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영화를 보았다. 영어 자막이 있었는데, 계속 외국 영화를 보다 보니 우리말 대사임에도 나도 모르게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그러다가 대사에 익숙해지니 그제서야 자막을 무시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자막 있는 외국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자막 없이 온전히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렇게 본 영화는 홍상수의 2020년작 '도망친 여자'이다.

  영화의 첫 장면, 전원 주택의 텃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 영순이 등장한다. 이웃에 사는 젊은 여성이 오늘 면접을 보러 간다며 영순에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영순의 대사톤은 연극하는 것처럼 영 어색하고 느리게 들린다. 영순과 대화하는 이웃 여성도 마찬가지. 영화 내내 이 이질적이고 느린 대사톤이 이어진다. 보다보면 적응이 되기는 한다. 홍상수식 '낯설게 하기'인가? 아무튼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들의 내용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에 모처럼 영순을 방문한 감희(김민희 분)는 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온다. 고기 구워먹으면서 하는 대화들이 어떤 것이냐 하면, '고기맛이 정말 좋다'와 '소의 눈망울이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 뭐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웃에 산다는 남자가 그들을 찾아온다.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 하니까 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감희는 집안에서 CC TV로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나온다.

  두 번째 방문에서도 그런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감희는 인왕산 아래 주택에 사는 수영(송선미 분)을 만나러 간다. 대화 도중 수영의 집을 찾아온 남자가 있다. 감희는 현관의 인터폰 화면으로 수영과 남자의 대화 장면을 본다. 세 번째 만남의 장소는 영화관, 그곳에서 감희는 과거의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우진은 감희와 한 때 사귀었던 남자 정 선생과 결혼했다. 정 선생(권해효 분)은 마침 그곳에서 북 콘서트를 하고 있다. 감희는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이번에는 관찰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면한다. 이렇게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들은 다 등을 돌린 채로 대화를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렇게 남자들이 쪼그라든 비중으로 나온 적이 있었던가? 영화는 시종일관 여자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건강과 돈, 관계에 대한 시시한 잡담들이다. 물론 남자들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기는 한다. 영순은 전 남편과 힘든 과정을 거쳐서 이혼했고, 수영은 필라테스 강사일 하면서 10억이나 되는 돈을 모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고민이다. '한국 남자들이 좀 심하지'라고 말하는 수영은 건축가 별거남과 잘해보려는데, 연하의 스토커가 말썽이다. 감희의 과거 남친과 결혼한 우진은 어떤가? 남편의 유명세와 말 많은 허세가 싫다며 감희에게 토로한다.

  그렇다면 주인공 감희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까? 남편과 지낸 5년 동안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늘 가까이 있어야 된다는 남편의 신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감희. 남편을 사랑하냐는 영순의 질문에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고 얼버무린다. 감희와 지인들이 나누는 이런 대화들을 듣다보면 정말로 저 사람들은 진심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홍상수는 그 대화 장면들을 대부분 풀 쇼트와 미디엄 쇼트들로 처리한다. 관객이 인물들의 표정을 좀 더 자세히 보면서 대화의 뉘앙스를 파악하고 싶어도, '딱 여기까지만'하고 선을 그어놓고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는다.

  감희는 자신이 만나는 지인들의 삶의 여건을 부러워하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한적해서 살기 좋을 것 같은 영순의 집은 이웃이 키우는 닭 우는 소리가 새벽 내내 들리고, 또 다른 이웃인 젊은 여성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영순의 집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수영은 또라이 같은 연하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중이다. 우진은 잘 나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다. 영화의 제목 '도망친 여자'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영순은 이웃집에 살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과 힘겹게 이혼한 영순은 교외의 전원 주택으로 도피한 것일 수도 있고, TV에서 매번 같은 말을 늘어놓는 남편에게 진력을 내는 우진은 그렇게 마음이 멀어져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희는? 관객은 감희가 남편을 사랑하는지, 결혼 생활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은 남편의 신조이지 감희의 의지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감희는 과거 남친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감희는 정말로 정 선생을 우연히 만난 것일까? 일부러 찾아온 거 아니라고 말하는 감희와 그게 아니지 않냐고 되묻는 정 선생. 두 사람의 대화에는 질척거리는 과거의 잔재가 느껴진다. 정 선생과의 대화를 황급히 끝낸 감희는 영화관을 나오다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본 영화를 다시 또 본다. 감희가 보는 영화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그 영화를 보는 감희의 모습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와 잠깐의 휴식을 누리는 사람 같다.

