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가끔 영화를 본다는 것이 권투 선수가 링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상대편 선수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무작정 링에 올라서 시합해야 하는 느낌. 어떨 때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경기를 끝내지만, 때론 상대방의 강타에 휘청거리다 링을 나오는 때도 있다. 나에게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은 선수로 치자면 상대편을 무척 진이 빠지고 힘들게 만드는 무척 까다로운 대전 상대다.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 2001)', 히든(Hidden, Caché, 2005)을 보면서 그 암울하고 출구 없는 세계관이 참 싫었더랬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양반 영화는 그냥 안보고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오늘은, 그동안 좀 쉬운 선수들을 만났으니 약간은 좀 긴장 좀 해보자 싶었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Fragments of a Chronology of Chance, 1994)'을 그렇게 영화 감상의 링 위에서 만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Short Cuts, 1993)'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다. 솔직히 '어, 좀 약한데?'라고 슬쩍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하네케만의 디스토피아적 관점은 관객을 진흙탕으로 무작정 끌고 들어간다. 영화는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진다.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방송 뉴스 화면이 흘러 나온다. 뉴스들의 내용은 당시 분쟁 지역들과 관련된 소식이다. 보스니아와 소말리아, 아이티의 내전 소식, IRA와 쿠르드 반군의 전투, 유럽의 이민자들 문제며 유고슬라비아의 인종 청소,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소식까지 망라한다.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의 일상은 암전(blackout)화면에 이어 연결된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루마니아 소년, 고아원 아이를 입양하려는 중년의 부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보안회사 직원과 그 아내, 가족의 무관심 속에 홀로 지내는 외로운 노인, 불만이 가득한 대학생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끌어간다.

  1993년 10월에서 12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은행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엮인다. 1시간 35분의 러닝타임에 마지막 15분 가량의 결정적 순간을 향해 가기까지 영화는 더디고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시간이 정말로 느리게 간다고 느끼게 된다. 관객은 외롭고 아픈 노인이 냉담한 딸에게 쏟아내는 폭풍같은 불평의 전화와, 대학생이 탁구 연습을 하는 롱테이크를 명상하듯 응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라고 계속 질문을 던질 때마다 뉴스 보도 화면이 딱딱 맞춰 나온다. 전쟁과 참혹한 살상의 소식은 고립된 인물들의 일상과 병치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노인이 딸(은행원)을 만나는 곳은 자신의 연금을 찾는 은행 창구이며,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한 부부는 가벼운 대화나 접촉도 거부하는 아이의 폐쇄성에 좌절한다. 국경을 넘은 소년은 도둑질과 거리 생활에 익숙해지며 부랑아가 된다. 거리를 헤매는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는 하네케의 주요 관심사인 미디어, 인간 사이의 소외와 단절, 폭력에 대한 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뉴스 화면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소식들에 무감각해진다. 그 누구도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폭력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다.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고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단절시키고 고립시킨다. 전화통을 붙들고 딸의 무관심을 꾸짖는 외로운 노인의 옆에는 TV가 켜져있고 계속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용히 통화하려면 TV를 꺼야하지 않을까? 이 노인은 밥 먹을 때도 TV를 켜놓는다(사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노인에게 미디어는 세상과의 소통이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배경 소음으로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흥미있는 장면이 있다. 바로 대학생들이 계속 반복해서 하는 조각 퍼즐 놀이이다. 잘라진 종이 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형태로 완성하는 것인데, 그들은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결국 그 퍼즐을 완성하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영화는 조각난 이야기들을 '우연'이라는 요소로 그러모아 마침내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한다. 고장난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빼내지 못한 대학생은 갑자기 총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 난사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실제 있었던 그 사건에서 범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하네케는 그 사건을 이 영화의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희생자가 된 이들이 무심히 보았던 뉴스는 다시 그들의 비극을 방송으로 송출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 폭력은 일상에 스며들어 빠르게 재생산된다.

  하네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차갑고 건조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이며, 고립과 단절은 인간의 숙명이다. 미디어가 그런 인간을 이어주고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해줄 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은 사태를 제대로 성찰할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방송되었던 뉴스가 똑같이 반복되어서 재생되는 장면은 그 악순환의 틀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돌아오게 되는 하네케 영감님의 암울한 닫힌 세계가 궁금한 이들은 한 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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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데서 이상한 사람들과 있으면 네가 더 나빠질 거야. 좋은 음식 먹고 영양제 같은 것도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니. 그러니 의사한테 말해서 여길 나가자꾸나."

