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Andrew Ahn)의 장편 데뷔작 'Spa Night(2016)'를 보는 동안 떠올렸던 영화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1985)'였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성애자가 주인공이다. 한국인 이민자 2세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자신의 출신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대사는 대부분 한국어이며,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주제의 이야기이고, 정서적으로도 잘 와닿는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퀴어 영화(Queer film)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좀 뻔한, 진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이민 1세대의 고군분투,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2세대, 거기에 동성애가 버무려진 'Spa Night'는 그럼에도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 내러티브의 핍진성이 돋보인다.

  창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다루기 쉬운 소재는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이다.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고 치밀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은 관객들과 만나 공명을 이루어낸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동성애자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그것을 성취한다. 'Spa Night'는 도입부를 목욕탕에서 시작한다. 사우나실에 있는 아버지는 열기를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더 있으라고 말한다. 파랑색 이태리 타올로 아버지와 아들은 때를 민다. 목욕을 끝낸 후 휴게실에서 팥빙수를 같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가족에게 한국식 목욕탕은 화합과 소통의 장소이다. 부모는 아들에게 한국인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비춘다. 그러나 아들 데이비드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완곡히 부인한다.

  매일 조깅을 하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18살의 데이비드는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셀카로 몸을 찍어보며 수시로 변화를 체크한다. 이 청년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데이비드의 내면에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것에 대한 자각의 감정이 올라온다.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몸'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돈 문제로 갑자기 문을 닫게 된 식당, 부모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경제적인 곤궁은 데이비드에게도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한다.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는 부모는 무리를 해가며 아들을 입시 학원에 등록을 시키지만, 공부에 뜻이 없는데다 부모의 곤경을 보기 힘든 효자 아들은 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모호한 감정의 실체와 마주한다.

  열기와 습기가 어우러진 사우나 안의 뿌연 거울 앞에 선 데이비드의 모습은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게이들의 공공연한 만남의 장소인 그곳 목욕탕은 데이비드에게 혐오와 고통, 강렬한 호기심의 장소가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잘 알지만, 청년은 자신이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고, 부모가 원하는 며느리를 맞이할 수도 없다. 미국 땅에서 유색인종, 거기에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약자로 더 복잡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18살의 청년에게 그 어떤 것도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Spa Night'는 데이비드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부분에서 멈춘다. 데이비드에게 그것이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 지점인 것처럼, 이 영화도 앤드류 안의 영화적인 첫 목소리인 셈이다.

  2019년작인 'Driveways'는 'Spa Night'의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어서 펼쳐진다. 싱글맘 캐시는 아들 코디와 함께 뉴욕 교외에 위치한 언니의 집을 찾는다. 언니 에이프릴이 세상을 뜨자 남겨진 집을 처분하기 위해 온 것이다. 거의 왕래가 없었던 12살 차이의 언니의 집 안을 본 캐시는 놀라고 만다. 캐시의 언니는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로 집을 채운 호더(hoarder, 비정상적으로 물건을 수집하고 쌓아놓고 사는 사람)였다. 집을 팔기 위해서는 그 물건들을 치워야 하는 상황, 캐시는 게임기만을 끼고 사는 8살 아들과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물게 된다. 옆집에 사는 한국전 참전 군인 델은 그들 모자(母子)와 소박한 유대를 쌓아가고, 특히 내성적인 코디는 델과의 만남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백인 배우들을 기용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앤드루 안은 아시안계 배우로 바꾸었다.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홍 차우(Hong Chau)는 싱글맘으로 자신의 삶과 양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캐시를 잘 보여준다. 아들 코디 역의 루카스 제이(Lucas Jaye)의 명징하고 직관적인 연기는 그 자체로 빛난다. 앤드루 안에게 아시안으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아시안 배우들을 쓰기로 한 것이다. 'Driveways'는 그렇다고 해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캐시의 부산스러운 백인 이웃 린다와 그 손자들이 microagression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 관계와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세상에 그저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외로운 엄마와 아들은 낯선 곳에서 인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캐시가 언니의 집을 치우면서 잘 알지 못했던 언니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 보게되는 것, 게임기와 일본 만화에만 관심을 갖던 코디가 말년의 퇴역군인 델과 우정을 쌓아가는 것, 그 과정들은 절제되어 있으면서 따뜻한 감정의 물결이 소용돌이친다. 'Spa Night'에서 개인적 정체성의 탐구를 보여주었던 감독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Driveways'는 인종과 세대를 뛰어넘는 관계의 보편성, 그것이 갖는 삶의 의미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늘 혼자 식사하고 잠드는, 퇴역 군인 회관에 가끔 들러 빙고 게임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노인은 8살 꼬마와 친구가 된다. 그 우정은 살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은 그에게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코디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코디는 더이상 게임기가 아니라 동네의 흑인 남매와 같이 길에서 즐겁게 논다.