  이 영화의 IMDb의 관객 리뷰에 별점 1개를 준 이는 이렇게 써놓았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어처구니 없으며(absurd), 마치 학교 과제 프로젝트 같다. 이 영화를 본 내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다' 나는 그 리뷰의 두 가지 사항에는 부분적으로 수긍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 부분은 좀 생각이 다르다. 시시한 대화들로 채워진, 뭔가 어설프게 보이는 이 영화를 나는 꽤 즐겁게 보았다. 그냥 즐거웠던 정도가 아니라,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기이한 매혹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영화관에서 본 것이 1996년, 나는 결코 홍상수 영화의 열성적인 관객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영화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어느 때고 다시 돌아가 홍상수의 영화들을 챙겨서 보기는 했다. 한 명의 관객이 25년이 지났음에도 그가 내놓는 영화들에게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또한 홍상수가 지닌 재능이다. 영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던 감희는 영순이 문닫고 보여주지 않는 3층에 대해 말한다. 너무 더러워서 보여주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영순에게 감희는 자신을 못믿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 정말로 영순의 집 3층은 더러운 곳일까?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홍상수에게는 영순의 집 3층처럼 아직도 꼭꼭 감춰둔 자신의 영화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asianmovie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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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언제나 이야기가 문제가 된다. 마치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쫓아가려는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늘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영화라고 뭐가 다를까? 물론 영화는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객들은 언제나 주인공과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khnazarov) 감독의 1998년 영화 '보름달이 뜬 날(Day of the Full Moon)'은 그런 관객들의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한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려 8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이 쏟아지는 영화, 그런데 거기에는 주인공도 이야기도 없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사를 찾아가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영화사 관계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인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골머리를 썩고 있다. 남자의 조부모가 귀족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거기에서 소재를 얻고자 모친의 영화사 방문을 의뢰한다. 그렇게 남자는 떠나고, 두 사람은 몽골 제국의 칭기스 칸을 등장시키는 것은 어떤지 서로 의견을 나눈다. 그러고 나서 화면은 몽골 초원의 소년 칭기스 칸을 비춰준다. 다음 장면, 영화사 복도에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 지망생이 등장한다. 멋진 외모의 여성은 버스에 타는데,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자동차 승객과 눈이 마주친다. 미소를 지어보이는 젊은 남자, 그와 일행은 외딴 차고지에 도착한다. 잠시 후, 어디선가 도착한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기관총이 난사된다. 차에 탄 이들은 모두 죽는다. 차고지 근처를 지나는 지하철이 마침 멈춘다. 늙은 승객이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지만 그는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에 앉아있던 노인은 방송국 인터뷰에 응한다. 노인이 들려주는 과거의 기억, 장면은 1940년대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바뀐다.

  그쯤 되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감이 온다. 마치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영화의 내러티브는 서로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에게서 끊임없이 부딪혀서 튕겨져 나가며 그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시간은 현재에서 1940년대, 근대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비선형적(非線形的) 시간 구조, 스토리를 계속 분쇄시켜가는 이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Short Cuts, 1993)'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숏 컷'과는 달리 '보름달이 뜬 날'은 방사형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카렌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실험이 관객들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제작된지 20주년을 기념하며 모스 필름과 했던 인터뷰에서 그는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1990년대의 러시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그의 부연 설명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여러 등장 인물들의 삶의 편린들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킨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갱들과 청부 살인을 저지르는 저격수는 자본주의의 도입과 함께 러시아에 자생하기 시작한 폭력조직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에 탄 저격수를 비추던 카메라는 차 안의 노래를 소개하는 DJ가 있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그리고 나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노래를 신청한 여성 청취자의 방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러시아의 젊은 여성은 신나게 자신의 방 안에서 춤을 춘다. 이 아가씨의 모습은 이전까지 보았던 구 소련 영화의 젊은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 소련은 붕괴했고, 이제 '러시아'라는 이름의 나라가 등장했다.

