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빠죄아.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불륜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또 있다. 홍상수의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 나오는 영희(김민희 분)와 상원(문성근 분)이 그들이다. 배우인 영희는 유부남 영화 감독 상원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2부로 나누어져 있는 이 영화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 2부는 한국의 강릉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는 영희는 낯선 외국의 도시에서 선배 지영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 지인들과 만남을 갖는다. 관객들은 영희가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이 배우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의 감독 홍상수와 연인 사이이기도 한 김민희는 영화 속 영희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 받을 자격 없어요!"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 갑자기 영희는 '사랑 받을 자격'을 운운하며 좌중을 향해 일갈한다. 어째 영희가 하는 대사가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신들이 뭔데 우리 사랑에 대해 떠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희의 지인 준희(송선미 분)와 천우(권해효 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영희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이들을 천박한 관심을 지녔다며 폄하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보고서인 동시에 대중들을 향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 시선의 끝에서 당사자인 감독과 여배우를 마주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자아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왔다. 이전까지 관객들은 그 캐릭터들이 감독 본인의 부분적 특성이거나 주변 지인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2010)'에서 역시 감독으로 나왔던 문성근이 여기서도 감독으로 나온다. 우리는 문성근이 연기한 상원이 홍상수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대사들에 귀를 기울인다. 상원은 영희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폐해졌는지를 토로한다. 이 자의식 과잉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상원'이란 캐릭터는 영희에게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며, 체호프의 책 구절로 절절히 사랑 고백을 늘어놓는다. 아, 난 그 부분에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홍상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한결같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

  '해변의 여인(2006)'에서 주인공 중래가 해안가 사구의 나무에게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그 장면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도 함부르크에서 산책하다 말고 다리 앞에 멈춰서서 갑자기 땅에 대고 절한다. 두 인물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나무 장면은 지극히 속물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캐릭터인 영화 감독 중래가 보여주는 어떤 순수의 한 조각, 생에 대한 열망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모습과는 다르게 본질적인 것, 숭고한 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사랑과 예술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고 너무 먼 곳에 있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상원은 사랑을 얻었고, 그 사랑을 심하게 앓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상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그의 고백을 듣고 있는 영희의 입장은 어떨까? 영희는 상원이 늘 주변에 예쁜 여자들을 둔다며 힐난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퍼붓는다. 정말 둘이 저렇게 살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행인에 의해 꿈에서 깬다. '여러분, 이거 다 꿈인 거에요.'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관객의 어깨를 툭 친다. 그의 이 영화는 사실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그 설정에 균열을 가한다. 1부에서 등장한 '검은 옷의 남자'가 그러하다.

  공원에서 함께 산책하던 지영과 영희는 시간을 물어보는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남자는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겨주고, 두 사람은 그와 또 한 번 마주칠 것 같자 피해 버린다. 그런데 그 남자는 해변가의 영희에게 나타나 영희를 들쳐 메고 가고, 그 장면과 함께 1부가 끝난다. 2부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영희가 머무는 콘도에 나타난다. 해안가로 난 베란다의 창을 열심히 닦고 있는 그를 영희와 준희, 천우 모두 안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홍상수가 설치해놓은 이 '낯설게 하기' 같은 연극적 장치는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핍진성에 의문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영희(영화 속에서도 직업은 배우이다)이며 현실의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사랑에 빠진 이 여배우는 슬프고 외로우며,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배우의 연인인 감독은 영화 내내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외쳐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 속 영희는 표정과 연기, 심지어 직접 부르는 연가를 통해서 자신의 넘쳐나는 사랑을 입증해 보인다. 영희는 겉으로는 상원과 헤어졌다. 그럼에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니, '연결'이라는 표현 보다는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 영희는 상원이 나오는 꿈을 꾸는가? 꿈 속에서 영희는 상원에게 표독스럽게 굴며, 상처받고 정체된 자신의 삶을 날것 그대로 내보인다. 현실의 영희는 그것을 상원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꿈의 힘을 빌어서만 상원과 대등한 또는 보다 나은 우월적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릉에 도착한 영희는 영화관에서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도망친 여자(2020)'에서도 주인공 감희의 영화관 장면이 나온다. 감희는 계속해서 들이치는 파도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 사랑의 환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여배우는 이제 조금은 관조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 감희의 표정에 심한 고뇌나 불안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친 여자'의 감희에게서는 활기가 보이지 않으며, 지루함이 읽혀진다. 2019년, 감독의 이혼 소송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여전히 불확실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개인사의 영화적 변주곡인 셈이다. 이 영화의 뻔뻔스러움은 많은 관객들에게 냉소를 짓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김민희의 연기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만든다. 관객들은 이 배우가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인 은곰상을 품에 안은 것을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 On the Beach at Night Alone  (By Walt Whitman)


On the beach at night alone,
As the old mother sways her to and fro singing her husky song,
As I watch the bright stars shining, I think a thought of the clef of the universes and of the future.