  첫 장편 영화 'Spa Night'로 선댄스에서 수상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알렸지만, 영화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적 묘사 때문에 그다지 큰 공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속작 'Driveways'는 매우 소박한 영화임에도 인간 관계라는 보편적 주제를 자신만의 독자적 연출로 풀어냄으로써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끌어내었다. 개인적으로는 뭔가 심심하게 느껴지는 'Driveways'보다 'Spa Night'가 더 집중력있고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양 관객들에게는 'Driveways'가 꽤 밀도있게 다가갔던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받고 울었다는 리뷰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퇴역 군인 델 역을 맡았던 Brian Dennehy의 유작으로서 가지는 나름의 의미도 더해졌을 것이다. 앤드류 안의 두 영화는 자아 탐구에서 시작된 영화적 여정이 세상과 타자로 조금씩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세 번째 영화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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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2018)'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심드렁하게 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졌다. 이건 걸작이니 꼭 보아야 한다고 말한 외국의 평론가가 있었다. 르 몽드(Le Monde)에 영화 비평을 쓰는 자끄 만델바움이었다. 정말 내가 이 사람과 같은 영화를 본 것이 맞을까?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해야 '영잘알'이 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오사카에 사는 아사코는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불 같았던 사랑의 감정은 갑작스런 바쿠의 잠적으로 상처 속에 봉인된다. 2년 뒤, 아사코는 도쿄에서 바쿠와 똑같이 생긴 외모의 회사원 료헤이를 보게 된다. 료헤이가 바쿠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아사코는 예전의 지인 하루요를 만나 바쿠의 소식을 듣는다. 유명 모델이 된 바쿠, 아사코는 감정의 혼란을 느끼고 그런 아사코에게 바쿠가 찾아오는데...

  바쿠와 처음 만나게 된 사진 전시회에는 일본의 사진 작가 고초 시게오(牛腸茂雄)의 'Self and Others'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에 앓은 병으로 신체 기형의 후유증을 갖게 된 이 사진 작가는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이 1977년에 나온 사진집 'Self and Others'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사토 마코토는 2001년에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다큐를 동명의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미지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 다큐를 보고 나면 영화 '아사코'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그 사진집에는 아이들을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 사진이 실려 있다. 고초 시게오의 작업은 마치 다이앤 아버스와 로버트 프랭크의 시적인 결합처럼 느껴진다. 그의 사진들은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규정되고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두 명의 어린 소녀들의 사진은 영화의 제목 'Asako I & II'와 겹친다. 관객은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바쿠와 료헤이를 서로 다른 인물로 상정한다. 그것처럼 그 두 사람을 사랑하는 아사코는 분리된 정체성을 가진 걸까? 바쿠와의 첫키스가 이루어진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은 부주의하게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불꽃 튀는 사랑의 감정, 서로 하나임을 느끼는 희열은 마치 꿈 속 장면처럼 제시된다.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가다가 사고가 나는데, 그 어떤 상처를 입지도 않고 살아남는다. 그 사랑은 임사체험(臨死體驗)처럼 격렬하고 비현실적이다.

