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단막의 희곡.

등장인물: 할머니 정 여사, 정 여사의 아들 진현, 며느리 주미

무대는 정 여사의 집 거실이다. 정 여사는 무대 중앙의 1인용 소파에 앉아있다. 정 여사 앞에 기다란 직사각형의 탁자가 있다. 그 탁자 왼편에는 2인용 소파가, 오른편에는 3인용 소파가 있다. 무대 왼편에는 작은 4인용 식탁이 있다. 식탁에는 물병과 컵이 놓여 있다. 오른편에는 현관 출입문이 있다. 등장 인물은 그 출입문으로 들어온다.

늦가을, 어느 금요일 오후. 안경을 쓴 흰머리의 정 여사는 거실의 소파에서 혼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때 현관에서 번호 키 소리가 나면서 며느리 주미가 들어온다. 주미는 40대 중반으로 다소 마른 체구이다.



주미: 올가을은 무슨 비가 이리도 오는지 몰라. (트렌치코트를 입은 주미가 우산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다.)

정 여사: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깨며) 아이구야, 여기가 어디냐?

주미: 어머니, 저예요. 이제 들어왔어요.

정 여사: 밖에 비가 오는 게냐? 우산을 들고 있네.

주미: 네. 가을비가 많이 오네요. 시장하지 않으세요? 저녁 드셔야죠.


주미는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소파에 걸쳐둔 후, 왼쪽의 2인용 소파에 앉는다.


정 여사: 아니다. 배가 하나도 안고파. 아까 누구더라, 아무튼 누구하고 밥을 먹었어.

주미: (딱한 표정으로 정 여사를 보며) 아휴, 그럴 리가요. 우리 어머니는 매일 까마귀 고기를 드셔서는 뭐든지 다 까먹으셔.

정 여사: (약간 노여운 목소리로) 아니래도. 아까 집에 온 손님하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어.

주미: (식탁을 힐끗 바라보며) 그런데 식탁이 아주 깨끗한데요. 그럼, 설거지도 어머니가 다 하신 거예요?

정 여사: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손님이 치우고 갔는지.


정 여사와 주미가 그렇게 대화하고 있을 때, 현관문에서 번호 키 소리가 나면서 진현이 등장한다. 40대 후반의 진현은 피곤에 절은 회사원이다. 배가 약간 나왔고, 정수리가 휑한 탈모에 시달리고 있다.

진현: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어머니, 저 왔어요. (주미를 보고는) 당신도 이제 들어온 모양이군.

정 여사: (아주 반갑게) 우리 아들 진현이가 왔구나. 오늘도 얼마나 힘들었니?

진현: 그래요, 어머니. 먹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정 여사: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가 우리 아들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고.

진현: 에이, 저는 그냥 어머니만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아들 며느리, 손주들 얼굴 잊어버리지 않고.

정 여사: 아무렴. 내가 그걸 왜 잊어버려? 그런데 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거냐?

진현: (크게 한숨을 쉬며) 어머니, 아버지는 8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정 여사: 아니, 그게 사실이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태껏 살아왔네. 그럼, 할머니는 어디에 계셔?

진현: (괴로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머니, 할머니는 15년 전에 돌아가셨다구요.

정 여사: 아, 그렇구나. 할머니가 네 아버지보다 먼저 가셔서 다행이다. 만약에 살아계셔서, 아들이 세상 뜬 걸 알면 얼마나 슬프셨을까? (정 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주미: 당신도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우선 여기 와서 좀 앉아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나도 이제 막 와서 앉아있는 참이라.

진현: (주미 옆자리에 앉는다) 오는데 길이 얼마나 막히던지. 이런 비 오는 날은 차 가지고 다니는 것도 일이야, 일.

정 여사: 우리 아들, 배고프지? 에미야, 얼른 저녁 준비해야지.

주미: (입을 삐쭉거리며) 어머니, 저도 좀 쉬고요. 어머니는 배 안고프다고 하셨죠? 아까 손님하고 식사하셨다고.

진현: (약간 놀란 표정으로) 뭐, 손님? 손님 누구? 우리집에 손님이 왔어?