A vast similitude interlocks all,
All spheres, grown, ungrown, small, large, suns, moons, planets,
All distances of place however wide,
All distances of time, all inanimate forms,
All souls, all living bodies though they be ever so different, or in different worlds,
All gaseous, watery, vegetable, mineral processes, the fishes, the brutes,
All nations, colors, barbarisms, civilizations, languages,
All identities that have existed or may exist on this globe, or any globe,
All lives and deaths, all of the past, present, future,
This vast similitude spans them, and always has spann’d,
And shall forever span them and compactly hold and enclose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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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은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 비디오의 분위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학교를 점거한 아이는 치어리더의 응원술을 마구 흔든다). 영화의 제목은 'Over the Edge', 시나리오를 본 이들은 제작을 꺼렸다. 하지만 제작자 조지 리토(George Litto)는 과감하게 제작에 착수했고, 젊은 조너선 캐플란을 감독으로 내세웠다. 로저 코먼 아래서 그저 그런 돈 되는 영화나 찍으면서 초창기 영화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던 캐플란은 이 영화로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비록 영화는 영화관에 얼마 걸리지도 못하고 내려졌으나, 그 진가를 알아본 관객들에 의해 점차 독보적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콜로라도 주, 어느 교외에 위치한 계획 도시 New Granada. 황량한 허허벌판에 급조된 듯한 이 마을에 아이들의 오락거리라고는 'Rec(레크리에이션 센터)'라고 부르는 작은 건물 밖에 없다. 이제 14살이 된 중학생들은 온갖 비행의 집합체들처럼 보인다. 비비총으로 경찰차를 쏘아맞추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신다. 해시시를 공급하는 아이도 있다. 부모나 선생들 말 안듣는 것은 기본, 경찰도 우습게 생각한다. 마을의 경찰 도버만(Doberman)은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그가 해시시 공급책 아이 팁을 강압적으로 체포한 것을 계기로 아이들의 반감은 점점 커져 간다. 그 중심에는 칼과 리치가 있다. 리치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추격하는 도버만, 리치는 장전하지 않은 총을 꺼내어 들고 도버만은 리치를 쏜다. 칼은 리치의 죽음에 분노하고, 아이들을 규합해 항의의 뜻을 보여주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경찰이 모여 학생 폭력 예방 대책을 의논하는 동안, 아이들은 대대적인 파괴극을 감행하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청소년 폭력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청소년의 기물 파괴, 그에 수반된 폭력 범죄에 대한 통계를 인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시나리오를 쓴 찰스 S. 하스와 팀 헌터는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 포스터 시티(Foster City)에서 벌어진 청소년 범죄 사건을 취재했다. 포스터 시티는 수로를 운행하는 작은 배로만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고립된 마을이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취재 과정에서 그곳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들의 지루함과 분노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Over the Edge'에 반영되었다. 현실과 영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의 결말이 좀 더 과격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칼의 아버지는 부동산 업자로, 칼(마이클 크레이머 분)은 중산층 계층에 속해있다. 멋진 빌라촌에 사는 칼과 달리 친구 리치(맷 딜런 분)는 그보다는 못한 허름한 아파트에 산다. 그러나 칼과 리치를 비롯해 그들의 친구들은 가난하고 폭력에 노출된 하층민 계층의 아이들이 아니다. 14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은 자신들을 강제하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거부감을 보인다. 영화는 마치 청소년 다큐멘터리처럼 아이들의 일상을 뒤쫓는다. 실제로 출연한 그 나이 또래 아역 배우들은 별다른 연기 경험이 없이 캐스팅 되었고, 학교와는 거리를 둔 아이들이었다. 리치 역의 맷 딜런도 마찬가지였다. 백인, 중산 계층의 아이들이 영화 속에서 벌이는 폭동은 꽤나 충격적이다.