  바쿠(ばく)라는 이름이 가진 곡물 '보리'와 동물 '맥(獏)'이라는 이중적 의미 가운데, 일본의 전통 요괴를 지칭하기도 하는 '맥'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중국의 전통 설화에서 유래된 이 괴물은 일본에서 꿈, 특히 악몽을 먹어버리는 요괴가 되었다. 영화 속 바쿠는 그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처럼 보인다. 잘 생기고 자신감이 넘쳐 흐르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없는 제멋대로인 남자, 그러므로 아사코의 지인들은 바쿠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바쿠가 다시 아사코를 찾아왔을 때, 아사코는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불길한 음악은 너무 직설적이라 무슨 스릴러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사코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료헤이에게 정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이 바쿠의 등장으로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과거의, 꿈 속의 연인 바쿠에게 아사코는 결국 달려간다. 모든 것을 버리고 바쿠의 차를 타고 떠나지만, 아사코는 자신의 내면적 감정이 료헤이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가는 도중에 멈춘다. 바닷가 방파제에서 아사코는 바쿠와 헤어진다. 이 장면이 무척 흥미로운데, 영화는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가는 장면을 아주 꼼꼼하게 보여준다. 데려다 주겠다는 바쿠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사코는 근처의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표를 끊고,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여느 다른 영화라면 이런 부분은 생략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과정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아사코는 방파제를 달리고, 골목을 탐색하며, 자신의 힘으로 이동한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이 여자 주인공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다시 현실로 진입할 수 있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바쿠의 기억에 매여있는 아사코의 모습은 연극 배우 친구 마야가 연기한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와 겹쳐진다. 장군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몰락한 집안의 세 자매는 어떻게든 시골에서 벗어나 모스크바로 가기를 꿈꾼다.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꿈의 도시이며 희망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현실은 냉엄하며, 모스크바는 그저 먼 곳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이 희곡의 대사에서 '모스크바'는 여러 번 나온다. 아사코에게 '바쿠'는 세 자매가 갈 수 없는 '모스크바'와도 같다.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두 명의 아사코는 서로 갈등하고 대결한다.

  자, 꿈 속에서나 볼 것 같은 너무나 멋진 '나쁜' 남자와 수수하고 평범하지만 현실의 '착한' 남자, 그 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아사코는 과거의 연인과 떠나면서 료헤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지만, 결국 돌아온다. 료헤이가 받아줄까? 잘못을 저지른 여자는 속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죄의식을 짊어진 채, 그저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관객은 아사코의 친구 마야가 공연하기로 했던 연극을 떠올려야만 한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들오리', 료헤이는 그 연극을 보러 갔다가 지진을 경험한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료헤이는 아사코와 재회하고 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들오리'는 어떤 작품인가?

  성공한 사업가 베를렌, 그에게는 아들 그레거스가 있다. 부도덕하고 비열한 아버지를 경멸하는 그레거스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늙은 부친은 재혼을 앞두고, 아들에게 사업을 이으라고 권유하지만 그레거스는 거절한다. 아버지 베를렌은 젊은 시절, 엑달과 벌목 사업을 하다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 죄를 엑달에게 뒤집어 씌웠다. 교도소에 다녀온 이후, 엑달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것은 그의 아들 얄마르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사진사로 일하는 얄마르는 새로운 사진술로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길 꿈꾼다. 그런 그에게 친구 그레거스의 등장은 예기치 못한 풍파를 일으킨다. 얄마르는 부인 지나와의 사이에 딸 헤드비를 두고 있는데, 이 착하고 순수한 딸은 그의 기쁨이다. 그런데 그레거스는 지나가 자신의 아버지 베를렌의 정부였으며, 헤드비가 그 둘의 딸임을 알려준다. 충격을 받은 얄마르는 부인과 딸을 증오하게 되고, 헤드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5막으로 이루어진 이 긴 비극은 일상적 행복 뒤에 가려진 위선과 죄를 다룬다. 그레거스는 엑달과 얄마르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의 그런 결정은 행복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현재의 삶은 산산조각이 난다. 료헤이에게 돌아간 아사코가 용서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입센의 '들오리'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새로 이사한 집 앞의 불어난 강물이 '더럽다'고 말하는 료헤이, 아사코는 거기에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덧붙여 말한다. 료헤이의 신뢰를 깨뜨렸으면서도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은 과연 위선일까? 그러나 흙탕물이 흐르는 강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아사코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죄의식 위에서도 두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은 한 점 티끌없는 무류성(無謬性)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과거의 조각들을 끌어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로맨스'라는 틀을 빌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관계를 형성해가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아사코'가 대단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기존의 문학과 사진 예술을 차용한 부분이 흥미롭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그렇게 깊이있는 울림을 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러닝타임이 5시간이 넘는 이 감독의 'Happy Hour(2016)'를 한 번 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사진 출처: fandango.com  