주미: (진현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린다) 네. 어머니 손님이 낮에 오셨대요.

진현: (안도하며) 아, 그랬구나. 어머니, 누가 어머니를 찾아왔어요?

정 여사: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쎄다. 누가 오긴 왔어. 그래서 밥 먹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거든.

진현: 어머니, 아무튼 아무나 문을 열어주시면 안 돼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누가 벨을 눌러도 열어주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우리 가족은 번호 키 열고 다 알아서 들어오니까. 근데, 그 손님이 누굴까? 남자예요, 여자예요?

정 여사: (잠시 생각하다가) 흠, 남자 같아.

진현: 젊은 사람이에요? 아니면 늙은 영감?

정 여사: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이, 나도 잘 모르겠어.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구나.

진현: 어머니, 만약에 그 사람이 도둑이라 우리집 물건들 훔쳐갔으면 어쩐대요?

정 여사: (안절부절못하며) 정말, 그 사람이 도둑이었을까? 내가 도둑을 집에 들인 거야?

주미: (진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휴, 참 당신도. 그만 좀 해요. 어머니, 우시겠네.

진현: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어머니, 그러니까 아무나 문 열어주면 큰일난다구요. (주미를 보며) 당신도 말야, 어머니 혼자 놔두고 어디 좀 돌아다니지 말아.

주미: (서운하다는 듯) 영호 아빠, 내가 어딜 돌아다녔다고 그래요? 이가 아파서 치과 좀 다녀왔어. 주간보호센터에서 낮에 어머니 데려다 준 거 확인하고 나간 건데.

진현: 당신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을 집에 들어오게 한 거 아니야?

정 여사: (단호한 표정으로) 그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주미, 진현: (서로 바라보며) 아는 사람이요?

정 여사: 그래,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았어.

진현: (작게 한숨을 쉬며) 그래요, 어머니. 어머니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손님이 왜 어머니를 찾아왔대요?


진현은 목이 마른 듯, 식탁으로 가서 물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정 여사: 그건, 그러니까... 글쎄다. 아마, 내가 오라고 전화를 했을 거야.

주미: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진현: (다시 소파에 앉는다) 어머니, 우리가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아시죠?

정 여사: (슬픈 목소리로) 너희들이 밥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사람들한테는 내가 창피해서 그 말은 못 해.

주미: (천장을 쳐다보며) 아...

진현: (부아가 치미는 얼굴로) 어머니, 지금 어머니 체중이 얼만지 아세요? 83kg이에요. 너무 잘 드셔서 그래요. 우리가 어머니를 굶겼으면 그렇게 살이 쪘겠어요?

정 여사: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늘 배가 고파. 제대로 된 밥을 언제 먹었는지 몰라.

주미: (비꼬는 말투로) 어머니, 아까 온 손님하고 식사는 잘하셨어요? 뭐에다 드셨어요?

정 여사: (당황한 듯) 음, 그건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줬어. 짜장면하고 탕수육. 아주 잘 먹었어. 그래서 배가 하나도 안 고픈 거야.

진현: 그렇다면 아무튼 도둑은 아닌가 보네요. 도둑이 집주인한테 음식 시켜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정 여사: 아무렴. 그 사람, 착한 사람이야.

주미: 우리 어머니, 그 착한 손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나?

진현: (얼굴을 찌푸리며) 여보, 인제 그만 좀 하지?

주미: (짜증이 난 표정으로) 뭘 그만해요? 그러는 당신은?

정 여사: 왜들 그리 싸우고 그러냐. 내가 얼른 이 집을 떠나야지. 나, 송화리로 가련다. 거기에 진짜 내 집이 있어.

진현: (울화가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 송화리에는 어머니 집이 없어요. 여기가 어머니 집이라구요. 거기에 집 있으면, 팔아서 좀 돈이라도 아들한테 줘보세요. 어휴.

정 여사: (목소리를 높이며) 거기에 내 집이 있다고. 나 좀 거기에 데려다 다오. 여긴 내 집이 아냐. 거기 송화리 내 집에 가서 잘 거야.