  물론 주인공 칼에게는 그런 일을 벌이는 동기가 있다. 절친 리치를 죽게 만든 것은 도버만으로 대표되는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공권력, 자신들에게 아무런 꿈과 희망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사회와 어른들이다. 임시 가건물 같은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 전부인 아이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탐험해 나간다. 어른들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는 술과 대마초, 자유분방한 이성 관계, 반항과 폭력이 자리한다. '저거 실화냐?'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은 '괴물'처럼 비춰진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학교에서 열린 임시 학부모 회의, 교장과 경찰의 담화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1970년대 록밴드 Cheap Trick의 'Surrender'를 틈날 때마다 듣는 칼, 가사는 늘 복종을 요구하는 부모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리치의 죽음으로 발화한 아이들의 응축된 분노와 절망감은 절제되지 않은 폭력, 파괴, 방화로 나타난다. 캐플란은 싸구려 착취 영화(exploitation film)를 찍으면서 쌓은 내공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터뜨린다. 아이들에 의해 학교에 감금된 어른들은 속수무책이다. 마치 린제이 앤더슨의 'If....(1968)'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옥도는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초반부에 수업 시간의 슬라이드로 제시된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무시무시한 그림과 절묘하게 겹친다. 15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 보스는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상상 속의 기괴한 풍경을 그려냈다.

  'Over the Edge'는 청소년의 폭력 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상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지만, 이 영화를 둘러싼 그런 조치들은 당시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드러낸다. 기성 세대들은 어린 세대들을 자유와 방종, 혼란의 집합체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보수적인 레이건 시대의 개막과 맞물려서 기존의 사회 체제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변혁의 출구는 막혔고, 막힌 물줄기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가 되어서야 새로운 세대의 문화로 터져나왔다. 'Over the Edge' 같은 영화들은 그 세대들의 자양분과도 같았다. 그렇게 영화는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시간의 압력을 견뎌냈다.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한 이 영화는 캐플란 영화 경력의 전환점이 된다. 그의 1988년작 '피고인(The Accused)'은 'Over the Edge'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영화의 마지막, 경찰차에 호송되는 아이들의 장면에 흐르는 노래는 Valerie Carter의 포크 록 'Ooh Child'이다. 영화 내내 휘몰아쳤던 록 밴드 Cheap Trick의 음악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이 노래의 가사는 아이들이 밝게 빛나는 길을 걸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제작자 조지 리토는 The Who의 거친 록 음악 'Baba O'Riley'를 쓰자는 캐플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이 생각한 노래를 밀었다. 그는 어둡기 짝이 없는 영화의 결말에 빛을 드리우고 싶어했다(출처 vice.com 2009년 9월 기사). 이 영화의 마지막에 'Baba O'Riley'가 흐르는 버전을 보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리토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다. 기성 세대이자 제작자로서 리토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가 대책없는 허무와 폭력으로 난파되기 보다는, 그래도 희망의 한 조각을 품고 살아남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리토의 바램대로 이 영화는 미국 청소년 영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었다. over the edge, 벼랑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의 변주곡처럼 현재에도 반복된다.    



*사진 출처: vi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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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Bye Bye Blues'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심해라, 넌 애들 키우는 엄마야!"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그렇게 소리친다. 그러나 여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하러 나간다. 캐나다의 여성 감독 앤 휠러(Anne Wheeler)의 'Bye Bye Blues(1989)'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캐나다 가정주부의 고군분투 취업 생존기를 보여준다. 전쟁은 전장에 있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후방에 남아있는 이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국가의 경제 기능이 전쟁에 맞추어져 있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여성들에게 가장 큰 문제였다. 생존을 위해 여성들은 비자발적인 취업 전선에 내몰렸다. 'Bye Bye Blues'의 주인공 데이지도 그런 여성들 가운데 하나였다. 군의관 남편을 따라 식민지 싱가포르에서 귀부인처럼 살았던 데이지는 1941년, 일본의 싱가포르 침공으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여자는 캐나다 알버타 시골 마을 시댁으로 귀환한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아이들 둘을 데리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던 데이지는 생활 전선에 나선다. 동네 재즈 악단에서 피아노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것. 시부모의 간섭을 피해 독립한 데이지는 곧 일하는 여성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휠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부모에게서 들은 젊은 시절 이야기였다. 실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감독의 아버지, 그리고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에 살이 붙여졌다. 영화는 매우 소박하고 평범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현실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다. 비록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지만, 데이지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식민지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남편의 사랑과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넘쳐났다. 그곳 사교 파티에서 구색 맞추기로 연주하고 노래했던 마나님은 이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악단 생활을 한다. 영화는 데이지가 어떻게 치열한 취업 전선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보여준다. 데이지는 담배를 피우고, 남자들인 밴드 동료들과 부대끼며 유대감을 쌓고, 출연료를 갈취하는 밴드 마스터와 대결하기도 한다. 트롬본 연주자 맥스는 그런 데이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 속에서 로맨스도 피어난다.