**여주인공 아사코 역의 카라타 에리카는 영화에서 오사카 출신의 아사코를 간사이 사투리로 연기한다. 그런데 치바현 출신의 이 배우의 사투리 연기는 너무나 어색하게 들린다. 좀 더 치열하게 사투리 연습을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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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군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12살 아이작, 7살 조이는 아빠를 열렬히 환영하며 끌어안는다. 남자는 2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좋은 시간도 잠시, 남자는 다시 떠난다. 카트린 아인혼과 레슬리 데이비스의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는 제대 군인 가족의 삶을 10년의 시간을 두고 담아낸다.

  삼촌 내외와 함께 지내는 아이작과 조이, 부모는 이혼했고 아빠는 먼 나라 아프간에서 군 복무 중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영웅이며, 거대한 산과 같은 그리움이다. 그런데 그 아빠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견뎠지만, 결국 절단 수술을 받게 된다. 군인으로만 살아온 남자는 장애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도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는 동안 아빠의 동거녀 마리아, 마리아의 아들 조던이 새로운 가족으로 들어온다. 다큐는 파병 군인의 부상과 제대, 그 가족이 보내는 긴 재건의 시간을 펼쳐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그 어떤 정치적 신념과 쟁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물 흐르듯 펼쳐지는 이 가족 드라마를 보며 관객은 미국의 골치아픈 아프간 전쟁에 대해 구태여 떠올릴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다큐 제작자들의 의도이기도 하다. 아인혼과 데이비스는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말한다(출처 coffeeordie.com과의 인터뷰).

  일반적으로 전쟁 다큐가 보여주는 긴박하고 치열한 전투 현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 부상과 죽음, 그러한 장면들은 이 다큐에서 볼 수 없다. 브라이언이 주둔한 아프간 쿤두즈 기지와 그가 수행한 전투가 짧게, 삽화적 장면처럼 들어가기는 한다. 그러나 다큐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아프간 파병 군인에 대한 기사를 시리즈로 내보냈는데, 육군 중사 브라이언도 취재 대상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해서 'Father Soldier Son'의 10년에 걸친 여정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여성 제작자들이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의 풍경은 매우 인간적이다. 가족 구성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이고 집안의 자잘한 소품들을 담아내는 것에도 남다른 데가 있다. 다큐 속 집안의 풍경은 이 가족이 군인 가장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군복과 군모를 일상복처럼 걸치고 지낸다.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세우는 군인들 미니어처를 비롯해 전쟁 관련 소품들이 진열된 거실, 아이작은 소파에서는 군용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잔다. 아버지 브라이언은 아이들이 강한 남성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조이가 학교 레슬링 경기에서 패하는 모습을 보이자 브라이언은 아들을 다그친다. 아이작이 하는 컴퓨터 게임은 전쟁 서바이벌 게임이다.

  브라이언이 상정한 '군인'이라는 이상적 직업, 사명감과 자부심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린 조이는 군인이 되어 아빠의 다리를 못쓰게 만든 놈들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조이와는 다르게 아이작은 대학에 진학하는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브라이언과 새엄마 마리아는 아이작의 꿈에 냉소적이다. 브라이언은 아이작이 결국 군대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된 아빠가 어떻게 아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반길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남자의 삶에서 군대는 전부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야할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두 아들의 내면에 무겁게 드리웠다는 점이다.

