분칠로 자신의 피부색을 감추어야만 하고, 총상 입은 다리는 썩어들어가고 있다. 그는 연신 '엄마(mama)'를 중얼거리며, 메이에게 자신을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머물던 교회가 철거되면서 있을 곳도 없어진 메이와 죽음의 기운을 느끼는 길, 이 두 사람의 여정은 마치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를 떠올리게 만든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쌓인 적대감은 해소되고 둘은 연대감을 느낀다. 결국 바다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메이와 길, 그곳의 풍경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가 넘실거리는 공장 부지와 접한 해안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공장의 옥상에 도달한다. 옥상의 대형 광고 풍선에 몸을 묶은 길은 메이에게 밧줄을 끊어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검은 태양'은 인종간의 갈등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격을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담아내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마무라 쇼헤이와 스즈키 세이준이 상업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코레요시 쿠라하라는 자신의 독창성을 좀 더 우위에 둔다. 촬영 기법에서도 이 감독은 핸드 헬드를 여유있게 구사하며, 메이가 거주하는 비좁은 교회 공간도 효율적으로 포착한다. 그가 당시 닛카츠(日活) 영화사에서 태양족(太陽族) 영화를 찍으면서 체득한 젊은 세대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소비지향적이며 서구 문물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보여주는 전후 세대의 모습과 함께 미군정 이후 일본 사회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미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

  영어 자막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경우, 당연히 길의 대사 부분은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길의 대사가 단순하고 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도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이건 관객의 영어 실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영어 원어민의 리뷰를 읽어보면 길의 대사를 알아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길 역을 연기한 배우 치코 롤랜드(Chico Roland, 그의 본명은 Chico Lourant이다. 아마도 일본어의 영어 발음 때문에 로랑을 롤랜드로 바꾼 듯하다)가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는 배우로서의 발성이 전혀 되지 않으며, 부상병 역을 연기한다고 거의 뭉개지고 웅얼거리는 말투로 일관한다. 롤랜드는 당시 여러 편의 일본 영화에서 나름 조역을 담당했는데, 그 이력이 참으로 흥미롭다. 주한 미군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생계를 위해 트럼펫을 배워 재즈 연주자가 되었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그를 재즈 클럽에서 보고는 이 영화에 캐스팅했다. 감독의 요구대로 영화 속에서 롤랜드는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부른다. 어떤 면에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대사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몰입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관객은 길의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메이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내적인 유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낙오자가 비극적 최후를 향해 질주하는 영화 '검은 태양'에는 그런 뒷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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