  그러나 'Bye Bye Blues'는 로맨스 보다는 일하는 여성이 겪는 내적인 갈등과 현실적 어려움에 더 촛점을 둔다. 나의 눈길을 끈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데이지가 담배를 배우는 장면이다. 맥스는 데이지에게 담배를 권하고, 그렇게 데이지는 담배를 피우게 된다. 재즈 밴드는 전형적인 남자들의 세계이며, 거기에 진입하고 적응하기 위해 데이지는 새로운 규범을 배울 수 밖에 없다. 친밀함과 소통으로서의 흡연은 그 세계의 일반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또 다른 장면은 밴드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길에 잠깐 차를 세우는 장면이다. 차에는 데이지가 혼자 남아있고, 4명의 밴드 단원들은 길 건너 편에서 볼일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연주'라는 하나의 목표로 움직이는 동료들이지만,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은 명백히 존재한다. 여성 연주자 데이지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으므로, 밴드 단원들은 데이지를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출연료 문제로 밴드 마스터와 싸울 때, 데이지가 뺨을 맞고 욕설을 듣자 맥스는 데이지의 편에 서서 맞선다. 또한 동료들은 취객들의 지분거림을 막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데이지가 취업 전선에서 애쓰는 동안, 데이지의 아이들은 친한 사이의 시누이 프랜시스가 돌본다. 그러나 이 자유분방한 시누이는 공군 기지에 주둔한 호주 군인과 사귀면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한다. 어머니로서 데이지는 그런 시누이의 행태에 화를 내지만, 자신이 전적으로 해낼 수 없는 양육에서 타협은 필수적이다. 일하는 여성 데이지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부채의식, 부재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맥스와의 사랑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데이지에게 열어준 자아실현의 장으로서의 연주자라는 직업, 그리고 새로운 사랑의 발견은 그 전쟁이 끝남으로써 성급히 닫힌다. 투어 도중 잠시 집에 들렀던 데이지는 귀환한 남편을 맞이한다. 시부모와 시누이를 비롯해 아이들은 모두 기쁨 속에 있지만 오직 한 사람, 데이지는 그렇지 못하다. 털털거리는 낡은 차에 탄 맥스와 동료들은 데이지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난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데이지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착잡함이 묻어난다. 그것은 단지 데이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여성들에게 활짝 열렸던 사회 진출의 문은 닫혔고,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갔다. 일하는 산업 역군으로 칭송했던 국가는 이제 그들이 있어야할 원래 자리가 '집'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Bye Bye Blues'는 2차 대전 시기 캐나다 여성의 삶을 조망하면서, 일하는 여성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어려움들을 다룬다. 그것은 비단 전쟁 시기에만 국한되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사적인 영역에서 '가사 노동'을 수행하던 주부가 공적 영역인 사회에서 일할 때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영화 속 주인공 데이지의 모습과 비슷하게 겹친다. 물론 오늘날의 여성은 데이지처럼 가정이냐, 일이냐와 같은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입장에 놓여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데이지가 보여주는 현실 드라마 속에는 아내, 엄마,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여성의 직업과 자아실현이 갖는 의미, 그러한 보편적 주제에 대한 세밀한 성찰이 들어있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낡고 고리타분한 지난 시대의 이야기라는 편견에서 구해낸다.