  다리 절단 수술 후 의족에 적응해야 하는 힘든 재활의 시간, 제대 군인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경제적인 어려움... 그에 더해 12살이 된 조이의 죽음으로 가족은 길고 고통스런 시련의 시간을 보낸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동생 조이는 아이작의 인생 행로를 바꾸게 만든다. 고교 졸업 후 아이작은 군에 입대한다. 입대 지원서를 쓰고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료식에 이르기까지 다큐는 담담하게 아이작이 군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들은 미 육군에서 자원 입대 홍보 영상으로 써도 괜찮을 정도로 보인다. 거기에서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군사 작전과 정치적 결정으로서의 파병과 같은 배경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다큐는 오직 '가족'의 풍경에만 집요하게 천착할 뿐이다.

  가족 심리 상담학자들에게 이 다큐는 매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아버지가 만들어낸 가족 문화와 양육 방식, 그것이 어떻게 한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 구성원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가를 'Father Soldier Son'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의 부모와 성장기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이 다큐의 경우에는 '군인'이라는 직업적 특수성이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반적인 가족과 좀 다를 뿐이다. 여느 전쟁 관련 다큐와는 달리 군인의 '가족'에 촛점을 맞추고, 10년의 시간을 두고 담아낸 이 다큐에는 가족 관계의 역동성(Family dynamics)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2년을 군에서 보낸 후, 아이작은 자신의 입대 결정은 부모의 이혼, 동생의 죽음,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 같은 여러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혼란과 불안함 속에 있는 이 젊은이의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조이의 죽음 이후,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은 브라이언은 군복 무늬가 그려진 배냇저고리를 산다. 겉보기에 이 가족은 시련을 이겨내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재건된 가족의 풍경에서 '조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사회인과 가장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브라이언, 그런 남편의 모습을 감내해야하는 마리아, 자신의 욕구 보다는 아버지의 기대에 종속된 아이작, 떠도는 주변인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아들 조던, 이들 가족의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진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다큐는 애국심과 같은 보수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는 의혹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전쟁과 정치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유화적으로 그려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Father Soldier Son'이 담고 있는 가족이란 주제의 근원성, 상처와 회복의 과정은 묵직한 감정의 파고를 일으킨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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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성찰, The Imposter(2012)와 American Animals(2018)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쟤들 선 넘네'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범죄 피해자가 된 도서관 사서도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cross the line', 중산층 출신으로 미래가 보장된 4명의 백인 대학생들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 바트 레이튼(Bart Layton) 감독의 2018년작 'American Animals'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2004년,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있었던 고서적 강탈 사건을 재연한다. 특이하게도 사건과 관련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에 들어간다. 레이튼 감독은 이전 작품인 다큐 'The Imposter(2012)'에서는 영화적 형식을 잘 결합시켰는데, 'American Animals'는 역으로 극영화의 틀에 다큐멘터리를 이식시켰다. 

  미술을 전공하는 스펜서는 도서관 안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매혹시키는 고서적과 만난다. 19세기 미국의 자연 화가이며 조류학자 존 오듀본(John Audubon)의 화첩 'The Birds of America'였다. 아름다운 핑크 플라밍고가 펼쳐져 있는 그 화첩은 무려 1200만 달러에 달하는 희귀한 책이었다. 약간의 비행(非行) 기질이 있는 친구 워렌은 스펜서가 흘리듯 말한 그 이야기에 혹한다. 그걸 훔쳐보면 어떨까, 하고 했던 농담은 1년이 지난 뒤에 치밀한 계획으로 변모한다. 모범생 회계학과 학생 에릭, 운동을 좋아하는 채스가 거기에 합류하고, 4명의 대학생들은 마침내 결전의 그날에 강도로 돌변하는데...