  남자는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는 딸을 그렇게 구슬린다. 딸 건너편 침대에서 이어폰을 꼽고 대화를 못들은 척하는 유스테를 남자는 힐끗 쳐다본다. 그의 눈에는 유스테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딸이 그곳을 나가서 좋은 음식이나 영양제 먹는다고 나아질 수 있을까? 리투아니아의 신예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Marija Kavtaradzė)의 2018년작 '여름 생존자(Išgyventi vasarą)'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심리학과 대학원생인 인드레는 바이오피드백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다. 인드레가 도움을 받길 원하는 빌뉴스 정신 병동의 의사는 조건을 하나 내건다. 다른 정신과 클리닉으로 치료를 의뢰할 병동의 환자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데려다 주고 오라는 것. 꽤 먼거리를 환자들을 데리고 운전해야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만 인드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나마 오랜 경력의 간호사가 동행하는 것에 안심하면서 길을 떠나는 인드레. 파울리우스는 조울증 환자이고, 유스테는 최근에 자살 시도를 했다. 타인과의 소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학원생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이 여정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여름 생존자라... 제목이 특이하다. 마리야 카브타라제 감독은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은 매일매일의 삶이 투쟁이며, 그것에서 생존하는 것이 커다란 화두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출처: 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영화의 구성은 비교적 명료하다. 과제가 주어지고, 주인공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로드 무비에서 그가 함께 할 동행자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는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견고하고 견디기 힘든 것인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인드레가 운전하는 차에는 '빌뉴스 정신 병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파울리우스는 휴게소에서 젊은 커플이 그것을 보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저 차에 탄 미친 인간들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며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은 그는 임시방편으로 차에 박스를 뜯어붙여 글씨를 가린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인드레와 파울리우스, 유스테는 서로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조금씩 친해진다. 인드레는 5년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는 파울리우스의 절망도 공감하고,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유스테의 아픔도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특이하고 이상한 모습이 아닌, 그 나이 또래 젊은이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물론 그것은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과 약물과 치료의 도움으로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생존자(survivor)라는 제목 그대로,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는 매 순간 마음 속 고통과 전쟁을 치룬다.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서 두려움에 떠는 유스테를 돕는 것은 파울리우스이다. 그는 유스테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 지나가, 너도 알잖아. 지나갈 거라구'라고 말해준다.

  인드레는 아무는 팔목 상처를 가려워하는 유스테를 위해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서 소독을 해준다. 붕대를 풀자 길게 꿰맨 유스테의 자해 상처가 보인다. 그것은 타인이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유스테의 내적 고통의 흔적이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파울리우스도 마찬가지. 휴게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파울리우스. '난 다시 노래할 거야(I'll sing again)'라고 목놓아 부르는 파울리우스의 바람은 언젠가 돌아가고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간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리투아니아의 이 신예 감독은 훈계나 설교가 아닌 따뜻한 감성으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맞선다. 여행 도중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사물들은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신의 영화가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과 그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카브타라제 감독.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가진 견고한 편견의 벽이 조금은 낮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빌뉴스 병동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유스테는 침대에 누워 웃는 연습을 한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 연습이 자신의 오늘을, 내일을 견딜 수 있게, 그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할 거라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리투아니아어 원제목의 뜻은 '여름을 견디다'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꽂히는 여름날을 견뎌내는 것처럼,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이들에게 '여름의 생존자'는 작은 위로를 건넨다. 
   


