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지수야, 이거 막내 삼촌한테 좀 까달라고 해라."
엄마는 작은 스텐 그릇에 담긴 알밤을 내밀면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엄마는 명절만 되면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도와야 합니다. 엄마의 말씀은 이 집안에서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밥을 먹으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살 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지난주에 엄마는 나에게 가스불 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전기밥솥에 밥도 해서 먹을 줄 알아요.
"엄마는 늘 바빠. 그러니까 너는 혼자 있을 때, 밥도 지을 줄 알아야 해."
아무튼 명절 때에는 나도 덩달아 바빠집니다. 나는 스텐 그릇에 조심스럽게 과도를 챙겨서 작은방에 있는 삼촌에게 가져다줍니다.
"삼촌 이거, 엄마가 좀 깎아달래요."
"그래. 삼촌이 밤을 잘 까지."
막내 삼촌은 일산에서 삽니다. 그래서 나는 막내 삼촌을 일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거실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삼촌은 거기에 있으면 불편한가 봐요. 삼촌은 작은방에서 스마트폰으로 해외 축구 경기를 보고 있네요.
"삼촌, 삼촌도 명절이 싫지?"
"아냐, 명절이 왜 싫어? 지수도 볼 수 있고 좋은데."
"에이, 거짓말. 작은할아버지가 말 거는 게 싫잖아, 그치?"
"그건 좀 그래."
삼촌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삼촌의 흰 얼굴이 더 붉게 보이거든요. 그 말을 하는 삼촌의 얼굴은 하얗네요.
"우리 승호가 올봄에 병원을 옮기면서 연봉이 좀 올랐어. 나도 놀랐다니까. 1억이 좀 넘어."
열린 방문으로 셋째 작은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그 할아버지는 분당에 살아서 분당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어요. 그 분당 할아버지는 아들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1억이라는 돈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요? 나는 지난 설에 세뱃돈을 35만 원 받았거든요. 35만 원을 몇 번 받으면 1억이 되는 걸까요?
"삼촌, 1억은 얼마나 큰 돈이야?"
"글쎄, 아무튼 많은 돈이지. 지수는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괜찮아."
"돈이 많으면 좋기는 좋겠지?"
"꼭 그렇지는 않아."
삼촌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어요.
"세금을 떼고 그렇게 받았으면 많이 받는 거긴 하네."
둘째 작은할아버지가 분당 할아버지의 말을 받습니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는 평촌에 살아서 평촌 할아버지입니다. 평촌 할아버지는 딸만 셋이었는데, 막내 삼촌이 아들로 짜잔, 하고 나타난 것이지요. 그래서 막내 삼촌은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대요. 막내 삼촌은 누나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가,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얼굴도 참 귀엽게 생겼어요. 그런데 나이가 서른일곱인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평촌 할아버지 걱정이 커요.
"일산 도련님의 문제는 그러니까, 키야, 키."
"5센티미터 차이가 그렇게도 엄청나구나."
나는 엄마와 아빠가 일산 삼촌을 두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5센티미터는 아빠와 삼촌의 키 차이를 말하는 것이었어요. 아빠도 키가 큰 편은 아니거든요. 162센티미터인데, 삼촌은 157이에요. 엄마는 아빠가 1센티만 작았어도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아, 저기 김연경이가 나오네. 김연경이 키가 얼마지?"
분당 할아버지가 거실 벽에 걸린 TV를 보면서 말합니다. 배구 경기가 나오나 봐요. 후, 나는 밤을 깎는 삼촌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삼촌은 키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무척 싫어하거든요.
"의사가 돈을 많이 버니까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공무원만 한 직업도 어디 없어. 나라의 녹(祿)을 먹는다는 것이 어딘데 말야."
평촌 할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시네요. 막내 삼촌의 직업이 공무원이거든요. 삼촌은 시청에서 일하는 7급 공무원입니다.
"삼촌, 녹을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철 같은 데에 스는 녹 같은 거 말고, 뭐가 또 있어?"
"응, 그건 나라에서 주는 월급 같은 거야."
"아, 그렇구나. 오늘 하나 배웠다. 어디 가서 멋지게 써먹어야지."
"지수는 뭘 배우는 걸 좋아하는구나."
삼촌은 동그란 밤을 껍질 조각 하나도 없이 예쁘게 깎아놓으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밤을 깎는 삼촌의 손가락이 참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작년 추석에는 삼촌이 일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밤을 깎았는데, 너무나도 못생기게 밤을 깎아놓았어요. 내가 봐도 엄마는 그런 솜씨는 없는 거 같아요.