  영화는 Heist film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간다. 훔쳐야할 대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며,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레이튼 감독은 4명의 영화 속 인물들을 내러티브에 풀어놓고,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병치시킨다. 그런데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 속 워렌이 편의점에 들른 스펜서를 차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 진짜 워렌이 옆자리에 앉아 있고 둘은 대화를 나눈다. 현실의 스펜서는 영화 속 배우들이 도서관을 습격하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본다. 영화와 실제의 경계는 흐릿해지며 둘은 마구 뒤섞인다. 실제 인물들과 비슷하게 닮은 외모의 배우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The Imposter'에서 레이튼이 썼던 방법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발견된 16살 소년은 자신이 3년 전 미국 텍사스에서 실종된 '닉'이라고 말한다. 닉은 스페인으로 날아온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기다리던 가족들의 환대를 받는다. 언론도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이 소년과 관련된 수상한 점들이 드러난다. 금발에 푸른색의 눈동자였던 13살 소년 닉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청년의 외모로 나타났다. 프레데릭 부르댕, 그는 실종 아동을 사칭하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The Imposter'는 시작부터 그의 사기 행각을 본인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사기극은 부르댕을 빼다 박은 배우를 기용해서 다큐 속 액자 형식의 스릴러물이 된다. 실제 부르댕의 내레이션이 재연 배우의 입모양에 겹치기도 한다.  

  바트 레이튼은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실제와 허구의 모호한 경계, 서로를 모방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 자체에 관심을 둔 것처럼 보인다. 'American Animals'의 주인공들은 화첩 강탈을 모의하면서 Heist film을 열심히 본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자신들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펼쳐졌을 때, 그들은 겁에 질려 당황하고 허둥대며 무거운 화첩을 들고 나올 수 없어서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죄책감과 발각될 것이라는 불안은 이후 그들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장물을 팔아 나눈 돈으로 멋지게 잠적하는 영화와 같은 결말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7년형의 감옥 생활이었다.    

  도대체 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실질적인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워렌의 경우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개인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을 뒤바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달리 짜릿하고 멋진 상상 속의 세계, 그것을 현실로 그대로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그들이 도서관을 습격한 날, 오듀본의 화첩 속 그림은 이전의 플라밍고가 아니라 먹잇감을 나꿔채는 독수리로 바뀌어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은 흉폭한 포식 동물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벽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The Imposter'의 부르댕도 실종된 이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사이코패스 범죄자에게 '상상'은 '현실' 그 자체로 기능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낸 500여명의 가상 신분의 인물들과 그들의 과거사는 사기꾼과 뛰어난 이야기꾼의 차이가 종잇조각 한 장임을 보여준다. 부르댕에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그들 모두는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넘지말아야할 위험한 선을 넘었죠.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요."

  강도로 돌변한 대학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사서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한다. 'American Animals'의 실제 인물들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답변도 들려주지 않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하다. 흔히 예술은 삶을 모사한다고 말한다. 감독 바트 레이튼은 현실의 모사로서의 허구,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실제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자신의 두 작품을 통해 주의깊게 성찰한다.



