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구글의 검색창에 내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름을 써넣어 본다. 어젯밤 늦게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써보았다. 바로 검색 결과가 나온다. 편의상 그 사람을 'H'라고 부르겠다. 내가 H의 근황을 확인해본 것은 20년만의 일이었다. H는 어느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있었다. 당시에 H는 박사 과정 중이었다.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결국에는 교수가 되었으니 참 잘 되었다 싶었다. 생각난 김에 모교 대학교의 학과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은 이제 은퇴해서 명예 교수의 직함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누군가를 인터넷의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더러는 H처럼 교수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번듯한 기관이나 단체에서 직함을 달고 있다. 사실 그런 것을 확인하는 일은 꽤나 오래도록 씁쓸함을 남긴다. 그 씁쓸한 감정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나는 타인의 삶을 시기하지 않는다. 다만 나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 싫을 뿐이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인터넷 자유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온 것을 읽었다.

  '독일어로 된 칸트 전집을 갖고 있어요. 이거 인터넷 장터에 내놓으면 사갈 사람이 있을까요? 독일에서 유학할 때 산 책인데 앞으로 더 볼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밥솥 운전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철학 전공으로 독일 유학까지 갔지만 이제는 주부로 살고 있는 이의 글이었다. 거기에 이런 저런 댓글이 달렸다. 유학까지 가서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글을 올린 이는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책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난 세월 내가 공부했던 것들이 그 주부의 '칸트 전집'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찌어찌 2개의 대학교에서 10년이란 시간을 공부에 쓰고도 그걸 제대로 써먹은 적이 없다. 그건 어떤 면에서는 '낭비'와 '무의미'에 가까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으니 되었다, 라는 생각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에는 3개의 화단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아파트 1층에 거주하는 이가 가꾸는 그 화단들은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화단은 계절에 맞추어 아름다운 꽃들이 오밀조밀하게 심어진다. 나는 그 화단을 지나칠 때마다 'have a green thumb'이라는 영어 표현을 떠올린다. 영어에서는 누군가 식물을 가꾸는 재능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한다. 그 화단을 가꾸는 이들은 바로 'green thumb'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군데 화단은 뭐랄까, 'green thumb'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무척 넓은 공간에 오만 잡다한 꽃나무들이 자리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조화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되는대로 늘어놓은 화분과 지주(支柱)대며, 흔하디 흔한 꽃들이 무질서하게 심어졌기 때문이다.

  초봄의 문턱에서 나는 그 화단을 지나가다 주인을 보게 되었다. 나이가 좀 든 영감이었다. 그는 봄을 맞아 겨우내 비워둔 화단을 정비하느라 나름 분주해 보였다. 나는 화단 주인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화단 가꾸기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내가 보기에 그 주인은 'green thumb'의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영감에게는 식물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화단으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화단을 가꾸면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이었다. 거기에 나와 같은 남의 시선과 생각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오늘 그 화단에서 무리를 지어 피어난 노란 수선화를 보았다. 그 주변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몇 가지 다른 꽃들도 있었다. 그다지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화사하게 핀 수선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리고 어젯밤 H의 근황을 확인하고 나서 나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살아있고, 써야할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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