"네 엄마가 살림에는 뜻이 없지."
아빠는 가끔 일 때문에 집에 늦게 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밥상을 차리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뭔가를 기억할 때부터 엄마는 항상 일했어요.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은 모르겠어요. '시민운동'이라는데, 엄마말대로라면 좋은 일이라고 했어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그런 거라고. 엄마는 그런 엄마를 내가 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엄마가 바깥세상이 아니라, 나하고 좀 더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지수야, 여기 와서 약과 봉지 좀 가위로 잘라줘라."
나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가 귀찮았지만 얼른 부엌으로 갔어요. 엄마도 이런 날은 힘들 테니까요.
"어머니를 하루만이라도 요양원에서 모셔 올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 고모할머니의 뿌루퉁한 목소리가 들리네요. 고모할머니도 늙었지만서도, 할머니의 엄마가 보고 싶기는 할 것도 같아요.
"저번에 넘어져서 어머니가 다리를 다치셨잖아. 그 뼈가 아직도 안 붙고 있다는데 뭔 수로 모셔 오냐?"
분당 할아버지가 작은 고모할머니에게 시큰둥하게 말하네요.
"아니, 모셔 오기가 싫은 거겠지."
"야, 너는 그런 억지소리 좀 하지 마라. 그렇게 어머니 생각하면 네가 한 번이라도 더 가보던가. 새삼스레 무슨 효녀노릇이냐?"
"오빠는 무슨 말이 그래? 효녀 노릇? 그러는 오라버니는 효자 노릇 좀 해보기라도 했수? 그저 맨날 아들 자랑만 늘어지게 할 줄 알아. 나 원 참."
"자식 잘난 것도 죄냐? 너도 의사 아들딸 만들지 그랬냐? 자격지심도 유분수지."
나는 약과를 뜯어서 엄마에게 주고는, 엄마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어요.
"엄마, 나 작은방 삼촌한테 가 있을래."
엄마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보라며 손짓했어요. 작은방으로 오고 나니 두근두근 불안했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어요. 삼촌은 밤을 좀 깎다 말고, 계속 스마트폰으로 축구 경기만 보고 있었나 봐요. 까야 할 밤이 그릇에 많았거든요. 삼촌도 밤 까기가 좀 귀찮았는지도 모르죠.
"아이구, 저 볼을 저렇게 놓치네."
삼촌은 무릎을 탁, 치면서 안타까워했어요. 그때 삼촌의 머리가 잠깐 흔들렸는데, 흰 머리카락이 몇 개 보였어요.
"삼촌, 흰 머리카락 있어."
"응, 나도 알아."
"삼촌, 흰머리 안 나게 하는 방법은 없어?"
"그런 건 없어.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런데 삼촌, 작은 고모할머니하고 분당 할아버지 좀 싸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삼촌에게 그렇게 가만가만 말했어요.
"응. 어른들은 원래 이런 날 좀 싸우고 그러는 거야."
삼촌은 다시 밤을 깎기 시작했어요. 삼촌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예쁘게 밤을 깎아서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놓았어요. 못생긴 밤이 있다면서, 삼촌은 다 깎은 밤 하나를 나에게 주었어요. 내가 밤을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어요. 큰고모 할머니인가 봐요. 삼촌은 밤을 깎다 말고 현관으로 나갔어요.
"오셨어요?"
"아이구야, 우리 막둥이. 키는 좀 컸냐?"
큰고모 할머니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요. 큰고모 할머니의 목소리는 쇳소리 같아서 전부터 싫었어요. 삼촌은 어딘지 모르게 좀 슬퍼 보였어요. 다시 작은방으로 온 삼촌은 남은 밤을 깎기 시작했어요.
"삼촌, 내가 이거 하나 갖고 왔어. 삼촌 줄게."
나는 아까 약과 봉지를 뜯으면서 엄마 몰래 하나를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삼촌은 내가 건넨 약과를 보더니 조그맣게 웃었어요.
"우리, 이거 반씩 나눠먹자."
삼촌은 약과를 반으로 쪼개어서 나에게 건네주었어요.
"나도 지수처럼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약과를 먹으면서, 나는 삼촌의 딸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았어요. 삼촌에게 딸이 있으려면, 우선은 아가씨를 만나야지요. 그러려면 삼촌의 키가 조금 더 커야 할 것 같았어요. 내년에는 삼촌의 키가 5센티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