  잘 알려진 재즈 스탠다드 'Bye Bye Blues'를 비롯해 영화를 위해 작곡된 여러 재즈곡들도 흥겹다. 데이지 역을 맡은 레베카 젠킨스의 매력적인 보컬도 거기에 한몫을 한다. 영화는 자국에서 개봉된 이후 오랫동안 관객들을 만날 수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제작사가 파산하면서 저작권이 여러 번에 걸쳐 쪼개져 분산되는 바람에 저작권자를 특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영화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휠러 감독에게 가장 기쁜 일이었겠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를 통해 캐나다 영화의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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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khnazarov) 감독이 '우리는 재즈 피플(We Are from Jazz, 1983)'를 찍었을 때의 나이가 서른 둘이었다. 1920년대 소련의 재즈 악단 이야기를 다룬 그 영화는 재즈 음악과 코미디를 결합시켰다. 영화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샤크나자로프 감독이 영화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그라의 겨울 저녁(Зимний вечер в Гаграх, Winter Evening in Gagra, 1985)'은 바로 그 다음 작품이었다. 이 영화도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일종의 뮤지컬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재즈 피플'의 후속편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베글로프는 과거 탭 댄스로 명성을 날렸던 스타였으나 이제는 늙고 잊혀진 안무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어느 날, 시골 출신의 아르카디가 찾아와 탭 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베글로프는 아르카디가 다리를 다친 적이 있고 리듬감도 없다면서 가르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아르카디는 한사코 배우겠다고 우기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조금씩 친해진다. 아내와 오래전 이혼하고, 딸과도 가끔씩 연락이나 하면서 지내는 외로운 신세의 베글로프. 그런 그에게 괴로운 일상이 이어진다. 일하던 공연단에서는 인기 여가수의 심기를 건드려 해고 위기에 처하고, 자신의 과거 공연 모습이 나온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를 이미 세상을 뜬 예술가라고 방송한다. 과연 베글로프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이전작 '우리는 재즈 피플'에서 안무를 담당했던 탭 댄서 Alexei Bystrov가 영화 촬영 도중 세상을 떴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그 일이 마음에 남았고, 고인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글로프'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해서 영화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했던 탭 댄스가 아니라, 철저히 상업적인 공연에서 뒷방 늙은이처럼 안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화려한 무대 세트와 전자 기기의 음향이 깔리는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안무를 선보인다. 베글로프가 젊은 날에 공연했던 그런 무대와는 전혀 딴판이다. 개혁 개방 시대의 소련, '가그라의 겨울 저녁'은 전환기에 대중 예술 종사자들이 어떻게 생존해나가는지를 펼쳐보인다. 발레를 전공한 무용수들은 고전 발레가 아닌, 새롭고 낯선 형태의 공연을 하고 있다. 제작자는 일본에서 들여온 신디사이저에 경탄하고, 악단 연주자들은 기계에 밀려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한다. 서서히 파고드는 서구문물과 자본주의는 예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국가가 예술 산업 전반을 관리하고 예술가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시대는 끝났다. 각자도생, 베글로프는 중고 가구점에서 마음에 드는 소파를 사고 싶지만 돈이 없다. 재능이 없는 아르카디를 가르치는 이유도 레슨비 한 푼이 아쉽기 때문이다. 인기 여가수가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떠는 것도 돈의 힘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딸은 결혼식에 계부가 참석할 것이니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가족도, 돈도 없는 베글로프의 노년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아르카디는 마치 아들처럼 여겨진다. 탭 댄스에 대한 열정을 지닌 촌구석 젊은이는 베글로프를 위해 기꺼이 나선다. 베글로프에게 화가 난 여가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방송국에 함께 가서는 정정 보도를 요구한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과거의 예술가들을 바라본다. 회상 장면으로 제시되는 젊은 베글로프의 멋진 탭 댄스 공연에는 우아함과 품위가 넘친다. 구시대의 아름다움, 그것은 베글로프가 꼭 사고 싶어하는 중고 소파를 '진짜' 가구라며 애착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시대에 과거의 예술은 낡은 것이 되고,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은 고독과 빈곤에 내몰린다. TV 프로그램에서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베글로프를 소개한 것처럼, 그는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의 노년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영화의 제목 '가그라의 겨울 저녁'은 베글로프가 회고하는 젊은 날의 추억을 가리킨다. 어린 딸과 함께 한 휴양지 가그라에서의 공연, 그것은 늙고 가난한 탭 댄서에게 보석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전작에 이어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들려준다. 어떻게 삼십 대 중반의 젊은 감독이 스러지는 것들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영화는 개혁 개방의 파고가 거세게 들이치던 1985년, 소련의 대중 예술 산업의 한 단면을 구시대 예술가의 노년을 통해 예리하게 포착한다. 경탄이 나오는 탭 댄스 장면을 비롯해 스핑크스 세트장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공연, 러시아 로망스(가수들이 배우들의 목소리 대역을 했다)의 향연 또한 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fli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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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딸의 배를 불러오게 만든 놈팽이를 찾기 위해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남자의 딸 제시카는 뱃속의 아이 아빠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는다. 제시카에게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할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이복 오빠 칼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이 영화의 시놉시스만 보면 참으로 역겹고 추저분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그것이 이 영화를 50년 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잊혀지도록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1965년, 당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교수였던 Joseph L. Anderson은 자신의 수업을 듣던 학생들과 영화를 한 편 찍는다. 학생들 대부분은 영화 제작 경험이 없었다. 최소한의 제작비로 애팔래치아 산골 마을에서 찍은 이 영화는 서정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아서 1968년 뉴욕 영화제(New York Film Festival, NYFF)에 초청받는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 밀려서 영화제 상영이 취소된다. 그 경쟁작은 John Cassavetes의 'Faces(1968)'였다. 카사베츠가 'Faces'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고 성공하는 동안, 영화는 싸구려 영화 배급업자의 손에 넘어간다. 원래 영화에는 없었던 노출 장면이 추가되었고, 영화의 제목 또한 바뀌었다. 'Miss Jessica Is Pregnant'는 그렇게 교외 자동차 극장과 비디오 시장을 전전하면서 잊혀졌다.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학생 Nicolas Winding Refn은 세월이 흘러 그 영화와 다시 만난다. 그는 영화를 제대로 살려내기로 결심했고, 복원된 영화는 2018년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무려 50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출처 indiewire.com).