  국가가 영화를 검열하던 소련 시절이라면 등장하지 못할 매춘부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귀엽고 청순한 외모의 매춘부는 TV를 보다가 중세 수도원의 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썩지 않고 발견된 공주의 시신, 그런데 그 공주는 매춘부의 얼굴과 똑같다. 1990년대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은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작동한다. 푸쉬킨이 몽골계 민족인 칼미크족  여성과 만나는 장면도 있다. 그런 장면들을 통해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러시아'라는 나라의 근원,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지만, 러시아인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은 손상될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의 오랜 전통, 위대한 문인 푸쉬킨, 칭기스 칸이 호령했던 중앙아시아의 끝없는 들판, 이 모든 것은 현대의 러시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름달이 뜬 날'은 분명히 소련 이후의 러시아 사회를 보여주지만, 샤크나자로프 감독의 시선은 좀 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을 바라 본다. 그의 시선은 인간에게서 동물의 내면으로까지 향한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늙은 개는 주인과 함께 했던 사냥의 기억을 떠올린다. '기억'은 이 영화에서 주요한 주제가 된다. 과거의 연인인 재즈 연주자를 무대 뒷편에서 만난 여자는 둘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1940년대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잔을 깨뜨리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기억을 가진 두 명의 사람도 나온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그렇게 공동의 기억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들을 비롯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모자이크화의 미분화된 점들처럼 보인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의 영화적 실험은 성공적인가? 관객에 따라서는 이야기의 깊이가 없는 이 영화의 피상적 접근 방식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는 무의미한 편린들의 나열처럼 보이는 '보름달이 뜬 날'에서 의외로 굳게 내린 현실의 뿌리를 발견했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그것을 영화 속에 끌어들인다. 영화가 만들어진 1998년, 어설프게 이식된 자본주의는 러시아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그해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닥친 금융 위기로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다. 결국 러시아는 혹독한 경제 성장통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보름달이 뜬 날'에는 공산주의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신생 국가의 흔들림과 들뜸, 불안정한 모습이 들어 있다. 



*사진 출처: mosfilm.ru  '보름달이 뜬 날'에서 연기지도를 하는 카렌 샤크나자로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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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재일 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니안짱'이란 제목의 일기 모음집이 출판된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4남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인 1959년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일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 '니안짱'은 일기를 쓴 주인공인 막내 스에코가 둘째 오빠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같은 해, 유현목 감독도 일기책 '니안짱'을 영화로 만든다. '구름은 흘러도'란 제목의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의 스타들이 꽤 많이 나온다. 무엇보다 주인공 말숙 역을 맡은 김영옥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아역 배우가 원로배우 김영옥 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영화는 동일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는데도, 서로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띈다. 처절한 가난을 다룬 점은 동일하지만, '니안짱(My Second Brother)'이 재일 한국인의 현실을 삽화적으로나마 묘사했다면 '구름은 흘러도'는 어린 소녀의 성장에 더 비중을 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니안짱'에 대해 나중에 술회하기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니카츠)의 문예 영화였기 때문에 큰 애착을 갖고 찍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촬영과 연출, 여러 부분에 걸쳐서 공들여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후쿠시마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광부들의 파업 장면을 비롯해 어촌 마을의 일상, 그곳 주민들의 가난에 찌들린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53년으로 당시의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던 때였다. 탄광촌의 경우는 생존의 여건이 더 열악했다. 종전 후 일본은 주력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았다. '니안짱'의 4남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광부인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말 그대로 거친 세상에 내던져 진다. 큰 오빠는 탄광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지만, 이미 많은 인력이 해고되는 상황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언니는 인근 도시의 정육점에 취직하고, 니안짱과 스에코는 이웃 헨미 씨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의 화자를 말숙으로 설정하고, 말숙이 쓰는 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와는 달리 이마무라 쇼헤이는 스에코와 니안짱을 공동 화자로 설정한다. 일기를 쓰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니안짱'은 내러티브의 많은 부분을 4남매와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 쓴다. 4남매는 탄광촌의 재일 한국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비롯해 일본인 이웃들(헨미 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어 자막에서는 재일 교포(조선인)라는 점이 일본어 대사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 같은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욕심 사나운 이웃 할머니처럼 4남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이도 있고, 첫째 오빠의 친구로 고물 장사를 하는 착한 이도 있다. 영화는 조선인 공동체가 일본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냉대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아마도 그런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기 보다는, 4남매의 가난과 고통스런 현실을 일본 관객들에게 더 부각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9년쯤 되면,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리면서 자신들의 어려웠던 시절을 조금은 성찰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영화 속 4남매가 고통스런 가난의 현실 속에서 가족애를 보이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괴롭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구름은 흘러도'의 맨발의 말숙(말숙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맨발로 나온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담임 선생처럼, '니안짱'에서도 담임 선생과 보건소 카네코 선생이 스에코에게 힘이 되어준다. 두 영화는 4남매가 가난 때문에 떨어져 지내는 것과 둘째 오빠 니안짱의 가출 소동을 비롯해 여러 에피소드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구름은 흘러도'가 말숙의 일기가 출판되면서 탄광촌에 금의환향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니안짱'은 가출했던 니안짱이 돌아와 스에코와 탄광의 언덕배기를 힘겹게 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겠다'는 니안짱의 마지막 독백은 일본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고자 하는 재일 한국인 소년의 동화 의지를 보여준다. 각색 작업에도 참여한 이마무라 쇼헤이는 소녀의 목소리 대신에 강인한 성격의 니안짱의 목소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에서 4남매를 구원한 것은 스에코의 글이었다.

