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원(怨)


하루종일 나무는
몸을 뒤틀며 앓았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는
퍼렇게 날이 서 있다

무도(無道)한 세상의
비뚤어진 웃음
구겨진 너의 넋을
반듯하게 펼 수 없구나

원(怨)으로 채워진
커다란 바람이
작은 창문으로
미어지게 들어온다

가난하고 힘없는
작은 아이야
사뿐사뿐 가거라
가여운 눈물이
마르기 전에 얼른
바스러지는 봄의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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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있는 부엌


저녁 7시 45분
어제 내린 빗물의 때
흐린 부엌 창문으로
흐르는 누추한 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이 붉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흐트러지는 노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네온사인 간판이
끔뻑거리며 생소한
눈인사를 건넨다
멀고 먼 저 간판의 가게는
무얼 하는 곳일까

나이트클럽일 리는 없다
쇠퇴하는 구도심의 한 켠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관광호텔은 이제
폭파를 앞두고 있다

경양식집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넙데데한 노란 돈까스와
곱게 채 썰어진 양배추
그런 식당이 아니라면

병원일지도 모른다
24시간 문을 여는
정형외과는 장사가
잘된다고 들었다

밤의 혓바닥으로
삼켜지는 노을을
지켜보며 오도독
호두를 씹다가
탈각이 덜 된 껍질이
쿡, 찌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창문을 닫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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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고양이


너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다
지쳐버린 몸을
늦은 밤 낡은 소파가
가만히 삼킨다

새벽 2시 33분
아픈 눈이 떠진다
익숙하고 역겨운
밤의 고양이들
애타게 짝을 찾는
울음을 토해내며

나오너라 너는
어디에 있느냐
나 없이도
순전한 행복으로
웃음을 흘리는
너를 잊어야 하지만

울음소리를 삼키는
후덥지근한 초여름 밤
고양이들은 그렇게
짝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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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화분(花盆)


해마다 여름이면
집 앞 공터에 나타나는
화분 하나가 있다
연갈색 토기의 길다란
이 화분에는 이름 모를
풀때기가 자란다

방울토마토도
오이도 가지도
아닌 비쩍 마른
녹색의 식물은
가을이 되면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화분은
사라진다

무익함과 볼품없음
열매를 남기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엔 그래
인생이란 말이야
자기 씨앗 하나
남기는 거야

늙은 소설가 선생님은
인생의 의미를
그렇게 말해주었다

평생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가 쓴 소설과 시가
뙤약볕에 외롭게 누워있다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이상한 화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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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黑白)의 세계


남자는 제법
날렵한 체격으로
경쾌한 걸음걸이
중세의 궁수처럼
등 뒤에는 배드민턴
라켓 두 개가 삐죽
탈모가 진행되는 머리
중년의 나이에는
생기라는 것이 없다

그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여자는 자신의 나이를
패션으로 감추지 않는다
재킷의 벨트는 충만한
뱃살과 함께 춤춘다

화단의 회양목 잎사귀들을
좌르르 훑으며 걷는다
어리고 푸른 것들에게는
젊음의 가시가 있고
돋아나는 향기가 있다

갈라지는 풍경
흑백의 세계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는
나의 흰머리와
자꾸만 가려운 왼쪽
눈가에 가만히 잠든
검버섯을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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