*사진 출처: cinemapoli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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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들어!'하는 대사와 함께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겁에 질린 집주인 남자와 침입자 사이의 총질이 시작된다. '소련 웨스턴(Red Western)'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 무렵에 남자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세피트코(Larisa Shepitko)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과 나(You and Me, 1971)', 도입부 장면부터 범상치 않은 영화는 러닝타임 97분 내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며,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감독의 의중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관객을 내러티브 바깥으로 밀쳐내는 영화, 세피트코는 동시대에도 그랬고 후대의 관객들과도 불화할 것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표토르의 과거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중간 중간 제시된다. 의사인 표토르는 친구 샤샤와 의학 연구소에서 뇌종양 연구를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표토르는 연구를 그만 두고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일한다. 샤샤 또한 정부 기관의 관리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오른다. 표토르는 어느 날 갑자기 스웨덴에서 귀국해서 다시 이전의 연구를 이어가려 한다. 샤샤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지만 샤샤는 거절한다. 실망한 표토르는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는 동안 표토르의 아내 카티야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샤샤와 가까워진다. 시베리아의 시골 마을 의사가 된 표토르, 친구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샤샤, 자신과 아이를 두고 잠적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 카티야, 이 세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50년대에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VGIK)에서 구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배웠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있었다. 바실리 슉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라리사 세피트코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소련 영화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했던 슉신은 고향 알타이의 정서를 소련 민중의 삶 속에 녹여내었고, 타르코프스키는 독자적인 영상 미학을 확립했다. 세피트코 또한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아닌, 이미지가 가진 힘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1971년작 '당신과 나'는 그것을 잘 드러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표토르의 직업은 의사인데, 영화는 표토르의 직업과 과거에 대한 정보를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화면과 나중에 시골 마을 의사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인공에 대해 알게 된다. 표토르가 왜 연구를 그만 두고 외국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다만 표토르와 샤샤 사이에 있었던 카티야의 존재가 어느 정도 그 결정에 영향을 끼쳤음을 추측할 수 있다. 카티야는 갑작스런 남편의 귀국과 잠적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표토르의 내면에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은 무작정 길을 떠나게 만든다. 모스크바에서 떠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표토르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거칠게 따라간다. 마구 흔들리는 쇼트는 표토르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이어지는 여행에서 남자는 가난하고 소박한 민중들과 만난다. 귀향하는 젊은 농부 가족, 사과 한 알을 건네는 중년의 시골 아낙네, 그들과의 만남 끝에는 연인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는 철부지 아가씨도 있다. 결국 표토르는 시골 의사로 정착한다.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 보다는 이미지를 우선으로 한다. 먼지 낀 구두 위에 십자가를 그리던 표토르의 시선이 창공을 응시하자, 그것은 붉은 십자가 마크가 그려진 구급 헬기로 바뀐다. 헬기를 타고 가던 표토르는 한창 댐 공사 중이던 인부들을 보게 된다. 인부들은 손짓을 하며 헬기를 향해 인사한다. 건강하고 즐거운 노동자와 새롭게 변모하는 소련의 모습을 넣은 것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의도가 아닐 수 있다. 세피트코의 영화는 검열 당국의 심기를 늘 불편하게 했고, 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 세피트코 영화 속 인물들의 고뇌, 방황, 불행과 고통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표토르가 구두에 그린 십자가는 단지 구급 헬기와 구급차에 새겨진 마크가 아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표토르는 자신을 살아가게 만들 중대한 목표를 찾고 있다. 남자는 자신이 만난 민중들의 얼굴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비상(Ascent, 1977)'에서도 예수를 닮은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구원과 희생의 의미를 말했던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도 클로즈업 쇼트를 사용한다. 시골 마을의 보건소에서 표토르는 뇌종양을 앓는 소녀의 엑스레이를 보게 된다. 과거 그는 개를 대상으로 한 뇌종양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연구소를 그만 두고 스웨덴 행을 택하면서 연구는 중단되었다. 자신이 계속 연구를 했더라면 낫게 할 수도 있었던 소녀의 얼굴을 보며 표토르는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세피트코는 이 소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의 선택과 그것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한다. 영화 속 표토르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뛰어난 의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로 세상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며, 그가 그것을 저버렸을 때 그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의 삶이 달라진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영화는 일러준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피트코 감독 자신의 신념처럼 보인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 영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만드는 것,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화의 예언자적 기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중 문화 산업에 종속된 영화가 '재미'와 '수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추세가 되었다. 

  '당신과 나'의 불친절한 서사, 쉽게 이입될 수 없는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와 관객들 사이의 간극을 크게 만든다. 거기에는 영화 당국의 검열이라는 요소도 개입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세피트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은 낯설고 투박하게 보인다. 감독의 유작이 된 'Ascent'가 빛을 발하기까지 그 중간 단계로서의 징검다리 같다는 인상도 준다. 영화의 제목 '당신과 나'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영화의 첫부분, 스웨덴에서 돌아온 표토르는 샤샤에게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함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안온한 삶을 위해 각자의 길을 걸어갔던 두 사람의 삶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불행해 보인다. 엄혹한 공산 정권 치하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사명감과 개인적 선택과의 괴리, 세피트코는 고뇌하는 의사 표토르를 통해 그 삶이 가진 무게감과 속내를 드러낸다. 'Ascent'의 영화 음악을 담당했던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가 이 영화에서도 종교적 영성의 분위기를 더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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