  '니안짱'의 개봉과 함께 책은 더욱 불티나게 팔렸고, 책의 인세가 4남매의 안정적 삶을 보장해 주었다. 원작자 야스모토 스에코는 와세다 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문인으로 평탄한 삶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책 한 권으로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현목 감독의 '구름은 흘러도'의 결말이 그들 4남매의 후일담과 더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영화 가운데 유현목 감독의 연출이 좀 더 좋다고 느꼈다. 물론 '구름은 흘러도'는 재일 교포라는 원작자의 출신 배경이 제거된 맥락으로 만들어졌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견디려는 소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작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니안짱'은 스에코의 목소리 대신에 4남매가 겪은 비참한 가난의 현실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일본인들이 지나온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 영화를 재일 조선인의 시련기 내지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일본인들의 감상은 가난했던 그 시절에 대한 소회와 가족애에 대한 공감이 주류를 이룬다. '니안짱'을 보는 한국 관객들은 영화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또는 의도적으로 숨긴 재일 교포들의 차별적 현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완의, 상상력을 활용해 메꾸어야 하는 불완전한 영화적 텍스트로 남겨진 셈이다.  



*사진 출처: nikkats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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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심리학이 헐리우드 영화에 드리운 그늘, The Dark Mirror(1946)와 Compulsion(1959)의 경우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히치콕의 '스펠바운드(Spellbound, 1945)'이겠지만, 로버트 시오드막(Robert Siodmak)의 '다크 미러(The Dark Mirror, 1946)'도 그에 필적할 만하다. 시오드막 감독은 독일 출신으로 '다크 미러'에서 표현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의학과 심리학 전공자들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유사(類似) 심리학적 지식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쌍둥이는 선과 악이 분리된 각각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 등장하며, 로르샤 검사(Rorschach test)는 범죄 성향을 파악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런 영화들을 보다보면 정신분석학이 당시 헐리우드 영화들을 망가뜨린 것인지, 헐리우드 제작자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이 프로이트의 학문을 곡해한 것인지 가끔씩 생각해볼 때가 있다.

