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올해의 마지막 미나리를 데쳤다
억센 뿌리가 찡긋, 웃는다
밤새 왼쪽 눈이 퉁퉁 부었다
왜 오른쪽 눈은 멀쩡한지 궁금하다
알레르기 안약을 두 눈에 한 방울씩 공평하게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까먹는다

못난이 참외가 배송 중이다
얼마나 못생긴 참외가 올지 기대한다
소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시오
분노의 상품평은 읽지 않은 것으로 한다
잘생긴 참외의 삶도 그 끝은 식탁이다

반팔 티셔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꺼낸다
남색 줄무늬 티셔츠 하나면 충분하다
아프리카의 해변, 인도의 뒷골목, 인도네시아의 강어귀
미어터지게 누군가 버린 옷들은
긴 여행 끝에도 죽지 않는다

앞동 아파트의 커다란 개가 짖는다
세인트버나드가 무서워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조그만 강아지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불안이
6월의 아침을 까칠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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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머리에는 안개가 끼어있다
눅눅해진 발바닥
한낮의 기온이 오르길 기다린다
불안의 미기후(微氣候)가
삼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예보관(豫報官)의 무능력은 해고되지 않고
TV화면은 우울한 웃음을 송출한다

하수구의 썩은 사과가
부엌의 기분을 측정한다
손바닥만 한 개수대의 창문
벚나무는 미친 여자의 얼굴이다

목이 부러진 선풍기를 켠다
붉은색의 모터는 튼튼하다
회전할 수 없는 삶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잠깐, 너의 안부를 생각한다
남루한 안락함 속에서 울기를 바란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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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散策)


저 나무는 왜 매실이 열리지 않는가
잠깐 생각하다가
저 나무는 벚나무였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열리지
매실은 매화나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

오른발이 2년 동안 아프더니
이제는 왼발이 아프다
고통의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된다
나는 그 정밀한 법칙에 경탄한다
왼발을 천천히 끌면서
존재하지 않는 예외를 소망하며

쓸데없이 큰 정원을 가진 정원사
가지치기는 엉성하고
꽃들은 모두 제멋대로
그래도 샛노란 나리꽃은 눈물이 났다

시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법칙에는 배신의 상수(常數)가 
그래도 누군가는 오늘
너의 산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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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新都市)


서른다섯 살, 신도시는 늙어가고 있다
부실한 시멘트로 지어진 골조는
늘어진 잇몸이 되어 흘러내리고
검버섯의 얼굴은 분칠로 가려지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또 다른 신도시로 떠났다
부모를 따라 아이들과 학원도 짐을 싸고
거친 회색 외벽의 병원들은
굳건한 두 다리로 버틴다
이 도시의 병원은 환상적이다

처참한 몰골의 지방 병원과
돌팔이 의사들에 지친 늙은이는
젊은 날의 신도시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스멀스멀 재개발의 광기가
스마트, 혁신, 재생 도시의 깃발을
너덜거리게 흔들 때,
이 낡은 신도시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중심은 진입할 수 없는 성채(城砦)
주변부의 삶은 원심력에 가속도가 붙어
한없이 누추해지는데
돌아갈 수 없는 신도시의 꿈이
까끌거리는 눈꺼풀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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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行星)


외줄로 몸을 묶은 페인트공이
아파트 외벽을 타고 내려온다
글자 하나를 칠하는데 십오 만원
내가 아는 오래전 시세는 그러했다

삶을 칭칭 묶고 내려오는 절박함이
당신의 글에는 있는가
페인트공의 행성이 나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단 한 줄도 남기지 못했다
진정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까악까악 까마귀가

아흔 살 할머니의 행성은
무료한 궤도를 돌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행성에 잠깐 갔다가
얼른 빠져나온다
외로움의 수렁은 지겹고 깊다

점잇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오늘 점잇기 하는 법을 까먹었다
1번 점에서 2번 점으로 선을 이어야 하는데
엄마는 점마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까만색 볼펜으로 칠해진
엄마의 행성은 천천히 내게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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