  앤더슨 감독은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찍으려 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의 자연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Spring Night, Summer Night(1967)'은 그런 감독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는 퇴락한 탄광촌 마을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다. 초반부에 보이는 동네 선술집의 떠들썩한 음주 가무 장면은 실제 동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친밀함 속에 삶의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황과 폐쇄적인 지리적 여건이 뿜어내는 쇠락의 기운은 영화 전체를 휘감는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이복 남매는 탈출을 꿈꾼다. 그런 가운데 예기치 못한 제시카의 임신은 가난에 찌든 대가족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복 남매의 금지된 사랑. 영화는 금기시 되는 소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은 없다. 칼과 제시카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만 아니라면, 그들은 마치 평범한 연인처럼 보인다.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오하이오의 광활하고 고요한 자연 풍광은 '근친상간'이란 소재의 충격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관객은 칼과 제시카가 올무처럼 자신들을 옥죄는 가난하고 희망없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기를 응원하게 된다. 이미 벌어진 일 보다, 그들의 미래를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용납받지 못할 행위를 옹호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두 주인공들을 억누르는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는 작은 균열들이 존재한다. 아버지 버질은 사별한 첫째 아내에게서는 칼을, 재혼한 아내에게서는 제시카를 얻었다. 그러나 제시카의 엄마 매(Mae)는 젊은 시절부터 단정한 품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급기야 칼은 매에게 제시카의 진짜 아빠가 누구냐고 따져 묻는다.

  앤더슨의 이 영화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Hamartia'라고 부르는 주인공을 비극으로 이끄는 결함, 그것은 성격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칼과 제시카가 안고 있는 심각한 도덕적 하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재현되는 hamartia와 일치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Spring Night, Summer Night'의 배경은 궁정이 아닌, 퇴락한 탄광촌을 품고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외딴 마을이라는 점이다. 또한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명백한 모자(母子) 사이이지만, 영화 속 이복 남매에게는 해소되지 않은 출생의 비밀이 존재한다. 그 점은 이 영화가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변용을 절묘하게 이루어냈다는 인상을 준다.

  5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이 영화를 만나는 것은 관객에게도 커다란 행운이다. 'Spring Night, Summer Night'은 헐리우드의 상업적 틀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예술적 궤적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 영화사의 특이점을 만들어낸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들이었다. 열정과 패기로 뭉친 이들이 만들어낸 화면에는 흘러넘치는 서정성과 놀라운 흡인력이 존재한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부는 봄 밤과 여름 밤의 아련한 풍경, 운명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이복 남매의 절망적 사랑, 광대한 오하이오의 자연, 앤더슨 감독은 그렇게 새로운 '애팔래치아 비극'을 완성해냈다.   



*사진 출처: blueprintreview.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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