  '다크 미러'는 도입부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곧이어 목격자들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이 등장한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는 테리(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는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그런데 테리에게는 쌍둥이 동생 루스가 있고, 그 두 사람은 각자 강력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슨 형사는 쌍둥이 연구자인 엘리엇 박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박사는 쌍둥이들에게 자신의 연구에 참여하길 요청한다. 개별적으로 테리와 루스 자매의 정신 분석 연구를 진행하던 엘리엇 박사는 점점 자매의 서로 다른 기질을 파악하게 된다. 박사가 루스에게 호감을 느끼자, 테리는 질투에 휩싸이고 루스의 불안을 조장하기 시작하는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1인 2역을 맡아 테리와 루스의 서로 다른 면을 섬세하게 연기한다. 편집증적이고 냉혹한 내면을 지닌 테리, 그런 테리에 의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착하고 유약한 루스, 이렇게 분리된 선과 악의 캐릭터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엘리엇 박사는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테리와 루스 가운데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거짓말 탐지기로 알려진 폴리그래프(polygraph)도 나오고, 잉크 반점을 이용한 카드를 제시하며 연상되는 것을 말하게 하는가 하면(로르샤 검사), 심지어 왼손잡이(영화 속 테리)는 뭔가 비뚤어진 어두운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과연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고, 또는 사악하기만한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영화 속 테리와 루스는 전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성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사악한 기질을 범죄 성향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타고난 것으로 결코 외적 요인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다고 상정된다. 엘리엇 박사는 루스를 가장하고 자신을 찾아온 테리에게 '테리의 내면은 뒤틀려 있다'고 말한다. 무언가 결여된, 일그러진 내면을 가진 이 여성은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까지 한다. '다크 미러'가 보여주는 범죄에 대한 관점은 타고난 천성, 생득적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한 시각은 종종 살인 사건과 같은 중대 범죄 재판에서 정신분석학을 감형 요건으로 이용하려는 데에까지 미쳤다.

  리처드 플라이셔(Richard Fleischer) 감독의 '강박충동(Compulsion, 1959)'은 1924년에 시카고에서 있었던 실제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룬다. 명문대에 재학 중인 두 명의 부유한 남학생들이 아동을 납치, 유기한 잔혹한 범죄였다. 니체의 초인 사상에 경도된 '레오폴드와 로우브(Leopold and Loeb)'는 자신들의 지적인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영화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세부적 묘사는 생략하고, 대신 재판 과정을 길게 늘어놓는다. 실제로 동성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검열(Hays code) 때문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건의 설정을 따온 히치콕의 영화 '로프(Rope, 194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의 동성애적 관계가 범죄의 주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것을 묘사할 수 없게 되면서 범죄의 동기는 정신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병들고 썩은 내면, 즉 구제할 수 없는 정신적 이상(abnormality)이 법정에서 두 사람의 범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정신의학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증인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레오폴드와 로우브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변호인 측이 내세운 논리가 그와 같았다. 변호인단은 범인들이 성장 과정에서 겪었다는 학대와 심지어 내분비계의 문제가 환각 증상을 불러왔다는 이야기까지 들먹였다.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일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이상 심리와 범죄를 연결지어서 보여주는 기존 영화의 내러티브 방식은 때론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구태의연하게까지 보이는 면이 있다. '다크 미러'는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가 천착한 '이상 심리학' 장르의 계보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군데군데 헛점이 보이고 때론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 시대가 범죄를 바라보는 지배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플라이셔의 '강박충동'에서도 그러한 관점은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프로이트의 정식분석학적 틀이 인용되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 심리의 연구는 뇌과학과 유전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확장되었고, 영화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시대적 조류에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진 출처: classicfilmnoir.com   'The Dark Mirror'의 루스와 테리(그들은 각자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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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주요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지만, 아마도 현대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독재자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아닐까 싶다. 20년이 넘게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던 이 독재자는 도망치는 장면이 루마니아 전국에 생중계 되었으며, 체포된지 이틀 만에 곧바로 처형되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의 죽은 모습을 전세계 방송국에 열심히 뿌렸다. 지금과 같은 방송 윤리 기준에서라면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을 1989년이 저물어 가던 12월의 끝자락에 대한민국의 TV 뉴스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죽은 독재자의 모습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그것은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만들었다. 루마니아의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Corneliu Porumboiu)의 2006년작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12:08 East of Bucharest)'는 1989년의 루마니아 혁명을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회고한다.

  부쿠레슈티 동쪽의 소도시 바슬루이, 사람들은 성탄절 준비로 들떠있다. 지역 방송국의 책임자인 버질은 혁명 16주기를 기념하는 생방송 토크쇼를 기획한다. 그러나 초빙하려는 연사들이 모두 거절하자 궁여지책으로 자신이 알고 지내는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 한 사람은 까다롭고 엄격한 노인 피스코치, 다른 한 명은 늘 술에 절어 사는 역사학과 교수 마네스쿠이다. 토크쇼의 주제는 '16년 전인 1989년 12월 22일, 바슬루이 광장에서 정말로 혁명의 시위가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바슬루이 주민들이 차우셰스쿠가 도주하던 시각인 낮 12시 8분 이전에 주도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고 독재자의 축출을 요구했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소식을 듣고 놀라서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가 토론의 쟁점이 된다.