*사진 출처: filmproducers.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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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구 소련 시절의 영화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별로 재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무슨 구닥다리 영화를 저렇게 보나,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들이 정말로 재미있다. 재미가 없는데도 억지로 보고 과제처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영화가 시작할 때 모스 필름(Mosfilm)의 로고가 뜨는 것만 봐도 정겹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러시아 영화를 접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도 있다. 무엇보다 그 영화들이 나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거기에 소련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삶이 영화 속에 다채롭게 펼쳐진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아포냐(Afonya, 1975)'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모범적 시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등장한다. 배관공 아파나시(애칭 아포냐)는 '인민의 적'까지는 아니지만, '인민의 골칫덩이'임에는 분명하다. 영화는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포냐가 행복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배관공으로 일하는 아포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대충 하고, 고객들에게 수리비를 더 뜯어내기도 한다. 아포냐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보드카를 가지고 다닐 정도다. 늘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포냐에게 질려서 동거하던 여자 친구도 떠나버린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알게 된 미장공 콜랴와 함께 지내게 된 아포냐, 콜랴는 대책없이 살아가는 아포냐를 걱정한다. 그러나 아포냐는 술에 취해 연못에 빠져 음주 단속 경찰에 체포되는가 하면, 클럽에서 싸움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런 아포냐를 예전부터 짝사랑한 어여쁜 간호사 카챠는 아포냐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아포냐는 무관심하다. 수리하러 갔다가 알게 된 미모의 고객 엘레나에게 마음을 뺏긴 아포냐는 엘레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 남의 집 새 싱크대까지 뜯어 바꿔주기까지 한다. 과연 아포냐의 인생에도 볕들 날이 있을까...

  "자넨 결혼을 해야 해. 가정은 국가의 기초를 이루지."

  아포냐처럼 술을 좋아해서 아내에게 쫓겨난 신세이면서도 콜랴는 아포냐에게 그렇게 충고한다. 이젠 젊은 나이도 아니고 중년을 향해 가는 아포냐에게는 삶의 즐거움이나 목적이 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그저 대충 때우면서 살아갈 뿐이다. 자신이 맡은 구역이 아니면 아파트 배관이 터져서 주민들이 고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상사는 작업장에 견습 온 학생들도 배정해주지 않는다. 상사에게 따져서 억지로 견습생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데, 그 견습생들은 결국 배울 게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배정해달라고 하소연한다. 술 문제로 사고칠 때마다 지역 위원회에 불려가서 자아비판 당하는 것도 여러 번이다. 반복되는 경고 처분에도 소용이 없자, 집으로 찾아온 회사 간부는 아포냐에게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네 문제가 뭔지 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거야. 그건 범죄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와 같다구."

  그는 아포냐 같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직 사회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체제의 오물로 취급한다. 확실히 이 영화 속 주인공 아포냐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이상으로 삼는 바람직한 인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뭔가 삐딱선을 탄, 목표도 없이 부유하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배관공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대체 뭘까? 어릴 때 어머니를, 아버지는 전쟁통에 잃은 아포냐는 고모의 손에 자라면서 고아 신세는 면했지만, 아포냐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 같은 것이 있다. 아포냐는 고향 마을에서 엘레나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아포냐는 배관공일 뿐이다.

  1975년, '아포냐'는 그 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무려 6200만 명이 관람하며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했다. 사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이 영화는 그다지 큰 재미는 없다. 영화는 당시 소련에서 유행했던 여러 노래들이 흘러 나오는데, 다넬리야 감독은 자신의 영화들에서 특히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마도 소련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공감대가 흥행의 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포냐가 보여주는 체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순응성이야말로 당시의 관객들이 열광한 부분이었다. 그즈음 소련은 기계적 규율과 엄혹한 통치로 인민의 삶을 강제하는 것에 서서히 부하가 걸리는 징후를 보인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 침체와 수구적인 사회 분위기에 소련 사람들은 염증을 느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보드카 소비량(음주 단속 전담 경찰이 생길 정도였다), 코미디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에는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있다.

  이도 저도 되는 일도 없이 좌절만 하는 아포냐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넬리야 감독은 공산주의 사회의 표류자, 경계인인 아포냐를 어떤 식으로든 구제해야만 했다. 마치 구원의 여신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카챠가 아포냐를 찾아 온다. 카챠 역을 연기한 에프게니아 시모노바는 이 영화로 단번에 인기 스타가 되었다. 뭔가 중년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진무구하고 앳된 아가씨 역은 시모노바에게 배우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이후에 이어진 역들이 대부분 청순가련형의 캐릭터들이어서 배우 자신은 이 영화를 아쉽게 생각했다.