주미: (차분하게) 어머니, 저녁 안 드실 거에요? 우리가 밥을 굶긴다면서요? 제가 저녁 잘 차릴게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간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신다.)

진현: 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 어머니 집은 여기고, 송화리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셨죠? 여기서 주무셔야 해요.

주미: 영호 아빠, 자꾸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왜 자꾸 쓸데없이 그래. 그냥 어머니 달래드려야지.

정 여사: (울먹이는 목소리로) 송화리에 못 간다는 거냐? 여기서는 잘 수 없어. 내 집이 아니라 잠도 안 오는데.

진현: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제가 내일 모셔다드릴게요.

정 여사: 그래, 정말 그럴 거지? 이 에미한테 약속해라.

진현: 네, 진짜, 정말로, 약속해요.

주미: (억지로 활기를 되찾으려는 듯) 어머니, 저녁 뭐 드시고 싶으세요? 미역국 어때요? 어머니, 미역국 잘 드시잖아.

진현: 어머니, 그냥 저녁이나 먹읍시다. (진현은 이제야 양복 외투를 벗는다.)

정 여사: 아까 그 손님하고 잘 먹어서, 나 배 안 고프다. 밥 생각이 없어.

진현: (일어나서 식탁으로 가서 앉는다) 그럼, 우리끼리 밥 먹을게요.

정 여사: 에휴, 저렇게 지들끼리만 또 밥을 먹지. 고얀 것들 같으니.

진현: 엄마! 내가 엄마 때문에 돌겠어, 돌겠다고. (식탁에서 일어나며 자기 가슴을 세게 친다)

주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호 아빠, 화내지 말고.

정 여사: 아까 그 손님은 나한테 친절했는데, 너는 이 에미한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냐?

진현: (소파로 다시 돌아와 앉는다) 그러니까, 어머니! 그 손님이 누구냐구요? 누군데 그렇게 친절하냐고요? 그 친절한 사람한테 어머니 아들이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잖아요. 어머니한테 맛있는 음식도 사줬다는데.

정 여사: 아, 생각났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미: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정 여사를 바라본다) 어머니, 그러니까 누구예요?

진현: 누구긴 누구야? 있지도 않은 사람 가지고 괜히 저러시는 거지.

정 여사: 그 사람이 왜 없어. 이름도 내가 알아. 덕호야, 덕호. 신덕호.

진현: 어머니, 신덕호가 누군데?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정 여사: 나 어렸을 적에 옆집 살던 애. 덕호가 참 착했거든. 덕호가 아까 왔어. 중절모 쓰고. 옷은 좀 낡았더라. 잘 살지는 못하나 봐.

진현: (안도하며) 아, 그랬구나.

주미: 어머니가 아는 사람이 집에 왔었다니, 도둑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정 여사: (웃음을 지으며) 덕호, 걔가 말이지. 나한테 연도 만들어서 날리게 해주고, 겨울에 나무로 썰매도 만들어 주고 그랬거든. 그런 건 오빠가 있으면 해주는 건데, 난 오빠가 없어서 늘 서러웠지. 근데 덕호가 착해서, 내가 말하면 다 들어줬더랬지. 근데 덕호가 공부는 너무 못했어. 그 착한 덕호가 아까 날 찾아온 거야.

진현: (주미를 향해) 여보, 저녁이나 먹자. 어머니, 진짜 안 드실 거예요?

정 여사: 내일은 송화리에 갈 거야. 꼭 데려다 줄 거지?

진현: (건성으로) 네, 그럴게요.

주미: 어머니가 살이 너무 찌셔서 걱정이에요. 밥을 조금만 드셔야 하는데.

진현: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로)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우리가 밥 굶긴다고 하는 소리 못 들었어?

정 여사: 덕호가 내일도 온다고 그랬어.

진현: (식탁으로 가서 앉는다) 어머니, 덕호든 누구든 아무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구요.

정 여사: (졸린 듯 고개를 소파에 대고 눈을 감는다) 덕호가 오면 열어줘야지. 그래도 내 손님인데...

주미: 저러니 내가 어머니 놔두고 어디를 못 가요, 못 가.



천천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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