  마네스쿠 교수는 광장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시위를 시작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버질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세세히 들려줄 것을 요구하고, 교수는 지인들과 함께 비밀 경찰과 맞섰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버질은 토크쇼 중간 중간 시청자들의 전화를 받아서 의견을 듣는다. 그런데 마네스쿠 교수는 그때 술집에서 취해있었고 방송에서 하는 말들은 거짓말이라는 전화가 이어진다. 과연 교수의 말대로 16년 전 그날, 바슬루이 광장에서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을까? 아니면 몇몇 사람들의 증언대로 광장은 비어있었고, 교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일까...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은 루마니아 뉴웨이브(Romanian New Wave)의 대표 주자로 자신의 영화들에서 차우셰스쿠 이후 루마니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고향 바슬루이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 영화도 바슬루이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Police, Adjective(2009)'에서도 바슬루이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경직된 루마니아 사회와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를 보여준다. 그가 고향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가장 익숙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찍기에 좋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각본은 감독이 고향에서 보았던 실제 TV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받아서 씌여졌다. 포름보이우는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루마니아의 현실을 짜임새있고 치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과연 바슬루이에 진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다고 주장하는 마네스쿠 교수의 말은 연이은 시청자들의 전화 증언에 무너져 내린다. 교수가 맞서 싸웠다는 비밀 경찰은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는 현재 자신이 백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중소 기업의 수장이며, 당시 비밀 경찰국에서 회계사로 일했을 뿐이라며 강변한다. 이 장면에서 포름보이우는 루마니아 혁명의 씁쓸한 일면을 부각시킨다. 혁명으로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루마니아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주변의 권력 엘리트들이 그대로 정권을 인수했으며, 말 그대로 '그 밥에 그 나물'인 기득권 세력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루마니아를 깊은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비밀 경찰에 몸담았던 회계사는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어엿한 기업체의 사장이 되었다. 토크쇼를 진행하던 버질은 그의 말에 쩔쩔매면서 교수를 몰아세운다.

  깊은 빡침을 느낀 마네스쿠 교수도 가만 있지 않는다. 진행자 버질에게 그때 넌 뭐하고 있었느냐고 반격한다. 버질은 자신의 개인 사업체나 다름없는 지역 방송국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16년 전에 버질은 공장 기계나 만지고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엔지니어였다. 교수는 그런 그가 혁명 당시 아무 것도 하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시점에서 혁명이 있었네 마네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비꼰 것이다. 그 지점에서 포름보이우는 저널리즘에 대한 전문적 이해도 없는 장사꾼 같은 버질이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혁명 이후 루마니아 언론은 소수 언론 재벌에 의해 독점되면서 자정과 비판 능력을 상실했다. 이렇게 영화 속 토크쇼 촬영 장면은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가득하다. 화면은 기울어져 있고, 때로 흔들린다. 무슨 영화를 이렇게 엉터리로 촬영했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촬영 기사가 버질에게 삼각대(Tripod)가 고장났다고 하소연 한다.  

  잠자코 있던 피스코치 노인이 들려주던 그날의 기억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도 채워져 있다. 나는 영화 속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본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여느 때처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리길래,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니 근처 도로를 시위대가 가득 메우고 크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로는 '저러다 세상 뒤집어 지겠네'가 아니라 '뭔가를 하고 있구나'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뉴스에서 직선제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시위의 열기는 금새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그 항쟁이 미완의, 좌절된 혁명임을 증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변혁을 바랬다기 보다는, 현실의 안정에 더 큰 무게추를 두었다.

  포름보이우 감독이 들려주는 혁명 이후의 루마니아 사회는 암울함과 답답함으로 채워져 있다. 결코 회복하지 못한 경제 침체와 청산되지 않은 독재 권력의 유산은 오늘날 루마니아가 당면하고 있는 크나큰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개인의 미시사적 기억을 통해 과거의 역사로서 혁명의 의미, 그것이 현재에 드리운 기나긴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 관객들은 단지 '루마니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사회적 격변의 시기도 함께 성찰해 보게 된다.   



*사진 출처: filmlinc.org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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