  다넬리야 감독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미도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Walking the Streets of Moscow, 1964)'와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 1979)'에서 보여준 그만의 영화적 감수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아포냐'는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소련의 체제와 그 속에서 방향을 잃은 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넬리야 감독은 소련의 컬트 SF영화라고 할 수 있는 'Kin-dza-dza!(1986)'에서도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검열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시대와 공명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낸 이 감독의 영화적 여정에는 그렇게 소련이란 나라와 그곳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사진 출처: filmpr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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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의 '농담'. 내 기억 속의 그 소설은 이렇게 각인되어 있다. '마음에 둔 여자한테 보낸 엽서에 가벼운 농담 좀 적었다가 인생을 탈탈 털려버린 남자의 이야기'. 야로밀 이레스(Jaromil Jireš) 감독의 1969년작 '농담(The Joke)'는 밀란 쿤데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이레스 감독과 함께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 과연 원작자가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물론 쿤데라는 소설 속의 내용을 그대로 다 화면으로 보여줄 수 없었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생략되었고, 캐릭터들의 묘사는 피상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소설을 읽은 관객들이라면 당연히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농담'은 매우 불친절한 영화가 될 수 있다.

  루드빅은 15년 만에 자신의 고향에 돌아온다. 그에게는 꼭 해야할 복수가 있다. 루드빅은 자신을 반동 분자로 몰아 무려 6년의 세월을 군대와 탄광에서 보내게 만든 사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대학 시절, 루드빅은 마음에 둔 마르케타에게 엽서를 보냈었다.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했던 마르케타는 루드빅의 엽서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생각한다. 당으로 넘어간 엽서는 루드빅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몰아넣는다. 인민 재판을 통해 대학과 당에서 제명당한 그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마르케타를 비롯해 인민재판을 주도한 친구 파벨에 대한 증오심이 루드빅을 사로잡는다. 루드빅은 우연한 기회에 파벨의 아내 헬레나를 알게 되고, 헬레나를 유혹해서 자신의 복수극을 완성하려고 하는데...

  소설은 4명의 등장 인물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는 루드빅의 시점만을 보여준다. 선택과 집중,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기도 하다. 야로밀 이레스 감독은 루드빅이 고향에 도착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루드빅의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교차편집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루드빅은 우연히 시청 청사에 갔다가 행사를 참관하게 된다. 도시에 새로 전입한 주민들을 환대하는 그 행사는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꽤 격식있게 치뤄진다. 그러나 루드빅은 시장이 연설하는 것을 보며 군대의 가혹했던 지휘관을 떠올린다. 친했던 고향 친구 야로슬라브를 만나서도 그의 과거는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야로슬라브는 체코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을 운영한다. 악단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던 루드빅은 군대에서의 끔찍했던 시련과 그곳에서 부르던 군가(이제는 노예도 없고 주인도 없다)를 기억해 낸다.

  이렇게 교차편집된 장면들을 통해 관객은 루드빅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엽서 때문에 회부된 인민 재판일 것이다. 루드빅의 대학 친구와 동료들은 루드빅을 대학과 당에서 제명하는 데에 찬성한다. 거수로 결정되는 그 과정은 루드빅에게 견디기 힘든 모멸감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그러한 인민 재판은 체코의 공산 정권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 주의가 끼친 폐해였다. 정적의 축출과 숙청 과정에서 그것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온전히 정치 비판적인 텍스트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교조주의적인 사상과 이념이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쿤데라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루드빅이 파벨에게 하려는 복수극의 실체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루드빅은 파벨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이나 파멸 대신에 파벨의 아내를 유혹해서 굴복시킴으로써 파벨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벨 부부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은 루드빅의 복수극을 허망하게 만든다. 거기에 루드빅에게 버림받은 헬레나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자살 소동이 덧붙여지는데, 이쯤 되면 과연 '농담'이 신랄한 체제 비판적 텍스트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럼에도 체코의 공산당 정부는 이 영화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폭압으로 끝나면서, 1960년대 체코 영화계에 불었던 뉴 웨이브(New Wave)의 훈풍은 칼바람으로 변한다. 영화 '농담'은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상영 금지 목록에 올랐고, 밀란 쿤데라는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영화 '농담'은 원작 소설이 지닌 의미를 재현해내는 데에는 상당히 힘이 달린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체코 공산 정권 수립에서부터 프라하의 봄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이지러진 역사적 단면을 개관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소련의 스탈린 주의가 체코 현대사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여러 체코 영화들에서 감지된다. 오타카르 바브라(Otakar Vávra) 감독의 'Witchhammer(1970)'는 1950년대 인민 재판을 마녀 사냥에 빗대었고,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 온드리첵(David Ondříček) 감독의 'In the Shadow(2012)' 또한 초창기 체코 공산 정권과 소련의 유착을 범죄 스릴러 장르에 담았다. 외국의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체코의 과거와 만나게 된다. 영화 '농담'은 그러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꼭 거쳐가야할 작품으로 남았다.  

   


*루드빅이 엽서에 썼던 '농담'은 이러했다;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야.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기지. 트로츠키 만세!"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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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저녁에 직장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다.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 있던 4살 배기 어린 딸이 살해되었다는 비보였다. 놀란 여자는 딸과 함께 있던 아들은 괜찮냐고 경찰에 묻는다. 아들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그럼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경찰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여자의 딸을 죽인 범인이 바로 13살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케이티 그린과 카일 루빈이 2017년에 만든 다큐 'The Family I Had'는 한 가족에게 닥친 참혹한 비극을 통해 범죄와 유전, 형벌 제도의 의미를 들여다 본다.

  원래 두 명의 제작자들은 청소년에게 선고되는 과도한 형량과 사법 제도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아들의 손에 딸을 잃은 여성 채리티(Charity)였다. 채리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팔과 목덜미를 가득 메운 문신은 이 여성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성장 과정 내내 방황했던 여자는 약물 중독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뜻밖에 생긴 첫째 아이 파리스는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싱글맘으로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엘라, 천사같은 아이를 보며 삶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던 와중에 여자에게 견딜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다.

  다큐는 3년에 걸쳐 촬영되었다. 관객은 채리티와 채리티의 모친, 수감 중인 파리스와의 인터뷰를 들을 수 있다. 중간 중간 들어간 그들 가족의 홈 비디오 화면을 비롯해 파리스의 글과 그림이 이 기구한 가족사를 증언한다.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은 파리스의 형기는 40년, 채리티는 수감 중인 아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엄마로서 아들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가운데 여자에게 아들 피닉스가 생긴다. 여자는 여전히 싱글맘으로 살아간다.

  다큐는 채리티의 인터뷰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사건 당사자의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채리티는 아들의 범죄가 가계(家系)에 흐르는 유전적 소인에 있음을 되짚어 준다. 파리스의 부친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채리티는 자신의 모친 카일라에 얽힌 어두운 과거를 폭로한다. 젊은 시절 카일라는 남편 청부 살해 혐의로 기소당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채리티는 모친의 무죄를 믿지 않으며, 모친의 범죄 성향과 냉정한 양육 방식이 자신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파리스의 범죄를 유전과 환경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파리스가 어린 여동생을 괴롭히는 홈 비디오 장면은 나중의 비극을 예감하게 만든다. 카일라는 채리티가 아들의 그런 성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방치했다고 증언한다. 파리스가 12살 때 자신이 마약에 다시 손을 댔다는 과오는 인정하지만, 채리티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사태에서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파리스에게 공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음에도 여자는 아들에게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감옥에 수감된 아들을 주기적으로 면회하는 것을 사랑과 용서의 행위라고 포장하는 이 여자에게는 분별력과 책임감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다큐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바로 선정성과 저널리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의 세부 내용을 언급하는 자체로도 너무나도 충격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위까지 다룰 것인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살인범의 차분하고 뻔뻔한 인터뷰를 보는 것은 분명 고역이다. 이제 청소년이 된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4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 나름의 불만을 토로한다. 다큐는 중심을 잃고, 이 기구한 모자의 이야기에 휘둘려 끌려다닌다. 도대체 이 다큐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채리티의 이야기는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인간극장처럼 보인다.

  2027년, 파리스는 가석방 신청 요건을 갖추게 된다. 다큐 이후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파리스는 엄마에 대한 증오심으로 범죄를 저질렀으며 당시에 엄마까지 죽이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엄마 채리티는 다큐에서 한 이야기로는 부족했는지 2020년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펴냈다. 아들이 석방될까봐 무섭다고 말하는 이 엄마는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라도 팔아 돈을 마련해야하는 걸까? 감옥에서 나오면 자신의 엄마를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아들, 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가족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청소년 범죄자에게 가혹한 사법제도를 비판하려 했던 'The Family I Had'는 결국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영구적 격리가 답이라는 의외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 다큐를 본 이들은 '사이코패스'가 돌에 새겨진 성격과도 같으며 치유와 갱생이 불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cinemajam.com   자신의 모친 카일라를 바라보는 채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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